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60화
송교는 황후가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해 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기에 감동이 밀려왔다.
“마마께서 이렇게 너그럽고 깨어 있는 분이란 걸 진작에 알았다면…….”
그녀는 입을 잘못 놀렸다는 생각에 황급히 말을 멈췄다. 그리고 민망해하며 웃었다.
사봉봉도 웃음을 터뜨렸다.
“분명 소문에는 본궁이 친해지기 어려운 사람이라 했겠지요. 해서 숙비도 본궁을 그리 너그럽지 않은 사람이라고 여겼을 테고요.”
“아닙니다.”
송교가 서둘러 해명했다.
“신첩도 마마께서 입궁 전에 크게 장사를 하셨다는 것, 잘 압니다. 하여 마마께선 식견이 넓고 능력 또한 뛰어나시겠지요. 여인의 몸이긴 하나, 수많은 사내들보다 훨씬 뛰어나실 겁니다. 하나 신첩은 어려서부터 규방에서만 자라서 성격이 너무 나약합니다. 시를 읊고 짓는 것이나 좋아하니, 마마께서 신첩을 마음에 들어 하시지 않을 줄 알았습니다.”
“본궁은 아주 마음에 드는 걸요.”
사봉봉은 장사를 하며 무수히 많은 사람을 만나 왔기에 사람을 볼 줄 아는 안목이 있었다. 송교는 비록 숙비지만, 묵용린의 첩 중에서 심성은 가장 단순했다. 만약 후궁에 마찰이 생긴다면 분명 숙비가 가장 먼저 희생될 것이다. 그래도 다행히 그녀는 그리 우둔하진 않았다. 만약 오늘이 중추 연회가 아니었다면 그녀는 여전히 얼굴을 비치지 않았을 터.
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다 계화림으로 들어섰다. 저녁이 깊어갈수록 계화 향은 더 짙어졌다. 가슴에 스며드는 들숨은 온통 달콤하고 향기로운 계화 향으로 가득했다.
사봉봉은 토끼 인형을 송교의 손에 찔러주며 말했다.
“이렇게 처음 만났으니, 본궁이 한번 남의 것으로 인심을 써 봐야겠습니다. 이 토끼 인형을 숙비에게 드릴게요.”
송교는 사희가 사봉봉에게 토끼 인형을 주는 걸 다 지켜봤기 때문에 단칼에 거절했다.
“그건 아니 됩니다, 마마. 이건 황상께서 마마께 드린 것입니다.”
“황상께서 본궁에게 하사하셨으니 이는 이제 본궁 것입니다. 본궁이 숙비에게 주는 게 뭐 어떻습니까?”
사봉봉은 더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강제로 그녀의 손에 인형을 쥐여 주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괜찮으니까요. 황상께서 이런 일로 따지시진 않을 겁니다.”
송교는 사봉봉과 알게 된 시간이 길진 않았음에도 그녀에 대한 인상이 너무 좋았기에, 그녀의 마음을 무시할 수 없었다. 결국 송교는 토끼 인형을 받아 들었다.
그때, 한 궁녀가 분주히 다가와 사봉봉의 귓가에 몇 마디 말을 늘어놓더니 또다시 분주히 자리를 떴다. 사봉봉은 미간만 살짝 찌푸릴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분명 무슨 일이 있는 듯했다.
송교가 말했다.
“마마, 볼일이 있으시거든 어서 가 보십시오. 신첩은 여기서 잠시 더 있겠습니다.”
사봉봉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궁녀가 돌아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궁녀는 어두운 길로만 골라 갔는데, 몇 번 방향을 꺾더니 금세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방금 그 궁녀는 사봉봉에게 성 전하께서 황후 마마를 찾으시니, 전하와 편히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주변의 사람들을 모두 물려 달라고 전한 것이었다.
사봉봉은 그리 아둔한 사람이 아니었다. 저 궁녀는 서둘러 돌아가면서 그녀에게 얼굴조차 제대로 비치지 않았다. 게다가 묵용성이 그녀를 찾는다 한들, 어찌 꼭 지금이어야 한단 말인가? 남들에게 괜히 시답잖은 말이나 들으려고?
그녀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본궁은 아직 이 계화림을 둘러보지 못했습니다. 본궁과 함께 숲을 거닐며 경치나 구경하는 게 어떠신지요?”
그렇지 않아도 송교 역시 바라던 바였다. 그녀는 시끌벅적한 연회장으로 돌아가 남들과 교류하고 싶지 않았기에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우아하게 손짓했다.
“마마, 그럼 이쪽으로 드시지요.”
