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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1161)화 (1,161/1,192)

제1161화

묵용성은 분노에 차서 예도 갖추지 않고 말했다.

“허 귀비, 대체 이리 많은 이들을 데려와 뭐 하자는 거요? 숙비 마마께서 놀라지 않았소!”

허 귀비는 송교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처음 입궁했을 때만 해도 그녀는 숙비 역시 가상의 적이라 여기고 사력을 다하려 했었다. 그러나 숙비는 언제나 쥐 죽은 듯 조용히 지냈기에, 그녀와 단 한 차례도 제대로 겨뤄 본 적이 없었다. 그렇게 시일이 흘러 허 귀비의 기억에서 숙비는 완전히 사라졌다. 그런데 숙비를 오늘 여기서 이리 만날 줄이야.

그녀는 속으로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봉황을 잡으러 왔다가 결국 참새를 잡는 꼴이었지만, 우상은 부친의 정적이었다. 숙비는 진작에 제거해야 할 대상이었으니, 깜짝 선물이라고 생각하면 되었다. 지금도 밖에서 연회를 즐기고 있는 우상의 체면이 과연 어디까지 떨어지려나?

그녀가 냉소를 지었다.

“본궁은 누구인가 했는데, 숙비였군요. 그런데 숙비, 성 전하와 이리 어두운 밤에 숲에 숨어 무얼 하는 겁니까?”

“본 전하가 숙비와 이야기를 나누는 게 귀비에게 무슨 방해라도 되었단 말이오?”

허 귀비는 기가 막혀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정녕 온종일 방탕한 생각만 하느라 규율은 깡그리 잊은 것이란 말인가? 이곳에서 숙비와 몰래 정을 통했다는 걸 저리 당당하게 말하다니.

“본궁에게 방해가 된 건 아니지만, 황상께 해가 될까 염려스럽군요.”

허 귀비가 금령에게 눈짓을 보냈다.

“가서 황상을 모셔 오너라.”

송교는 그녀의 말에 안색이 하얗게 질려서는 묵용성의 손을 뿌리치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녀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공자, 어서 가십시오. 여기 일은 본궁이 알아서 하겠습니다.”

묵용성은 그녀의 말에 가슴이 미친 듯 두근거렸다. 줄곧 송교를 연약한 여인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막상 난관에 부딪히니 그녀는 그를 먼저 지켜 주려 했다. 하지만 그는 위풍당당한 성 친왕이다. 황제 다음으로 존귀한 그가 어찌 여인 뒤에 숨을 수 있단 말인가?

그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가 가면 정말 난처해질 겁니다. 겁내지 마십시오. 황상께서 오신다면 더 잘되었군요. 황상께 당신을 제게 달라고 청하겠습니다.”

송교는 부끄러움에 성을 냈다.

“지금 때가 어느 때인데 아직도 그런 엉뚱한 소릴 하시는 겁니까.”

묵용성은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 일부러 목청을 높였다.

“천하의 모든 이가 황상을 두려워해도, 난 아닙니다. 올 테면 오라지요.”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래, 여기 왔다.”

묵용성은 몸을 흠칫 떨었다. 술마저 조금 깨는 기분이었지만, 그는 무의식적으로 송교를 자신의 뒤에 숨겼다.

허 귀비가 곧장 황제에게 고했다.

“황상, 신첩이 술을 많이 마신 듯하여 숲을 거닐고 있었습니다. 한데… 전하와, 숙비가, 둘이…….”

그녀가 말을 더듬거리니, 묵용린은 머릿속에 다양한 장면들이 그려졌다. 그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누구, 숙비?”

송교는 황제가 자신을 부르니, 계속 숨어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녀는 묵용성 옆으로 돌아 나와 황제에게 예를 갖췄다.

“신첩, 황상께 문안드립니다.”

묵용성은 신첩이라는 말에 가슴이 답답해졌고 표정도 구겨졌다. 그는 숙비를 또다시 자기 뒤로 끌어당겼다.

묵용린은 놀란 얼굴로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마침내 아우가 누구를 마음에 품었는지 알아차렸다. 이제 보니 숙비를 좋아하고 있던 것이다. 그는 뒷짐을 진 채 묵용성과 숙비 주위를 한 바퀴 돌고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두운 그의 안색에, 주변에 있던 이들은 가슴을 졸였다. 황제가 이 일을 어찌 처리할지 알 길이 없었다.

