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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1165)화 (1,165/1,192)

제1165화

“서북에 있을 때 사달이 났다는 소식을 들었소. 봉봉이 냉궁에 들어갔고, 당신은 옥에 갇힌 데다가 금언까지 귀양을 갔다기에 서둘러 돌아오려 했소. 한데 서북 경계를 벗어나기도 전에 매복해 있던 이들과 마주치고 말았소. 그때서야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라는 걸 직감했고, 나까지 끌어들이려 한다는 걸 알아차렸지.

다행히 서북은 내게 익숙하기에, 그들을 모조리 사막으로 유인해 승냥이에게 잡아먹히게 만들었소. 그 후 혼자 빠져나온 것이오.”

그가 간략하게 얘기하긴 했지만 사앵앵은 전부 다 이해했다. 그녀 역시 과거 사장풍과 처음 서북으로 향했을 때 승냥이 떼를 마주친 적이 있었기에 그게 얼마나 위험한지 잘 알고 있었다.

“그다음엔요?”

사금언도 다가와 자리에 앉고는 사장풍에게 물었다.

“서북을 빠져나오신 다음엔 어떻게 되었습니까?”

“서북 경계를 지나니 또 다른 이들이 따라붙더구나.”

사장풍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여 그들과 겨루게 되었는데, 강호인들이라 무공이 엄청났지. 그래도 내 명줄이 참 질겨서 다행이었다. 강으로 뛰어내려서 물살에 떠내려가며 겨우 따돌리고 목숨을 건졌단다. 한데 그자들도 참 끈질기게 따라붙더구나.

열 명 남짓한 괴한에게 숲에서 포위되었을 때는 정말이지 이제 끝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때 생각지도 못하게 영가군이 들이닥쳤고 적들을 함께 베어 주었지. 그러곤 임안성까지 보호해 주었단다.”

사씨 모자는 위험천만한 그의 여정을 들으며 똑같은 표정을 지었다.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입을 살짝 벌린 채 숨도 내쉬지 못했다. 영가군이 나타났다는 얘기를 듣고 나서야 두 사람은 목을 움츠리더니 천천히 한숨을 내쉬었다.

사앵앵이 물었다.

“그럼 영 대인께서 당신을 구해 주신 거예요?”

사금언이 물었다.

“가 숙부께서 영 대인께 도와 달라고 한 거 아닐까요?”

사장풍이 고개를 저었다.

“황상께서 영가군에게 날 데리러 가라고 하셨다더구나.”

사앵앵과 사금언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황상께서요?”

“그래, 영가군 사람이 그러더구나. 황상의 명을 받아 사 장군님을 반드시 살려서 임안성으로 데려가야 한다고 말이다.”

사앵앵은 눈이 뻑뻑한 느낌에, 눈가를 힘껏 문지르더니 조용히 중얼거렸다.

“부처님께서 도우셨네요.”

사금언이 말했다.

“부처님이랑 무슨 상관이에요. 황상께서 도우신 거죠.”

사앵앵은 잠시 침묵하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번에 황제한테 신세를 많이 졌구나.”

사장풍이 말했다.

“난 국구이고 황상은 사위인데, 사위가 응당 국구를 구해야 하지 않소.”

말을 마친 그는 별안간 무언가 떠올랐다.

“참, 봉봉이는 잘 지내고 있소?”

사앵앵이 말했다.

“당신이 들은 소문 중에 봉봉이 냉궁에 갔다는 소식만 정말이었어요.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나와서…….”

그녀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사장풍의 안색이 급변했다.

“우리 봉봉이를 정말 냉궁에 가두다니, 이런 망할 황제…….”

사앵앵이 깜짝 놀라 황급히 그의 입을 막았다.

“미쳤어요? 남들 다 들으라고 그런 소릴 하십니까? 냉궁은 봉봉이 자청해서 들어간 거예요. 남원 황금을 우리 은장에서 찾았으니, 황상께서도 어쨌든 뭔가로 천하의 입을 막아야 할 것 아니에요.

게다가 봉봉이 거기서 고생만 한 것도 아닙니다. 소타 말로는, 냉궁에 뭐든 다 있다더군요. 매일 황상과 어선도 먹고, 포동포동해질 만큼 잘 쉬었다고 합니다.”

사장풍이 그녀의 손을 잡고 빙긋 웃었다.

“웬일로 당신이 황상의 편을 드는 걸 다 보는구려.”

“어쨌든 당신을 구해 주었으니까요.”

