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62화
대체 웃어야 한단 말인가, 울어야 한단 말인가.
잠깐 사이에 그의 머릿속에선 온갖 생각이 뒤엉켰다. 연회가 아직 끝나지 않았건만, 사봉봉에게 선물한 토끼 인형이 어찌 묵용성 손에 있단 말인가? 설마 묵용성과 숙비가 숲에서 소란을 일으켰던 게 그저 속임수였단 말인가? 묵용성과 사봉봉이 그의 코앞에서 사통하고 있던 것인가…….
황제가 어두운 안색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다들 무슨 영문인지 몰라 눈치만 보았다.
사봉봉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묵용린에게 다가가 어찌 된 일인지 설명하려고 발걸음을 내디디려는 순간, 우두커니 서 있던 황제는 별안간 자리를 떴다.
묵용성은 황형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상황이 이상하게 굴러가자, 이렇게 결정적인 때에 실수를 해선 안 된다는 생각에 그는 서둘러 황제의 뒤를 쫓았다. 그리고 조용히 애원했다.
“황형, 신제가 무얼 잘못했습니까? 신제에게 알려 주십시오. 신제가 고치…….”
모두가 보는 앞에서 화를 내지 않았던 건 사봉봉의 체면을 봐서였다. 하지만 묵용성에게는 그리 좋게 마음을 써 줄 필요가 없었기에 묵용린은 곧장 그를 걷어차며 소리쳤다.
“오늘 이 일을 짐에게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면 맞아 죽을 줄 알거라!”
묵용성은 영문을 알지 못했기에 자리에서 황급히 일어났다.
“황형,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혹, 숙비 때문에…….”
숙비를 언급하자, 때마침 숙비가 도착했다. 어느 길로 쫓아온 것인지, 그녀는 황제 앞에 곧장 무릎을 꿇었다.
“황상, 부디 노여움 푸시옵소서. 그 토끼 인형은 황후 마마께서 신첩에게 주신 건데, 신첩이 성 전하께 드렸습니다.”
그녀는 한 문장으로 전후 사정을 똑똑히 설명했다.
묵용성도 그제야 자신이 왜 걷어차인 것인지 알아차리곤 가슴을 쥐며 한숨 돌렸다.
“그게 황수의 것이었군요. 어쩐지 황형께서…….”
묵용린이 눈을 부릅뜨자, 묵용성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투덜거렸다.
“황형, 그만 일어나라고 하십시오.”
묵용린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은 탓이었다. 그가 숙비에게 물었다.
“황후가 어째서 토끼 인형을 숙비에게 주었단 말이오?”
숙비가 솔직히 털어놓았다.
“신첩, 평소 바깥을 잘 나오지 않아 황후 마마께서 신첩을 오늘 처음 보셨습니다. 하여 가지고 계시던 인형을 처음 만난 선물로 신첩에게 주셨지요. 신첩 또한 사희 공공이 그것을 황후 마마께 드리는 걸 보았기에 도리에 어긋난다고 생각하여 거절하였습니다. 하지만 마마께선 황상께서 마마께 주셨으니 마마의 것이라며…….”
그녀는 말끝을 흐리긴 했지만, 묵용린은 무슨 의미인지 전부 알아들었다. 분명 사봉봉이 일을 처리하는 방식과 흡사했다. 그는 잠시 침묵을 삼키곤 두 사람에게 말했다.
“일어나시오. 두 사람 다 짐을 따라오시오.”
신하들 눈에 묵용성은 여전히 어린아이였다. 그가 황제에게 맞고 꾸지람을 듣는 건 이미 흔한 일이었다. 멀리서 지켜보던 신하들은 그저 성 전하께서 또 뭔가를 잘못했다고 생각하며 이번엔 무슨 일인지 구경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갑자기 나타난 낯선 여인에 대해서도 그저 성 전하와 정분 때문에 갈등을 빚는다고 치부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우상은 단번에 자신의 딸을 알아보았다. 남서방에서 황제를 알현한 게 한두 번이 아닌데, 그는 황제가 숙비를 언급하는 걸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황제가 언급하지 않으니 그 또한 묻지 않았지만 딸아이가 늘 마음에 걸렸다.
연회가 열리는 김에 딸을 찾아가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건만, 만나기도 전에 황제가 딸아이와 성 전하를 함께 데려갔다. 그는 영문을 알지 못했지만, 좌상이 음흉하게 웃는 모습을 보니 자꾸만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친수대에서는 가무가 한창이었다. 이번 중추 연회를 위해 새롭게 선보이는 춤과 곡조로, 황금빛 가을 들녘에 벼 향이 풍기고 과실이 풍년인 떠들썩한 풍경을 표현한 것이었다.