보나 마나 이번 일은 성 전하가 황제 앞에서 술주정을 부린 것이다. 그러나 황제는 하나뿐인 아우가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도록 신경 쓰는 만큼, 성 전하를 어찌 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숙비는… 결코 안심할 수 없었다. 황제를 두고 성 전하와 정을 나누다니, 이는 능지처참을 당할 일이었다.

허 귀비는 숙비의 처참한 말로를 확신했는지, 고소하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한참 뒤, 묵용린이 마침내 고개를 숙이더니 아우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말한 대로 하마. 네게 약조한 일을 번복하진 않을 것이다.”

말을 마친 그는 발걸음을 돌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나가자. 토끼 인형을 견주어 봐야지. 예전엔 네 인형이 가장 출중했다고 하니, 짐이 눈여겨볼 것이다.”

멍하니 듣고 있던 묵용성은 묵용린의 말을 완전히 다 이해하진 못했다. 뛸 듯이 기쁘긴 했지만, 그는 좀처럼 믿기지 않아서 가만히 넋을 잃고 서 있었다.

허 귀비도 믿을 수 없긴 마찬가지였다. 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이란 말인가, 바람피운 현장을 목격하고도 전혀 동요하지 않다니?

게다가 그 말은 또 무슨 뜻이란 말인가? 묵용성은 내버려 둔다고 해도, 저 천한 숙비에게는 목을 맬 수 있게 흰 천이라도 줘야 하는 게 아니던가? 어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내버려 둔단 말인가? 그녀는 묵용린을 점점 더 이해할 수 없었다.

송교도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황제가 분노할 거란 생각에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황제는 그녀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는 묵용성에게 밑도 끝도 없는 말을 몇 마디 뱉고는 자리를 떴다. 마치 그녀가 묵용성과 이곳에 숨어 이야기를 나누든 무얼 하든 전혀 개의치 않아 하는 모습이었다.

허 귀비는 속으로 이를 갈고는 아무 말 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황제가 신경도 쓰지 않는데, 그녀가 나선들 무슨 소용일까.

그녀가 떠나자 함께 따라왔던 이들도 우르르 흩어졌고, 숲은 고요함을 되찾았다.

송교도 이제야 묵용성의 신분을 알게 되었다. 황제 앞에서 그리 마음대로 굴 수 있는 사람이라면, 성 전하 말고 또 누가 있겠는가?

그녀는 묵용성의 평판을 들은 적이 있었다. 부귀한 왕야로 지내며 어릴 때부터 진왕야와 함께 기방을 들락거리는 영락없는 부잣집 공자라고.

하지만 그녀와 알게 된 이후로 그는 매일 시로 정을 전하면서 줄곧 궁에만 얌전히 머물렀다. 그녀는 그가 기방을 제집처럼 들락거리는 사람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기에, 소문은 믿을 게 못 된다고 생각했다.

“전하.”

그녀가 나지막이 그를 불렀다.

“황상께서 토끼 인형을 견주어 보자고 하셨습니다.”

묵용성은 그녀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그녀를 빤히 올려다보는 게, 마치 억울한 일을 겪은 어린아이 같았다.

“하지만… 토끼 인형을 준비하지 못한 것을요.”

그도 황형이 왜 갑자기 토끼 인형을 견주어 보자고 한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릴 때나 하던 놀이라 벌써 몇 년째 하지 않았는데, 왜 갑자기 그 얘길 꺼낸 걸까?

송교는 미처 깊게 생각하지 못하고, 그녀가 갖고 있던 토끼 인형을 건넸다.

“전하, 이거라도 가지고 가십시오. 분명 전하께서 이기실 겁니다.”

묵용성은 별 감흥이 없었으나, 송교가 건네니 무엇보다 소중했다. 게다가 그 인형은 확실히 뛰어난 솜씨로 만들어진 것이었기에 일등을 거머쥘 자신이 있었다. 그가 웃으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반드시 이길 테니 기대하십시오. 황형께 상을 내려 달라고 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그는 의미심장한 얼굴로 송교를 바라보았다.

