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63화
묵용린은 묵용성과 송교를 데리고 계화오에서 그리 멀지 않은 대전으로 향했다.
안으로 들어선 그가 묵용성을 막아서며 말했다.
“넌 잠시 밖에서 기다리거라.”
묵용성은 완강히 거부했다.
“황형, 어찌 남녀가 단둘이…….”
묵용린은 어처구니가 없어 웃음이 났다.
“저 여인은 짐의 숙비다. 짐과 함께 있지도 못한단 말이냐?”
묵용성은 그렇게 말하는 묵용린이 원망스럽기만 했다.
“황수는 오늘 처음 숙비를 만났고 황형도 마찬가지시지요. 궁에 들어온 후로 눈길 한 번 안 주시고, 사람을 이렇게 업신여길 수는 없습니다…….”
평소였다면 묵용성은 이렇게까지 대담하게 굴지 않았겠지만, 오늘은 취기를 빌린데다 송교 앞에서 너무 무력하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묵용린은 속으로 콧방귀를 꼈다. 참으로 보기 귀한 광경이었다. 겁쟁이 아우가 마침내 그와 맞서려 하다니. 보아하니 아우는 이 여인에게 정말 진심인 듯했다.
그가 묵용성을 밀치며 얼굴을 굳혔다.
“고작 그깟 술기운에 짐에게 맞서지 말거라. 후환이 두렵지도 않으냐?”
묵용성은 비틀거리며 문 옆에 기대섰다. 자신이 들어갈 수 없다는 걸 깨달은 그는 송교를 향해 소리쳤다.
“겁내지 마십시오. 제가 밖에 있으니까요!”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희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성 전하는 정말 평범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무래도 청양 전하께 그 기술을 전수 받은 듯했다.
안 그래도 어떻게 될지 예측할 수 없었는데, 묵용성의 말에 송교는 더더욱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녀는 차마 대답도 할 수 없어서 조용히 묵용린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조금 전 연회에서 묵용린은 아우가 어느 집 젊은 부인을 마음에 둔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당연히 일 처리가 어려울 거라고 예상했는데, 알고 보니 또 그의 여인이었다. 이는 분명 묵용성의 잘못이었다. 어찌 이리 매번 형의 여인을 좋아한단 말인가?
하지만 그 역시 여전히 아우에게 켕기는 구석이 있었다. 처음엔 황후를, 그다음엔 숙비를 좋아하다니. 감정이란 문제는 어디까지나 선후를 가려야 하는 법. 하지만 사봉봉은 예외였다. 숙비에 관해서만 얘기하자면, 처음 궁에 들인 이후로 그는 숙비를 까맣게 잊어버렸다. 여인을 가까이할 수 없는 그의 은밀한 병만 아니었어도 아마 숙비는 진작에 시침을 들었을 것이다.
그는 규율을 중시했지만 정도 많은 사람이었다. 숙비가 입궁하고도 그녀와 대면한 적이 없었던 그는, 묵용성이 아니었다면 아마 숙비라는 존재가 있었는지도 기억하지 못했을 것이다. 헛되이 시간을 지체하는 것도 죄라면 죄였다. 차라리 남을 도와 덕을 쌓는 편이 나을 터. 그런데 아무리 묵용성이 마음에 품은 여인이라고 해도, 본인의 의중을 묻긴 해야 할 것 아니던가?
옷자락을 젖혀 의자에 앉은 그가 송교를 바라보며 턱을 살짝 들어 올렸다.
“중추절 밤에 성아와 계화림에서 밀회를 하였으니, 이는 사약을 받아 마땅한 죄로…….”
송교가 화들짝 놀라 무릎을 꿇고 애원했다.
“황상, 성 전하는 아무 상관없습니다. 그저 신첩이 혼자 잘못한 일입니다…….”
묵용린은 조금 뜻밖이었다. 놀랍게도 송교가 혼자 죄를 뒤집어쓰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물었다.
“성아와 안 지 얼마나 되었소?”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신첩은 그저 성 전하와 시를 나누는 벗입니다…….”
송교는 차마 더는 숨길 수 없었기에 두 사람이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낱낱이 고했다.