사앵앵이 말했다.

“그 신세는 잊지 말아야 해요. 황상께서 앞으로 은자가 부족하다며 우리에게 도움을 청하면, 얼마든 내어 줘야 할 겁니다.”

사장풍이 웃으며 그녀를 훑었다.

“어째 보면 볼수록 사위를 챙기는 장모 같소. 점점 더 맘에 드는 것이오?”

“아직 그 정도는 아닙니다.”

사앵앵이 고개를 돌려 류 어멈에게 분부했다.

“어서 가서 장군께서 씻을 수 있도록 뜨거운 물과 깨끗한 옷을 좀 준비해 주게.”

류 어멈은 알겠다고 대꾸하곤 주자를 데리고 물을 준비하러 갔다.

사장풍도 곁채로 들어가자, 사앵앵이 사금언을 불러 조용히 속삭였다.

“어서 궁에 좀 다녀오너라. 네 아버지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누이에게 알리고 우리 대신 황상께 감사 인사를 전하라고 하거라.”

사금언이 투덜거렸다.

“이렇게 늦었는데… 내일 가겠습니다.”

“늦긴 뭐가 늦어.”

사앵앵이 그의 엉덩이를 찰싹 때렸다.

“어서 가거라. 그래야 네 누이도 마음을 편히 가질 거 아니냐.”

사금언은 집을 나서 말을 타고 달렸다.

바깥은 여전히 인산인해였고 대낮처럼 환했다. 마치 임안성의 모든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온 것 같았다.

집으로 돌아갔을 때 제법 애를 먹었던 아까의 경험을 살려, 그는 그나마 조용한 골목을 택해 달려갔다. 비록 조금 돌아가지만 막힘없이 달릴 수 있었기에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궁 문에 다다랐다.

궁 문을 지키는 보초는 그가 나왔을 때보다 배는 더 많아졌다.

그는 그저 방금 교대가 이루어졌거니,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는 요패를 꺼내 보여 준 뒤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봉명궁에 들어섰을 때 사봉봉은 계화오에서 막 돌아온 참이었다. 올해 중추 연회는 예년과 조금 달랐다. 과거에는 정해진 시간이 되면 연회를 파하고 각자 집으로 돌아가 가족들과 남은 명절을 보냈다.

하지만 올해는 누가 계획한 건지 공연이 끊임없이 이어지며 끝날 줄을 몰랐다. 가무와 연주는 물론이고, 나중엔 희극, 설서, 잡기, 불꽃놀이까지 펼쳐졌다.

손님들은 즐거움에 발을 떼지 못했고, 피곤해지면 가까운 궁전에서 잠시 잠을 쉴 수 있도록 적절히 안내 받았다. 술을 진탕 마신 후엔 또다시 놀았다. 다들 밤이 새도록 놀 기세였다.

사봉봉은 종친 부녀자들에게 이끌려 함께 마조를 두어 판 두었는데, 정신이 사나워서 봉명궁으로 피신했다. 이제 막 자리에 앉아 뜨거운 차를 마시던 중, 마침 사금언이 찾아왔다.

사금언이 단도직입적으로 모든 얘길 털어놓자 사봉봉은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그러다 황제가 영가군을 보내 아버지를 구해 주었단 말을 듣고는 놀란 나머지 얼떨떨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황상께서 그러셨구나.”

“응, 어머니가 누님한테 가서 황상께 감사 인사 좀 대신 전해 달라셔.”

사금언은 말을 마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버지께서 이제 막 돌아오셨으니 얼른 가 볼게.”

사봉봉은 서둘러 집에 갈 생각뿐인 남동생이 조금 부러웠다. 그녀도 아버지를 보러 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무사히 돌아왔으니 그것만큼 중요한 건 없었다. 집 안에서 다른 건 다 잃어버려도 되지만 네 식구만큼은 누구 하나라도 없어선 안 되었다.

사봉봉은 저 멀리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사금언을 바라보며 작게 탄식을 내뱉었다. 그러곤 이내 웃음을 참지 못하더니 경옥과 경화에게 말했다.

“목욕을 할 터이니 시중들 준비하거라. 본궁도 피곤해서 그만 쉬어야겠다.”

그런데 그녀는 목욕을 마친 뒤에도 잠이 오지 않았다. 사금언이 가져온 소식 때문에 쉽게 마음이 가라앉지 않는 듯했다. 그녀는 화장대 앞에 앉아 머리카락을 빗으며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금천아에게 물었다.

