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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1169)화 (1,169/1,192)

제1169화

사봉봉은 마음이 살짝 놓여 한숨을 내쉬었다.

“소타는 어릴 때부터 티격태격하는 일이 잦아 쉬이 다치던 아이였습니다. 하지만 중독은 어린애들의 장난과는 차원이 다르지요.

서북 역참에 있었을 때 오두독에 중독된 사람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자는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그대로 쓰러졌는데, 얼굴 전체가 까마귀처럼 새까맸습니다. 아버지는 맥을 짚어 보시더니 독성 때문에 위독한 상황이라 구할 방법이 없다고 하셨지요. 그자는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묵용린이 그녀의 손을 잡으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짐이 장담하겠소. 소타에게는 아무 일도 없을 것이오.”

그러더니 그가 또다시 물었다.

“배가 고프진 않소? 뭐라도 좀 준비해 오라고 하겠소.”

사봉봉은 한숨 자고 일어났더니 조금 배가 고프긴 했다. 결국 금천아에게 흘탑탕을 끓여 오라고 했다. 그녀는 어쩐지 아직도 희미하게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아직도 계화오에 사람들이 남아 있는 겁니까? 오늘은 정말 밤을 지새울 모양입니다. 예년에는 이랬던 적이 없는데 말입니다.”

묵용린이 웃으며 말했다.

“올해는 예년이랑 다르기 때문이오.”

“무엇이 다르단 말씀이십니까?”

묵용린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저었다. 금천아가 음식을 내오자 사봉봉은 유독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묵용린은 한 그릇 더 내오라고 분부한 뒤, 그녀와 함께 먹기 시작했다.

한 그릇을 막 다 비웠을 때쯤, 사희가 들어와 고했다.

“황상께 아룁니다, 영 대인이 찾아왔습니다.”

묵용린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영 대인이라니, 영 부문주가 아니고?”

사희가 고개를 저었다. 그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영구가 안으로 들어와 옷자락을 젖히고 무릎 꿇더니 어두운 목소리로 고했다.

“황상, 장공주 전하께서 납치되셨습니다.”

수건으로 입가를 닦고 있던 묵용린의 손이 그대로 멈췄다. 그는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방금 뭐라고 하였는가? 누가 납치를 당해?”

영구는 가동과 다르게 언제든 냉정을 유지했다. 그가 간략하게 상황을 전부 다 설명했다.

묵용린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수건을 천천히 내려놓은 그는 멍하니 영구를 바라보았다. 영구의 얼굴조차 못 알아보는 듯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황제는 만백성의 기둥이니 태산이 무너져도 낯빛 하나 변해선 안 되었다. 하지만…….

넋이 나간 채 앉아 있는 그의 모습에 사봉봉은 가슴이 쥐어짜이는 듯 아팠다. 그녀는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따뜻한 목소리로 위로했다.

“황상, 걱정하지 마십시오. 장공주 전하께선 천운이 따르는 분이라 아무 일 없을 겁니다. 게다가 얼마나 기민하신 분인데요. 괴한들에게 납치가 되었다고 해도 그들이 더 골머리를 앓을 겁니다. 분명 장공주 전하께선 어떻게든 빠져나오실 겁니다.”

묵용린은 역시 황제였다. 그는 금세 냉정을 되찾고 영구에게 말했다.

“일어나게. 청양을 데려간 자들이 누구인지 어느 정도 감이 오네. 지금으로선 영안의 소식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겠군.”

잠시 말을 멈춘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니, 더는 기다리지 못하겠네. 지금 좌상은 벽요궁에 있을 터, 가서 잡아들이게. 짐이 직접 심문할 것이니.”

영구는 알겠다고 대꾸한 뒤 수하들을 이끌고 좌상을 잡으러 갔다.

묵용린의 예상대로 좌상 허장우는 허 귀비의 벽요궁에 있었다. 그는 몇몇 동료들과 신나게 술을 즐기다 너무 늦은 것 같아 그만 돌아가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자리를 뜨려는 순간, 왕장량이 그들의 앞을 막아섰다. 시간이 너무 늦었으니 궁문을 잠갔다며 황상께서 대인들에게 묵을 곳을 마련해 주라고 분부했다는 것이다. 그는 궁에서 하루 묵은 뒤 내일 아침 어선에 초청하겠다는 말도 함께 전했다.