묵용린은 그녀의 말에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묵용성이기에 충분히 할 만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 눈에는 황당해 보일지언정, 그의 아우에게는 퍽 낭만적인 일로 마치 눈물겨운 가락처럼 감동이었으리라.
그가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짐이 만약 궁을 떠나라 명하면, 성아에게 시집갈 의향이 있소?”
송교가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황상, 그게…….”
“짐이 있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소. 그저 원하는지 원치 않는지만 말하면 되오. 비록 그대가 숙비이긴 하나, 그건 그저 허황된 명성일 뿐. 어찌 긴긴 세월을 그대 홀로 적막한 궁에서 보낼 수 있겠소. 성아가 그대를 흠모하니 짐은 부부의 연을 맺어 주고 싶소.
헛된 숙비로 지내는 것보다 가장 높은 친왕비로 지내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하오. 짐에게 아우는 성아 하나뿐이니, 짐은 그 애가 평생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도록 지원할 것이오. 아내는 지아비를 따라 존귀해지는 법이니, 그대도 한평생 잘 지낼 수 있을 것이오. 이제 그대의 선택만 남았소.”
송교는 그의 말에 냉정을 되찾고 진지한 모습으로 말했다.
“황상, 신첩은 적막한 궁에서 죽을 때까지 천천히 버틸 생각으로 입궁한 날부터 홀로 숨어 지냈습니다. 이는 신첩의 운명이니, 신첩은 그 운명을 받아들이겠다고…….”
묵용린은 그녀의 말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 고지식한 사람이, 설마 성아를 저버리겠다는 것인가?
송교는 감정이 복받쳤는지 코를 훌쩍이며 말했다.
“성 전하께서는 신첩과 시를 나누는 벗이자, 지기인 셈입니다. 이번 생에 어렵사리 지기를 만났는데 만약 그 지기와 서로 의지하며 살 수 있다면 어찌 원치 않을 수 있겠습니까? 황상께서 은혜를 베풀어 신첩에게 다른 길을 내려 주신다면, 신첩은 당연히 원할 것입니다.”
묵용린은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
“이 일은 짐이 그대의 부친과도 얘기해 봐야 할 것이오. 어쨌든 규율에는 어긋나는 일이니. 하지만 걱정하지 마시오. 짐이 어떻게든 잘 처리해서 중추가 지나는 대로 집에 돌아갈 수 있도록 출궁시켜주겠소. 또한 혼삿날이 정해지면 성아에게 혼수를 가득 준비해서 그대를 친왕부로 들이라 명할 것이오.”
송교는 감격스러운 마음에 눈물을 흘리곤 연신 머리를 찧어 가며 절했다.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던 묵용성은 초조하기만 했다. 결국 더는 참지 못하고 안으로 달려 들어갔는데, 들어가자마자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송교의 충혈된 눈과 벌게진 이마였다. 묵용린이 그녀를 난처하게 했다는 생각에 묵용성은 송교를 일으켜 세우고는 발을 동동 굴렀다.
“황형, 사람을 어찌 이리 몰아세우는 겁니까?”
묵용린이 어두워진 안색으로 말했다.
“누가 들어오라 하였느냐?”
묵용성은 손가락질을 하며 붉어진 눈으로 소리쳤다.
“황형은 황제가 아닙니까! 자신이 한 말에 책임을 져야지요!”
송교가 황급히 그를 끌어당겼다.
“이러지 마십시오, 전하. 황상께서 신첩을 몰아세우신 게 아닙니다.”
묵용성은 송교의 말을 믿지 않았다.
“하면 어째서 그리 이마를 박고 있던 것입니까?”
송교가 얼굴을 붉히며 나지막이 말했다.
“황상께서 신첩더러 출궁하여, 전하를… 기다리라고…….”
제 입으로 꺼내기엔 부끄러운 말이었다.
결국 옆에 있던 사희가 거들었다.
“전하, 곧 친왕비를 맞이하실 테니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묵용성은 두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감사 인사를 전하고자 황급히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한참이 지나도 일어나지 않는 탓에 송교도 다시 무릎을 꿇었다.
묵용린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이번에 혼인을 치르거든, 이제 돌볼 아내가 생기는 것이다. 그러니 다시는 예전처럼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거라.”