은은하면서도 경쾌한 곡조를 따라 무희들이 맨발로 친수대를 사뿐사뿐 날아올랐다. 그들이 발을 들 때마다 알알이 맺힌 물방울이 튀어 오르며 투명하게 반짝였다. 면사처럼 얇은 무희들의 무의가 바람에 흩날리며 관객들의 시선을 끌었다.
사람들은 무희들의 손짓과 발짓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유일하게 양 수의만 눈을 감고 새로운 곡조를 감상했다. 그녀의 손가락이 무릎 위에서 장단을 맞추는 모습이, 퍽 심취한 듯했다.
장 수의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자꾸만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황상께서 왜 자리를 뜨셨을까요? 그러고 보니 오늘 숙비도 왔다던데, 왜 안 보이죠? 아이참, 형님, 그리 눈을 감고 무얼 하시는 거예요. 저 가느다란 허리 좀 보세요. 저런 몸으로 연습하려면 정말 힘들다던데…….”
한참 동안 재잘대도 아무 반응이 없자, 그녀는 양 수의를 가볍게 찔렀다.
“형님, 어찌 아무 말씀도 없으세요?”
양 수의는 눈을 뜨고 여운이 남은 표정으로 말했다.
“좋은 곡이긴 한데 중간에 반전이 조금 매끄럽지 못합니다. 한번 들어 봐요. 이렇게 바꾸는 게 더 나을 겁니다.”
그녀는 말을 뱉자마자 금세 곡조를 흥얼거렸다. 장 수의가 얼떨떨한 얼굴로 바라보자, 그녀는 문득 실소가 터져 나왔다.
“되었어요. 어차피 들어도 모를 텐데.”
장 수의가 말했다.
“형님, 편곡까지 할 줄 아십니까?”
“어릴 때부터 이런 걸 배웠으니 당연히 할 수 있죠. 저더러 이 춤에 맞는 곡조를 지으라고 했다면 분명 이것보다 나았을 겁니다.”
장 수의가 입을 가리고 웃었다.
“평소에는 딱히 다투는 일도 없으면서, 악기와 음률을 논하는 일에는 한 치의 양보도 허락하지 않으시는군요.”
양 수의도 웃음을 터뜨리더니 조금 서글픈 기색으로 말했다.
“만약 내가 사내의 몸이었다면 부친을 따라 태상사에 들어갔을 거예요.”
장 수의는 음률 따위에는 흥미를 느끼지 못했기에 고개를 돌려 태명호 쪽을 바라보았다.
“어머, 황상도 안 계시는데 누가 꽃배를 탔을까요?”
규율대로라면 매년 중추에는 황제가 가장 먼저 꽃배를 타야 했다. 그러고 난 뒤에 황제는 함께 탈 다른 이들을 불러 유람을 즐겼다. 황제의 은총을 과시할 좋은 기회인 만큼, 많은 이들이 손꼽아 기다리는 행사였다. 남녀 할 것 없이 배에 오르는 것을 큰 영광이라 여겼다. 하지만 황제는 조금 전 자리를 떴는데, 누가 사사로이 배를 탄단 말인가?
사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쉽게 알 수 있었다. 왕년에는 그만큼 대담한 사람이 없었지만, 올해는 있었다. 장공주 전하께서 돌아오셨고, 또 그분은 규율을 지키지 않기로 유명하지 않은가. 그래서 늘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하기 일쑤였다.
* * *
가소타가 꽃배를 빤히 바라보자, 묵용청양은 함께 타자는 의미로 손짓하며 호탕하게 배에 올랐다. 뒤이어 사금언까지 불렀다.
한밤중에 태명호를 유람하게 된 세 사람은 간식을 먹고 과실즙을 마시며 웃고 떠들었다.
호수의 바람은 촉촉했고 신선한 향이 풍겼다. 호수에서 뭍을 바라보면 꽃등으로 빽빽이 장식되어 있는 게 마치 비단을 깔아 놓은 듯했다. 반면 반대쪽은 음침한 것이, 꼭 귀신이 숨어 있을 것만 같았다.
세 사람은 담력이 엄청났기에 어두운 곳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깜짝 놀란 새들이 나무 사이로 날아가자, 셋 다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한 바퀴 돌고 나니, 묵용청양은 금세 흥미가 사라졌다. 이렇게 호수에서 배를 타는 건 그녀에겐 시시한 일이었다. 그녀가 선수에서 허풍을 떨기 시작했다.