황제와 함께 아침 어선을 드는 건 누구나 간절히 바라는 일이었기에, 안 그래도 거나하게 취한 몇몇 대인들은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고 소태감이 안내해 주는 곳으로 따라갔다.

허장우는 조금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렸다. 안내를 받은 궁에 도착한 그는 소태감을 물리고 벽요궁으로 향했다.

허 귀비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찾아오자 그녀는 조금 뜻밖이었다.

“아버지, 이렇게 늦었는데 아직도 출궁하지 않으셨습니까?”

“나가지 못했다. 황상께서 궁에 남아 하루 묵고 내일 아침 함께 어선을 들자고 하시는구나.”

허 귀비는 조금 의아했다.

“그건 좋은 일이 아닙니까. 한데 어째서 그리 근심 가득한 표정이십니까?”

허장우가 고개를 저었다.

“이 아비는 황상께서 다른 이유로 남겨 두시려는 것 같구나.”

“아버지만 남으라고 한 것도 아닌 것을요. 다른 대인들도 더 있는 것 아닙니까?”

허 귀비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아버지, 너무 깊게 생각하시는 겁니다.”

허장우는 그래도 고개를 저었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그는 늘 신중하게 행동했다. 언제든 방법을 생각해 위험한 상황에서 빠져나갔다. 그 덕분에 몇 차례나 전화위복의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상황이 좋지 않다. 출궁해야만 해.”

그가 허 귀비에게 말했다.

“방법이 있겠느냐?”

허 귀비는 표정이 어두운 좌상을 바라보고 있으니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생각 좀 해 보겠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미처 생각을 마치기도 전에 영구가 수하들을 데려왔다. 그는 아무 말 없이 허장우를 향해 턱을 들어 올렸고, 그의 수하인 영가군이 좌상의 팔을 비틀어 붙잡고 그대로 데려갔다.

허 귀비는 화들짝 놀라 멍하니 있다가 황급히 소리를 내질렀다.

“대체 뭣들 하는 짓이냐, 이분은 좌상 대인이시다! 어찌 감히……. 무엄하다! 황상께 고할 것이다, 황상께…….”

영구가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훑었다.

“본관은 황상의 분부를 따르는 중입니다.”

허장우는 그간 황제와 단독으로 마주할 일이 많았다. 그때마다 황제는 늘 웃는 낯빛으로 온화하게 말을 건넸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황제는 포악한 살기를 띤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그가 한 마디라도 잘못 뱉으면 곧장 그의 목을 칠 기세였다.

그는 절로 몸이 떨렸지만 신하로서의 공경과 억울함을 얼굴에 한껏 드러내 보였다. 그의 표정에 다들 황제가 오해한 건 아닐지 의심을 가질 터. 설명만 잘하면 분명 문제없이 넘어갈 수 있을 것이다.

묵용린은 평소 허장우의 얼굴이 제법 반반한 편이라고 생각했었다. 허장우는 침착하고 고상한데다 유능한 인재였다. 그런데 오늘 이렇게 보니, 어딘가 못나 보였다. 어째서 이 사실을 이제서야 알아차렸단 말인가?

“황상.”

허장우가 가까이 다가와 예를 갖췄다.

“신이 잘못하였습니다. 이렇게 늦은 시각에 귀비 마마께 찾아가선 안 되었는데… 예의에 어긋난 행실이었습니다.”

묵용린이 옷자락을 젖히며 의자에 앉았다.

“잘못이 있다면서 어찌 무릎을 꿇지 않는가?”

허장우는 흠칫 놀라 멍한 표정을 짓다가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묵용린은 말을 빙빙 돌리고 싶지 않았다.

“허장우, 너와 내통한 강호인들은 어디로 갔느냐? 어서 사실대로 고하지 못할까!”

허장우는 대경실색하여 어쩔 줄 몰라 했다. 황제가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을 것이라고는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다. 보아하니 이미 그가 발뺌조차 하지 못할 만큼 명확한 증거를 가진 듯했다.

“황상, 신, 무슨 말씀이신지…….”