묵용성은 황형이 혹여 과거의 부끄러운 일을 언급할까 봐 서둘러 말머리를 돌렸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신제, 반드시 새로운 모습으로 변모하여 황형의 은혜에 헛되지 않게 살겠습니다.”
묵용린은 그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짐은 네게 정말 큰 은혜를 베푸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당할지언정 너희 두 사람을 엮어 주고 있으니 말이다.’
“되었다. 중추가 지나면 숙비를 출궁시킬 것이니, 며칠간 다른 이들에게 꼬투리를 잡히지 않도록 조용히 지내거라.”
그의 말은 두 사람을 일깨워 주었다. 오늘 밤, 숲속에서 허 귀비와 다른 이들에게 둘러싸였던 일 같은 건 두 번 다시 일어나선 안 되었다.
묵용성과 송교는 부끄러움에 얼굴이 새빨개졌고 차마 시선도 들지 못했다. 자신들이 황제에게 어떤 화를 불러왔는지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다른 건 몰라도 황제의 명성에 누를 끼치는 건 당연지사였다.
묵용린은 일이 해결되자 더는 두 사람과 함께 있고 싶지 않았기에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 그가 막 문턱을 넘자마자 사봉봉이 금천아를 데리고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의 모습에 사봉봉이 복잡한 감정이 뒤섞인 얼굴로 그를 불렀다.
“황상.”
묵용린은 얼굴을 굳힌 채 코웃음 치고는, 그대로 그녀 옆을 스쳐 지나갔다. 그는 아직도 화가 가라앉지 않았다. 사봉봉이 묵용성에게 토끼 인형을 준 게 아니었다 해도, 자신이 선물한 것을 어찌 마음대로 남에게 줄 수 있단 말인가? 그로서는 정말 화나는 일이었다.
* * *
묵용청양은 가소타를 데리고 거리를 구경했다. 가소타가 마음에 드는 걸 손가락으로 가리키면 묵용청양이 곧장 사 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가소타는 다 들 수도 없을 만큼 많은 물건을 갖게 되었다.
가소타가 아직도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사고 싶은 걸 찾자, 묵용청양이 말했다.
“다 들지도 못하는데, 그래도 더 사고 싶어?”
가소타가 말했다.
“알겠어요, 그만 살게요. 이제 어서 아까 말했던 곳으로 가요. 계속 돌아다니는 것도 좀 힘드네요.”
힘들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오는 길에 꽃등 구경을 하며 사람들 틈에 끼어 온통 땀이 날 지경이었다. 물건을 사는 건 거의 싸움이나 마찬가지였다. 다행히 두 사람 다 무술을 수련하였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정말 온몸이 다 아팠을 것이다.
거리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거니는 것도 힘들 지경이었다. 묵용청양이 영십구만 데리고 나왔어도 그에게 길을 트라고 하는 건데, 지금은 혼자 알아서 가야 했다. 그들은 빠르게 걷다 느리게 걷기를 반복하며 겨우겨우 청이각에 도착했다.
오늘 밤엔 청이각도 유난히 떠들썩했다.
묵용청양은 입구로 바로 들어서지도 못하고, 사람들과 함께 바깥에 서 있어야 했다. 그녀가 발뒤꿈치를 들고, 까맣게 줄지어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더니 옆 사람에게 물었다.
“실례지만, 입구에 사람이 왜 이렇게 많은 것이오?”
그 사람은 신기하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가씨도 안에 들어가서 곡조를 들으러 왔소?”
가소타는 그제야 자신이 묵용청양을 보호하는 신분이라는 게 떠올랐다. 낯선 사내가 묵용청양에게 말을 걸자, 그녀가 경계심 가득한 표정으로 흉포하게 말했다.
“우리는 오면 안 된다는 겁니까?”
가소타는 워낙 복스러운 얼굴이라, 아무리 흉포한 표정을 짓는다고 해도 위협적이지 못했기에 오히려 웃음만 샀다.
그자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당연히 되고말고. 다만 순서가 돼야 들어갈 수 있을 거요. 봤소? 다들 자리를 기다리는 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