“유람선은 강남에서 타야 제맛이지. 강을 오가는 꽃배가 셀 수도 없이 많거든. 전부 등을 걸어 놔서 멀리에서 보면 꼭 하늘에 별이 떠 있는 것 같을 정도야. 그중에서도 제일 재미있는 건 물살 구경인데, 물결이 밀려오면 꼭 천군만마가 달려오는 것처럼 장관이라니까.
게다가 아예 그걸로 공연하는 사람도 있어. 물속에서 온갖 공연을 하지. 물살을 타고 앞으로 오기도 하고 갑자기 아래로 내려가기도 하고, 또 물구나무를 서서 다리만 내놓고 춤을 추는 사람도 있다니까. 신기하지?”
가소타는 그렇게 큰 물결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더구나 그런 걸로 공연을 하는 사람이 있다니, 그녀는 신기함에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와, 그럼 물을 얼마나 많이 마셔야 한단 말이에요!”
사금언이 하찮다는 듯 그녀를 흘겼다.
“바보, 그걸로 밥벌이하는 사람이니 전문적으로 배웠을 텐데 무슨 물을 먹겠어. 그러다 숨 막혀 죽으려고?”
가소타가 지지 않고 받아쳤다.
“물속에서 공연을 한다잖아요. 숨을 그렇게 오랫동안 참을 수 있단 말이에요? 조금 마셨다가 나중에 토해 내면 되잖아요.”
사금언은 가소타가 식견도 좁고 어리석다고 생각했기에 더는 그녀와 입씨름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묵용청양에게 말했다.
“전하가 말씀해 주십시오. 그자들이 물을 먹겠습니까?”
묵용청양은 그들의 다툼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줄곧 생각에 잠겨 있었다. 밤이 이렇게 늦었는데도 영안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설마 청이각에 안월을 만나러 간 건 아니겠지? 궁에서 연회가 열리는데도 오지 않다니, 내일 황형한테 꼭 일러서 뼈도 못 추리게 해 주마.’
사금언은 그녀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궁에서 연회가 열리는데도 별로 재미가 없네요. 나가서 바깥 구경이나 하죠.”
가소타는 눈을 번뜩이며 곧장 맞장구를 쳤다.
“좋아요, 좋아요. 오늘 밤엔 통행 금지도 없잖아요. 오라버니가 그러는데, 바깥이 엄청 떠들썩하대요. 전 오라버니한테 나간다고 얘기만 하면 돼요.”
묵용청양이 고개를 저었다.
“네가 오라버니한테 얘기하면 네 오라버니는 그걸 황형한테 말할 텐데, 그럼 우린 다 못 나간다고.”
사금언이 곧장 끼어들었다.
“애도 아닌데 꼭 말해야겠어요? 전 제 누이한테 말하지 않을 겁니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고 있을 때 빨리 가죠.”
사금언의 말이 퍽 마음에 들었던 묵용청양은 노를 젓는 태감에게 서둘러 외진 뭍으로 배를 대라고 분부했다. 그렇게 세 사람은 쥐도 새도 모르게 어둠을 틈타 궁에서 슬쩍 빠져나갔다.
사금언은 평소 공주 전하와 어울려 노는 걸 가장 좋아했지만, 오늘은 중추인 만큼 사앵앵이 떠올랐다. 홀로 외롭게 있을 어머니 생각에 그의 발걸음은 자꾸만 느려졌다. 결국 그 자리에 멈춰 선 그가 아쉬운 목소리로 말했다.
“전하, 먼저 구경하고 계십시오. 저는 집에 가서 어머니를 좀 뵈어야겠습니다. 이따가 다시 찾아올게요.”
궁 밖으로 나온 묵용청양은 청이각에 가고 싶었다. 묵용청양이 말했다.
“알겠어. 청이각으로 오면 우릴 찾을 수 있을 거야. 만약 먼저 가게 되면 점원한테 말해 놓을 테니까 우리가 어디로 갔는지 물어봐.”
사금언이 말했다.
“네, 전하. 이따 봬요.”
그가 가소타에게 분부했다.
“먹고 마시는 거에 정신 팔리지 말고, 거리에 사람들이 많으니까 전하를 잘 보살펴 드려. 다른 이들이 전하께 부딪치는 일 없도록.”
가소타가 허리춤에 찬 비수를 툭툭 치며 패기 있게 말했다.
“그런 건 굳이 말 안 해도 돼요. 전 전하의 호위니까요.”
묵용청양은 넓적한 가소타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웃음을 참기 힘들었다. 그녀가 가소타의 볼을 꼬집으며 말했다.
“됐네요, 네 그 어설픈 솜씨로 어찌 호위하겠다는 거야. 만약 정말 사달이 나면 내가 널 지켜 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