그가 입을 열자 묵용린이 재빨리 그의 가슴팍을 힘껏 걷어찼다. 그리고 화를 내며 소리쳤다.

“어서 이실직고하지 못할까! 장공주의 털끝 하나라도 건드렸다간 짐이 네 구족을 멸할 것이다!”

허장우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대체 비화루 사람들은 묵용청양을 무엇 하러 잡아갔단 말인가? 황제가 여동생을 얼마나 아끼는데, 저 말이 사실이라면 그의 오장육부는 갈기갈기 찢겨 나갈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는 그렇다 해도 지금 여기서 죄를 시인할 수는 없었다. 그랬다간 정말 구족이 멸하게 될 것이다.

“허장우, 정녕 짐을 무지한 어린애라 여기는 것이냐? 짐이 그리 멍청하게 속아 넘어갈까? 감히 조정의 황금을 강탈할 수 있는 자는 많지 않다. 강탈한 뒤에도 감히 하늘을 가리고 사가 상호에 죄를 뒤집어씌울 수 있는 자는 더더욱 없지.

비록 모든 실마리가 강호인들을 가리키고 있지만, 도성의 소식을 서북 군영까지 전해 사 장군이 병영을 이탈하게 하는 건 강호인들은 할 수 없는 일이다.

짐이 사가와 황후를 싫어한다고 착각하여, 이리 좋은 기회를 만들어 주면 사가를 처단할 거라 여긴 것일 테지. 이참에 귀비를 황후로 올리려고. 내 말이 맞느냐?”

허장우는 식은땀이 흘렀다. 젊은 황제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그의 심장에 내리꽂혔다.

과거, 황제는 그에게 허설령을 황후로 책립할 거라 암시한 적 있었다. 하지만 태상황의 서신을 받더니 사봉봉을 황후로 들였다.

그는 황제의 의중을 이미 알고 있던 데다 황제가 사봉봉을 싫어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암암리에 남원의 황금을 갈취하여 사가를 모함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사봉봉의 뒷배만 무너뜨리면 황후는 몰락할 테니까.

그렇게 되면 귀비가 황후에 오르는 건 당연지사였고, 그의 외손자는 훗날 황태자가 될 것이었다. 허씨 가문은 백 년이 지나도 그 혈통을 이으며 오랫동안 흥성하고 자손 대대로 영원히 부귀영화를 누리게 될 터…….

묵용린은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분노를 참지 못하고 또다시 발길질했다. 어찌나 힘껏 걷어찼는지, 허장우는 오장육부가 짓이겨지는 통증을 느끼며 피를 토했다.

“짐이 진작에 알아차리고도 손을 쓰지 않은 건 확실한 증거가 없어서였다. 교활한 네 놈이 발뺌할 게 뻔하니까. 하지만 이제 더는 발뺌하지 못할 것이다. 장명기와 그의 자식이 모두 짐의 손아귀에 있으니까. 아들을 위해서라도 장명기가 자백하지 않겠느냐? 짐이 네 죄를 만천하에 낱낱이 고해 너희 허가의 악명을 널리 알릴 것이다!”

허장우는 눈을 감았다. 이미 이런 지경이 되었는데 그가 무슨 말을 하겠는가. 그는 황제의 마음을 정확히 꿰뚫고 정확한 시기를 골랐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황제는 그가 상정했던 것보다 훨씬 더 침착했다. 중추 연회가 열리는 사흘간 통행금지를 해제한 것은 그들의 경계심을 풀기 위함이었고, 그를 궁에 남게 한 것은 그와 비화루와의 연결을 차단하기 위함이었다. 황제는 이 일에 별로 관심 없는 척 굴었지만, 암암리에 영안과 함께 그가 걸려들 함정을 파고 있던 것이다.

만약 장공주 전하만 납치되지 않았다면 조금이라도 변명을 했겠지만 지금은 그조차 힘들었다. 장공주가 납치되어 황제의 노기가 하늘을 찌를 기세라 어떤 말도 듣지 않을 게 뻔했기에, 아무리 청산유수라 한들 소용없었다.

잠시 뒤, 그가 눈을 뜨고 힘겹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황상, 지금으로선 죄신과 장공주 전하를 맞바꾸는 수밖엔 없을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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