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64화
묵용청양은 줄을 서서 기다리고 싶진 않았기에 모든 화를 영안에게 쏟으며 성질을 부렸다.
“영안도 참. 홍안지기랑 시시덕대며 놀 줄만 알지, 우리는 완전히 잊어버렸다니까.”
가소타도 그녀를 따라 성질을 부렸다.
“그깟 홍안지기가 뭐라고. 우리보다 친하대요?”
옆에 있던 사내는 가소타의 말이 우스웠는지 일부러 그녀를 놀렸다.
“홍안지기는 만나고 싶다고 만나지는 게 아니라 인연이오. 그런 인연이 있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이오?”
가소타의 마음속엔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언니와 오라버니들이 가장 가까웠다. 홍안지기는 개뿔! 게다가 청양 언니는 영안 오라버니와 얼마나 친했는데, 영안 오라버니는 어찌 홍안지기 때문에 청양 언니를 까맣게 잊을 수 있단 말인가? 그녀는 그 홍안지기인지 뭔지가 청양 언니의 기분을 나쁘게 하는 자라면 꼭 죽도록 때려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행히 점원이 나와서 들어갈 인원을 세던 중, 익숙한 청양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곧장 손을 들어 그녀를 불렀다.
묵용청양이 가까이 다가가자 점원은 그녀에게 안으로 들어오라며 손짓했다.
“안월 아가씨가 소저와 영 공자께 드릴 별실을 따로 빼 두라고 하셨습니다. 어서 올라가시지요.”
그의 말에 모든 이들이 묵용청양을 부러운 눈길로 바라보았고, 묵용청양은 가소타와 함께 당당하게 안으로 들어섰다. 순간 가소타는 영안의 홍안지기가 꽤 괜찮은 사람인 것 같다는 생각에, 그자를 죽도록 패는 건 잠시 보류하기로 했다.
묵용청양은 위층으로 올라가며 점원의 말을 곱씹었다. 자신과 영안에게 줄 별실을 따로 빼 두라고 했다는 건, 영안이 이곳에 아직 오지 않았단 뜻이 아닌가?
‘궁에도 없고 이곳에도 없다면 영안은 대체 어딜 간 거지? 설마 사금언처럼 집으로 돌아가 기홍 고고와 함께 있나?’
그녀는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이미 별실에 들어선 뒤였다. 그녀가 난간 옆에 앉자 점원은 다과를 가져다주곤 또 급히 돌아갔다. 손님이 많은 날이라 점원들은 거의 날뛰듯 돌아다녀야 했기에 몇 마디 시답잖은 말을 나눌 시간도 없었다.
가소타는 처음 온 이곳이 신기하기만 했다. 난간에 기댄 그녀는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로 떠들썩한 아래층을 구경했다. 오늘 밤, 청이각에서는 묘기 공연을 선보이고 있었다. 손님들의 갈채가 연신 터져 나왔고, 은자와 동전이 비 오듯 무대 위로 쏟아졌다.
묵용청양은 무대에 선 사람이 청이각의 다른 명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 명기의 이름은 떠오르지 않았지만, 춤을 아주 잘 추었던 건 기억했다. 그녀는 발을 머리끝까지 들어 올리기도 했고, 온몸을 동그랗게 말 때도 있었다. 또, 얇은 비단 끈 위에 서서 춤을 추기도 했다. 궁에 있는 무희들보다 더 늘씬하고 우아한 게, 실력이 정말 뛰어난 여인이었다.
다만 묵용청양은 지금 온 신경이 영안에게 쏠려 있었기에, 공연을 구경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가소타가 끊임없이 감탄을 내지르는 소리만 듣고 있었다.
* * *
사금언이 집에 들어섰을 때, 사앵앵도 마침 돌아온 상태였다.
사가 상호는 매년 등을 내걸었는데, 올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집안에 사달이 났다고 해도, 당장 사가 상호의 죄라고 판결이 난 게 아니라면 사앵앵은 얼마든지 가슴 펴고 당당히 지낼 수 있었다. 그녀는 주변에서 들리는 유언비어 따위에도 겁내지 않았다.
사앵앵은 직접 사가 상호 본점 앞에 등을 걸었는데, 그 등은 자신의 딸을 위한 것이라 봉황 모양으로 만들었다. 꼬리에 반짝이는 조각들을 수없이 박아 넣은 덕에, 불을 붙이자 오색찬란한 빛이 번져 나갔다. 이따금 불빛이 흔들릴 때면 마치 공작새가 꽁지깃을 접었다 펴는 듯 아름다웠다.
