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67화
가소타는 아래층으로 내려가지 않고 창가에서 잠시 바람을 쐬고 싶었다. 좁은 복도를 따라 끝까지 걸어가니 역시나 자그마한 창문이 있었다. 그녀는 창가에 기대어 목을 쭉 내밀었다. 저 멀리 채색된 등불이 온 거리를 가득 메웠다. 알록달록한 모습이 정말 장관이었다.
그렇게 그녀는 한참 동안 바깥 풍경을 흥미진진하게 구경한 뒤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웬 남자아이가 모퉁이에 앉아 제 손톱을 물어뜯고 있는 게 아닌가. 목을 잔뜩 움츠린 것이, 꼭 누군가 자신을 발견할까 봐 겁먹은 듯한 모습이었다.
가소타는 막내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언니와 오라버니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했으니 응석받이로 자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교만하고 횡포한 성격은 아니었고 오히려 자신보다 어린 사람에게 늘 연민을 느꼈다. 아이의 불쌍한 모습에 그녀가 가까이 다가가 물었다.
“얘, 왜 혼자 이러고 있어? 부모님은?”
아이는 아무 말 없이 쭈뼛거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난 나쁜 사람 아니니까 겁먹지 마.”
가소타가 아이 앞에 쪼그려 앉더니 소매에서 사탕을 꺼내 주었다.
“자, 이거 먹어.”
아이는 손톱만 씹을 뿐, 받지 않았다.
가소타가 참을성을 갖고 말했다.
“손톱 뜯지 말고. 더럽잖아. 오늘은 명절이니까 이 누님이 주는 거야.”
그녀는 사탕을 감싼 종이를 벗겨 아이 입에 가져다 댔다.
아이는 달콤한 냄새에 코를 벌렁거리며 잠시 망설이더니, 결국 마음을 저버리지 못하고 혀로 날름 사탕을 가져갔다. 가소타의 손에 아이의 침이 묻었다.
가소타는 손가락을 옷자락에 닦으며 창문을 가리켰다.
“바깥이 아주 예쁜데, 내가 안아서 보게 해 줄까?”
사탕 덕분에 아이는 가소타가 조금 친근해졌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소타는 아이를 안고 창가로 다가갔다.
“저 등 좀 봐. 예쁘지?”
아이는 예쁘고 떠들썩한 바깥 경치가 퍽 마음에 들었는지, 사탕을 와그작 깨물며 활짝 웃었다.
뒤이어 가소타가 질문을 건네자, 아이는 얌전히 대답해 주었다.
“부모님은?”
“아버지는 할아버지, 할머니를 만나러 가셨고, 어머니는 어디 갔는지 모르겠어요. 나더러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면 금방 돌아온다고 하셨어요.”
가소타는 생각했다.
‘어떻게 애를 이런 곳에 두고 갈 수 있지? 설마 도망간 건 아니겠지?’
“혼자 여기서 기다린 지 얼마나 됐어?”
아이는 고개를 저으며 의기소침한 목소리로 말했다.
“몰라요.”
가소타는 아이를 안고 있으니 점점 팔이 저려 왔다.
“이 누님이 맛있는 것도 주고 재미난 것도 구경시켜 줄게. 갈래?”
아이는 주저하며 고개를 저었다.
“어머니가 오면 절 못 찾을 거예요.”
“바로 저기 앞이야. 맛있는 것만 먹고 금방 돌아올 수 있어.”
가소타가 말했다.
“오늘은 명절인데, 맛있는 백옥 월병은 먹었어? 콩이 든 것도, 대추가 든 것도, 땅콩이 들어간 것도 있어. 얼마나 맛있는데.”
아이는 입 속에 있던 사탕이 거의 다 녹아 조금 아쉽던 참이었다. 입맛을 다시던 아이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금방 갔다가 돌아와요.”
가소타는 아이를 안아 들고 신이 나서 묵용청양을 찾아갔다.