연애에 있어서 그는 방탕아나 마찬가지였다. 기루에서 단련한 그의 눈빛을 송교가 어찌 다 받아 낼 수 있을까. 그녀는 화륵 붉어진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묵용성은 성큼성큼 숲 밖으로 향했다.

조금 전 소란에 은령은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분명 목숨을 바쳐 숙비 마마의 장례를 치러야겠다고 생각했었는데, 황상께선 마마의 행실을 전혀 문제 삼지 않으셨다. 실로 엄청난 재난이라고 여겼던 일이 이렇게 얼렁뚱땅 넘어간 것이다.

그녀는 송교를 부축하며 감탄했다.

“마마, 이렇게 큰 재난에 목숨을 건지셨으니, 분명 훗날 큰 복이 있을 겁니다.”

송교는 오히려 초연했다.

“본궁은 궁에서 혼자 살다 혼자 죽을 것이다. 그래 봤자 겨우 목숨 하나 아니더냐. 본궁은 입궁하던 날부터 이미 이런 거에 무뎌졌다.”

“마마께서 마음을 단단히 다잡으시는 건 좋은 일이긴 합니다.”

은령이 별안간 무엇인가 떠올랐는지 화들짝 놀라 입을 열었다.

“아이참, 마마, 큰일 났습니다. 성 전하께 드린 토끼 인형은 황상께서 황후 마마께 하사하신 게 아닙니까? 성 전하께서 그걸 갖고 가셨으니, 어찌합니까?”

송교는 그녀의 말에 가슴이 철렁였다.

“어서 가자.”

* * *

올해, 황제는 흥이 넘쳐서는 다 함께 토끼 인형을 견주어 보자고 제안했다. 황실 종친의 어린 자녀들은 이 놀이를 즐겨했기에 다들 곧장 환호성을 내지르며 좋아했다.

묵용린은 그들의 반응에 웃음으로 응수하며 자꾸만 사봉봉을 힐끔거렸다.

사봉봉은 그제야 그가 왜 자신에게 토끼 인형을 주었는지 깨닫고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미 인형을 송교에게 주었으니, 다시 가져올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그녀는 황제가 그녀를 보든 말든 모른 체하며 끝내 시선을 들지 않았다.

몇 차례나 눈길을 주어도 그녀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자 묵용린은 마음이 상했다. 많은 이가 지켜보고 있을 땐 그래도 그의 체면을 세워 줘야 하거늘.

그는 모두에게 토끼 인형을 꺼내 놓으라고 분부하고는, 감정을 할 수 있을 법한 대신들에게 심사를 맡겼다.

탁자 위로 토끼 인형들이 일렬로 가지런히 놓였다. 모양도, 재료도 가지각색이었다. 보석으로 만든 게 가장 많았기 때문에, 곳곳에서 등잔 불빛에 번득거렸다.

묵용린은 금세 사봉봉의 토끼 인형을 발견했다. 기쁜 마음에 그는 또다시 사봉봉을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여전히 그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보기 싫으면 말라지, 어쨌든 그는 황후에게 좋은 상을 줄 수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다.

그가 목청을 가다듬고 모른 척 물었다.

“경들이 보기엔 어떠한가? 결정을 내렸는가?”

대신들은 눈치가 무척 빨랐기에, 황상께서 상아로 만든 토끼 인형을 눈여겨본다는 걸 진작에 알아차렸다. 게다가 그게 성 전하가 가져온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기에 그들은 한데 모여 의논을 거친 뒤, 눈치껏 상아 토끼 인형을 가리키며 말했다.

“황상께 아룁니다. 신들이 의논한 결과, 이 인형이 가장 뛰어나다는 데 의견을 모았습니다. 상아의 색이 옥보다 아름다우며 토끼의 털빛 또한 가장 잘 표현하였습니다. 거기에 조각도 정교하고 모양도 독특한 것이, 과연 보기 드문 훌륭한 인형입니다!”

묵용린은 자신이 고대하던 상황이 펼쳐지자, 태연하게 물었다.

“이건 누구의 인형인가?”

사봉봉이 대꾸만 한다면 그는 곧장 그녀에게 좋은 상을 내릴 것이다.

그런데 사봉봉은 군중들 사이에 서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방금 사고를 친 그의 아우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기뻐하며 말했다.

“황형, 그건 신제의 토끼 인형입니다.”

묵용린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으락푸르락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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