사씨 모자는 방에 앉아 차를 마셨다. 과거엔 중추가 되면 온 가족이 한데 모여 월병을 먹고, 꽃등을 걸곤 했었다. 정원에서 달도 구경하며 어느 집보다 떠들썩하게 보냈는데…….
하지만 지금 사봉봉은 궁에서 쉽사리 나올 수 없었고, 사장풍은 행방불명된 데다가, 사가 상호는 누명까지 쓴 상태였다. 남은 사람이라곤 사앵앵과 그녀의 아들뿐이니, 적적하기 그지없었다.
사앵앵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금언도 따라서 한숨을 내쉬었다. 찻물은 차갑게 식었고, 탁자에 놓인 월병과 다과는 그대로였다. 그런 모습이 적막함을 한층 더 짙게 만들었다.
옆에서 시중을 들던 류 어멈은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아하에게 눈짓을 보냈다. 눈치가 빠른 아하는 사금언에게 장난스럽게 말을 걸었다.
“도련님, 궁 안은 엄청 떠들썩하지요?”
사금언은 턱을 괸 채 탁자에 놓인 촛불을 바라보며 담담히 말했다.
“그냥 그래.”
아하가 또다시 물었다.
“우리 마마께선 잘 지내시죠?”
사봉봉을 언급하자 사앵앵이 눈을 반짝이며 기대가 가득 담긴 눈빛으로 아들을 바라보았다. 사금언은 어머니의 시선에 솜털이 쭈뼛 서는 기분이었다. 사봉봉이 잘 지내고 있다고 말하지 않으면 어머니에게 흠씬 두들겨 맞을 것 같았다.
그가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그럼, 마마께선 잘 지내시지.”
그는 사봉봉이 어떻게 잘 지내고 있는지는 말하지 못했다.
사앵앵이 물었다.
“오늘 네 누이가 무슨 옷을 입었더냐?”
사금언은 묵용청양과 노는 데 정신이 팔려서 사봉봉에겐 찾아가지도 않았는데, 그걸 어찌 알겠는가. 그는 어쩔 수 없이 대충 둘러댔다.
“빨간 옷을 입었던데요. 치마엔 봉황이 수놓였고, 겉으로만 봤을 땐 엄청 화려했습니다. 아, 머리에 봉관을 써서 제법 위풍당당해 보이기도 했습니다.”
사앵앵이 위안을 얻은 듯 미소를 지었다. 비록 사봉봉이 황후가 되는 건 원치 않았지만 어쨌든 그녀가 위풍당당해 보이는 건 기뻤다.
사앵앵이 기뻐하는데, 그는 문득 다른 일이 떠올라 서둘러 입을 열었다.
“그리고 더 위풍당당했던 건, 봉가가 도착한 뒤에 누이가 황상보다 앞장서서 걸어가더라고요…….”
사앵앵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응당 함께 걸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더냐? 어찌 황제보다 더 앞장서서 걷는단 말이야? 황제가 꼬투리라도 잡으면 어찌하려고? 둘 사이가 또 안 좋아진 것이냐?”
“아뇨, 아뇨.”
사금언이 서둘러 말했다.
“누이는 그렇게 한 절반 정도 가더니 멈춰 서서 황상을 기다렸습니다. 그러곤 함께 손을 잡고 걸어왔죠.”
사앵앵은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
“그리고? 네 누이가 다른 말은 더 안 하더냐?”
사금언은 또다시 아무렇게나 대꾸했다.
“누이 말로는, 어머니께서는 마음 편히 계시랍니다. 아버지는 금방 돌아오실 거라고요.”
사앵앵이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구나. 재산을 아무리 많이 잃어도, 네 아버지와 맞바꿀 수만 있다면 그리하고 싶구나.”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무언가 정원에 떨어지며 나지막한 소리가 났다.
암암리에 정원을 호위하고 있던 자들이 곧장 몽둥이를 들고 달려갔다. 그자를 마구 매질하려는데, 낮은 호통 소리가 들려왔다.
“나다!”
사앵앵은 그 찰나의 순간, 눈물이 가득 고여서는 밖으로 뛰쳐나갔다. 사앵앵뿐만 아니라 방에 있던 모든 이들이 그 소리를 듣고 뛰쳐나왔다.
사장풍은 그의 호통에 호위들이 물러나자, 그를 향해 쏜살같이 달려오는 사앵앵을 볼 수 있었다. 그는 두 팔을 활짝 벌려 아내를 품에 안았다.