묵용청양은 기다리다 짜증이 난 상태였다. 영안은 물론이고 안월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두 사람이 한적한 곳을 찾아 입을 맞추러 간 건 아닌지 궁금할 정도였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그녀는 기분이 몹시 나빴다. 뿌루퉁한 얼굴로 앉아 있던 그녀는 가소타가 돌아오면 그만 기다리고 나가자고 할 생각이었다.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온 가소타는 아이를 내려놓은 뒤 시큰거리는 팔을 툭툭 털었다.
‘세상에, 힘들어 돌아가시는 줄 알았네.’
“청양 언니.”
그녀가 신이 난 목소리로 묵용청양을 불렀다.
“봐요, 제가 아이를 하나 주워 왔어요.”
묵용청양은 시큰둥한 얼굴로 아이를 훑었다. 아이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녀는 별안간 호흡이 멈추고 머리가 폭발하는 기분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녀는 잊지 않고 난간 쪽에 걸린 발부터 꼼꼼히 내렸다. 그리고 다시 몸을 돌려 아이를 유심히 살폈다.
사실 유심히 살필 것도 없었다. 너무나 많이 봐 온 얼굴이기 때문이었다. 그간 그녀는 장명기의 처자식이 그려진 초상화를 들고 날마다 거리를 뒤졌었다. 그런 만큼 두 사람의 얼굴이 이미 뇌리에 깊이 박혀 있었기에 절대 잘못 알 리 없었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그렇게 찾을 땐 찾을 수 없더니 오늘 밤에는 어찌 저리 쉽게 가소타에게 끌려왔단 말인가.
그녀가 허리를 숙이고 방긋 웃으며 아이에게 물었다.
“성씨가 어떻게 되니?”
아이는 가소타의 옷자락을 잡고 쭈뼛대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네가 말 안 해도 알아. 넌 장씨야, 맞지?”
아이는 안색이 조금 변하더니,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소타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청양 언니, 정말 아는 애예요?”
“알아.”
묵용청양이 아이를 달래며 말했다.
“내가 너희 어머니랑 잘 아는 사이거든. 내가 어머니를 찾아 줄게, 어때?”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가소타에게 눈짓을 보냈다.
가소타는 평소와 달리, 이번엔 금방 그 의미를 알아들었다. 요즘 다들 장씨 성을 가진 이들을 찾느라 난리였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서둘러 맞장구를 쳤다.
“맞아, 우리가 네 어머니를 잘 알고 있지. 안 그랬음 네가 거기 숨어 있는지 내가 어떻게 알았겠어, 안 그래?”
묵용청양은 슬쩍 죽렴에 가까이 다가가 바깥을 살폈다. 별다른 이상은 없지만, 이곳에 장명기의 아들이 나타났다는 게 알려지게 된다면 누군가 뒤를 밟을 수도 있었다. 아이를 또다시 그자들의 손에 넘길 수는 없었다. 그러려면 대문으로 나가는 대신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가소타가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와 속삭였다.
“언니, 아이가 숨어 있던 곳에 작은 창문이 있었어요. 뒷골목으로 난 창문이니까 거기로 나가요.”
“그쪽엔 아무도 없어?”
“거기서 한참 동안 있었는데 아무도 없었어요.”
“그래, 거기로 가자.”
묵용청양은 허리를 숙여 아이에게 말했다.
“누님이 엄마를 찾아 줄게. 하지만 아래층에는 병사들이 많으니까 소리 지르면 안 돼. 그랬다간 병사들이 우릴 잡아갈 거야.”
아이는 줄곧 여기저기 숨어 지냈기 때문에 병사들에게 걸리면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묵용청양의 말에 아이는 전혀 의심하지 않고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묵용청양은 기둥에 묶여 있던 하얀 천을 풀어 아이의 얼굴을 가리곤, 가소타와 아이를 데리고 창문이 난 곳으로 달렸다.
창가에 도착하니 역시 아무도 없었다. 묵용청양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별로 높지 않았기에 그녀와 가소타가 뛰어내리는 건 문제없었다. 그러나 아이는 다리를 다칠 수도 있었다.
그녀가 가소타에게 물었다.
“아이를 받을 수 있겠어?”
가소타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요!”
“됐어, 그냥 내가 먼저 내려갈 테니 네가 나한테 던져. 밑에서 받을게.”