“황상께선 지금 주무실까?”

금천아는 아무 말 없이 밖으로 달려 나가 봉명궁 난간에서 승덕전을 빤히 바라보더니, 또 금세 방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승덕전이 대낮처럼 환히 밝혀진 것을 보면 아직 주무시지 않고 계신 게 분명합니다.”

사봉봉은 조금 망설여졌다. 감사 인사를 하러 가고 싶었지만, 묵용린을 화나게 했으니 간다 한들 그녀를 상대해 주지 않을지도 몰랐다.

금천아가 그녀의 마음을 읽고 입을 열었다.

“마마, 소인이 생각하기에 오늘 일은 마마께서 잘못하셨습니다. 애당초 그 토끼 인형을 숙비께 드리지 않으셨어야 했습니다. 설령 드린다 하더라도 며칠이 지난 뒤에 그러셨어야 합니다. 선물을 받자마자 금세 남에게 준다면 누구든 화가 날 겁니다. 마마께선 황상을 얼마나 싫어하시길래 황상께서 하사하신 선물까지 그리 싫어하시는 겁니까?

장군께서 돌아오신 것이 얼마나 큰 경사입니까. 이는 분명 황상의 공이 크니 마땅히 감사 인사를 드리러 가셔야지요. 황상께서 요즘 마마를 아껴 주시니 마마께서 따뜻한 말 몇 마디만 해 드리면 황상의 화도 사르르 풀릴 겁니다.”

사봉봉은 그 말에 마음이 조금 움직였다. 그녀가 거울을 보며 말했다.

“하지만 본궁은 벌써 머리를 다 푼 것을 어찌 하느냐. 이런 모습으로 가는 건 좀 아니지 않겠느냐?”

금천아는 얼토당토않다는 듯 받아쳤다.

“그게 뭐 어떻습니까. 부부가 한 침상에서 함께 자다 보면, 무슨 모습인들 못 보겠어요?”

사봉봉은 그녀의 말에 얼굴이 붉어져서는 빠르게 쏘아붙였다.

“그게 무슨 헛소리야!”

경옥은 사봉봉의 머리카락을 빗겨 주며, 입을 가리고 웃었다.

“마마, 금천아 언니가 좀 거칠게 말하긴 했어도 도리에 맞는 말입니다. 그래도 가 보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사봉봉도 그럴 생각이었다. 묵용린은 그녀의 아버지를 구해 주었는데 그녀는 중추에 그의 기분을 상하게 했으니, 다시 생각해 봐도 역시 너무한 일이었다.

그녀는 경화에게 피풍을 가져오라고 분부한 뒤 직접 매듭을 묶고 금천아와 함께 승덕전으로 향했다.

사봉봉이 승덕전에 도착했을 때, 묵용린은 푹신한 의자에 기대어 책을 읽고 있었다. 그녀가 찾아왔다는 말에 황급히 책을 내려놓은 그는 마중을 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생각을 바꾸고 다시 몸을 기댄 채 책을 계속 읽는 척했다.

사봉봉이 안으로 들어와 예를 갖췄다.

“신첩, 황상을 뵙습니다.”

묵용린은 콧방귀를 뀌고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사봉봉은 몸을 숙인 채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순간 갓 입궁했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도 묵용린은 그녀를 이렇게 대했다.

‘그래, 돌고 돌아 또다시 원점이 되었구나.’

그녀가 생각에 잠겨 있는데 짜증스러운 묵용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뭘 그리 가만히 있는 거요? 부르지 않으면 일어나지 않을 셈이오?”

사봉봉은 이곳에 오겠다고 마음먹었을 때부터 묵용린이 자신을 어찌 대하든 살갑게 굴기로 다짐했다. 우선은 그의 기분을 달래 준 뒤에 제대로 얘기를 나눌 생각이었다.

“황상은 황제이십니다. 황상께서 일어나라고 말씀하지 않으시면, 신첩이 어찌 감히 마음대로 움직이겠습니까.”

그녀는 약간의 억울함이 섞인 목소리로 부드럽게 말했다.

역시 묵용린은 그녀의 말에 책을 내려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이 조금씩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사봉봉은 그가 그런 눈빛으로 바라볼 때 가장 무서웠기에, 고개를 반쯤 숙이고 부끄러운 기색을 내비쳤다.

묵용린도 그녀의 마음을 알아차리곤 목청을 가다듬으며 진지한 모습으로 말했다.

“이리 늦은 시간에 황후가 이곳은 무슨 일로 찾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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