사앵앵은 그를 힘껏 부둥켜안았다. 건장한 허리와 익숙한 숨결. 그녀의 남편이 돌아온 것이다. 늘 가슴 졸이던 게 마침내 가라앉았다.
하지만 그래도 겁이 났다. 겁이 나 죽을 것만 같았다. 그녀는 온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그녀가 아무리 소문난 능력자고 홀로 모든 걸 다 관장한다고 해도, 위풍이 넘치는 사 주인장이라 해도 그녀의 기둥은 사장풍이었다. 그가 없으면 그녀는 어찌할 바를 모르는 어린 부인일 뿐이었다.
사장풍은 사앵앵이 이러는 모습을 거의 본 적 없었기에 가슴이 저릿했다. 그는 그녀를 더욱 힘껏 껴안고 그녀의 머리에 입을 맞췄다.
그는 그녀를 달래 주고 싶었으나, 자신도 떨고 있는 것까진 자각하지 못했다. 집으로 돌아오기까지 얼마나 위험하고 괴로웠는지 한두 마디로는 다 설명할 수 없었다. 그도 두려웠다. 만약 정말 돌아가지 못한다면, 사앵앵은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괜찮소.”
그가 나지막이 그녀를 위로했다.
“앵앵, 이제야 돌아왔소.”
사앵앵은 아무런 미동도 없이 그를 꽉 껴안기만 했다.
팔이 조금씩 조여 오는 듯한 기분에 사장풍은 어쩔 수 없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는 아이를 안 듯 그녀를 안아 들고서 방으로 들어갔다.
시종들도 그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주자와 아하는 서둘러 방문을 닫았고, 류 어멈은 옆에서 눈물을 훔쳤다. 사금언의 눈도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가 가볍게 눈을 깜박이자, 눈가를 타고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사앵앵도 울고 있었다. 어찌나 서럽게 우는지 어깨가 다 들썩였고 울음소리도 새어 나왔다. 뜨거운 눈물이 사장풍의 옷깃을 적셨다. 수많은 전투를 겪은 사 장군도 순간 눈시울이 붉어져 고개를 뒤로 젖혀야 했다.
그는 조용히 사앵앵을 안고 있다가 사금언에게도 한쪽 팔을 벌렸다. 사금언은 훌쩍거리며 다가가더니 아버지의 품에 기댄 채 울음을 터뜨렸다.
사금언이 울자, 사앵앵은 오히려 울음을 그쳤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고개를 든 그녀는 사장풍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그러더니 가늘게 떨리는 손가락으로 그의 눈매를 어루만지며 흐느꼈다.
“오느라 고생하셨습니다.”
“고생은.”
사장풍이 그녀의 손을 잡고 잔뜩 목멘 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집에서 더 고생하지 않았소.”
사앵앵은 옷소매로 눈물을 닦고 아들의 어깨를 토닥였다.
“되었다, 그만 울거라. 아버지께서 무사히 돌아오셨으니, 웃어야지.”
감정이 한번 터지자 사금언은 쉽게 추스르기 힘들었다. 어머니의 말에 부끄러움을 느낀 그는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모퉁이로 걸어갔다. 그리고 몸을 돌려 남은 울음을 토했다.
류 어멈은 금세 국수를 내왔고, 뒤이어 따뜻한 요리를 만들어 왔다. 허기가 졌던 사장풍은 곧장 자리에 앉아 음식을 한가득 입에 넣었다.
사앵앵은 음식을 순식간에 먹어 치우는 그의 모습에 또다시 눈물이 흘렀다. 분명 그간 엄청난 고생을 했을 터. 그녀는 조용히 눈물을 닦고 그의 접시에 소고기 조림과 수육을 덜어 주었다. 평소 사장풍이 좋아하던 음식이었다.
“시장하시죠? 많이 드십시오, 부족하거든 더 가져오면 되니까요.”
사장풍은 국수 한 대접을 깨끗이 비운 뒤에야 시원하게 트림했지만 그래도 젓가락을 내려놓진 않았다. 곧 그는 아까보단 천천히 소고기 조림을 집어 입에 넣었다.
사앵앵이 물었다.
“대체 어찌 된 일입니까? 그간 어디 가셨던 겁니까?”
사장풍은 사앵앵의 성질을 잘 알고 있었기에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그녀에겐 사실대로 다 말해 주었다. 이번에도 그녀를 속일 생각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