가소타는 조금 걱정되었다.
“청양 언니, 아이가 언니를 깔아뭉개면 어쩌죠?”
묵용청양이 눈을 희번덕거리며 말했다.
“내가 바보도 아니고, 그렇게 될 거 같아? 됐어, 잔소리 그만하고 어서. 들키면 큰일이니까.”
그녀는 말을 마친 뒤 창문 밖으로 훌쩍 뛰어내렸다.
가소타는 한다고 마음먹은 일은 꼭 해내는 성격이었기에, 묵용청양이 아직 제대로 자리를 잡기도 전에 아이를 내던졌다.
놀란 아이는 날카로운 비명을 내질렀고, 그 순간 지붕 위에서 곧장 움직임이 느껴졌다.
인영이 흔들리며 기왓장을 밟고 묵용청양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묵용청양은 서둘러 아이를 받았다. 품으로 아이가 떨어지자, 그녀는 중심을 잡지 못하고 몇 걸음 비틀거린 뒤에야 멈춰 섰다. 아이의 무게 때문에 가슴이 제법 아팠다.
시선을 돌리니, 막 뛰어내린 가소타가 바닥을 굴러 일어나고 있었다.
가소타가 묵용청양에게 물었다.
“청양 언니, 괜찮아요?”
묵용청양은 손을 내저으며 조용히 하라는 눈짓을 보냈다.
고개를 들어 보자, 두 사람이 지붕에서 뛰어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서둘러 아이를 가소타에게 넘겼다.
“어서 데려가. 기억해, 절대 다른 이한테 빼앗기면 안 돼.”
새하얀 달빛 아래, 장공주 전하의 결연한 모습이 가소타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가소타가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걱정하지 말아요, 언니. 아이가 있으면 저도 있을 거고, 아이가 보이지 않으면 전 분명 죽었을 테니까요.”
한시가 급박했기에, 묵용청양은 그녀의 말을 일일이 받아쳐 줄 수 없었다.
“어서 가!”
그녀가 두 괴한에게 손을 휘두르며 외쳤다.
“벽력자!”
강호인이라면 벽력이 화약 물품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서둘러 피하지 못하면 폭발 때문에 눈이 상할 수도 있었다.
두 괴한은 폭발을 차마 얕잡아 볼 수 없어, 땅바닥으로 몸을 날렸다.
가소타는 그 틈에 아이를 안고 불빛이 환한 거리로 잽싸게 내달렸다.
강호를 떠돌고 싶던 장공주 전하는 마침내 소원을 성취하여 강호인들과 맞붙게 되었다.
사실 묵용청양의 무술 실력은 그리 뛰어나지 않았다. 좀도둑 수준이라면 그녀도 대여섯 명은 상대할 수도 있겠지만, 이 둘은 실력이 월등히 뛰어난 자들이었다. 아무리 전력을 다하더라도 겨우 막는 수준에 불과했기에 그녀는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초조해해도 소용없었다.
아직 결판을 낸 것도 아닌데 또 다른 괴한 두 사람이 지붕에서 뛰어내리더니 합세했다.
괴한 넷이 장공주와 겨루면 어떻게든 그들에게 승산이 있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묵용청양은 달랐다.
그녀는 왼쪽으로는 벽력자, 오른쪽으로는 뇌화령을 뿌려 댔다. 그녀가 자꾸만 고함치며 소매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던지니, 괴한들은 반신반의하면서도 차마 목숨을 건 도박을 할 수 없기에 계속 피해야 했다.
화약 암기를 다 쓴 것인지, 묵용청양은 이번엔 독약 암기의 이름을 외치며 무언가를 던져 대기 시작했다.
“십향연근산!”
“폭우빙혼침!”
“탈심추명분!”
“함사사영!”
“…….”
그녀가 고함을 칠 때마다 괴한들은 이리저리 피하며 한참 동안 한데 뒤섞였다. 그러다 결국 그중 두 사람이 앞장서서 가소타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묵용청양은 마음이 조급했지만, 자신의 능력이 한계에 다다랐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은 그저 가소타에게 천운이 따라 벌써 대로까지 도망쳤기만 바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