계화림 안쪽은 몇 리 간격으로 채색된 등을 세워 두었다. 등은 아주 예뻤지만, 불빛이 그리 밝진 않았다. 나뭇가지 끝에 달린 금빛 찬란한 꽃송이가 비치니 발아래 오솔길이 더욱더 심원해 보였다. 들이쉬는 숨결엔 짙은 꽃향기가 배어 있었고, 살짝 고개를 들면 휘영청 밝은 달이 보였다. 말로는 형용할 수 없을 만큼 가슴이 탁 트이는 풍경이었다.
아름다운 경치를 두 눈에 담으며, 사봉봉과 송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방향도 제대로 알지 못했기에, 비탈길을 따라 한참을 걷던 중 자신들이 계화오를 돌아 나왔다는 걸 깨달았다. 숲을 벗어나자 곧장 시끌시끌한 소리가 들려왔다.
사봉봉이 말했다.
“숙비, 우리도 그만 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송교는 알겠다고 대답하고는 막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은령이 별안간 그녀에게 물었다.
“마마, 귀걸이가 없어졌습니다.”
송교는 귓가를 만져 보았다. 역시나, 오른쪽 귀에 걸었던 귀걸이가 사라져 있었다. 그녀가 화들짝 놀라 말했다.
“숲에 떨어뜨린 모양이구나. 마마, 먼저 가십시오. 신첩은 잠시 찾아 봐야겠습니다.”
사봉봉이 말했다.
“어차피 어두워서 보이지도 않을 텐데, 내일 사람을 보내 찾아 보시지요.”
송교가 웃으며 말했다.
“마마, 신첩은 시력이 좋아서 칠흑같이 어두운 곳에서도 잘 볼 수 있습니다. 하니 신첩, 가서 찾아 보겠습니다.”
그녀가 고집을 꺾지 않자 사봉봉도 더는 강요하지 않았다. 사봉봉은 은령에게 몇 마디 당부를 내린 뒤, 금천아를 데리고 자리를 떴다.
송교는 왔던 길을 은령과 되돌아갔다. 은령이 웃으며 말했다.
“마마, 소인이 모를 줄 아십니까? 일부러 귀걸이를 떨어뜨리신 것이지요? 다시 연회장으로 돌아가기 싫어서 말입니다.”
송교는 피식 웃었지만, 인정하진 않았다.
“이건 필시 하늘의 뜻이다. 만약 본궁도 황후 마마처럼 말을 잘했다면 돌아갔을 게다. 하지만 방금 연회 음식을 먹을 때 너도 봤잖느냐. 다 함께 있는 자리에서 남의 흉을 보고, 또 누군지 모르는데도 맞장구를 쳐야 한다니.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야.”
은령은 주인의 순진함이 심히 걱정스러웠다.
“마마, 궁에서는 혼자 살아갈 수 없습니다. 어떻게든 적응해야 한다고요. 우리가 나쁜 마음을 먹고 남을 해치지만 않으면 그걸로 된 겁니다. 이러다 시일이 길어지면 황상께서 정말 마마를 까마득히 잊어버리실 수도 있습니다.”
송교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게 바로 본궁이 바라던 바다.”
주인과 종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가는데, 맞은편 나무 아래에 누군가 서 있었다. 마침 등이 가까이 있었기에 송교는 그자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순간 그녀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갑자기 숲속에서 사내를 만났지만, 송교는 겁나지 않았다. 그녀가 이미 알고 있는 사내였기 때문이었다. 반면, 은령은 곧장 앓는 소리를 냈다.
‘정말 원수가 따로 없구나. 얼마나 지났다고 또 이렇게 마주친단 말인가?’
묵용성은 과음을 한 탓에 정신이 오락가락했다. 조금 전 누군가 그를 찾아와 황후 마마께서 하실 말씀이 있다며, 계화림에서 기다리신다고 전했다. 가면 안 된다는 건 그도 잘 알고 있었다. 만약 황형이 알게 되면 그는 죽은 목숨이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가서 한번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그 역시 기방을 늘 들락거리는 사람으로서,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너무 잘 알았다. 황형에겐 그런 경험이 없고 봉봉은 줄곧 황형을 싫어하니, 그가 가운데에서 다리를 놓아야 했다. 어쨌든 그는 황형과 봉봉이 서로 정답게 지내길 바랐다. 그래야 그 또한 달갑게 물러날 것 아니던가.
그런데 숲속에 있다는 여인이 사봉봉이 아니라 송교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두 눈이 휘둥그레진 그는 꿈을 꾸는 듯 휘청거리며 걸어갔다.
“숙비 마마.”
송교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공자께선 본궁이 누구인지 아시는데, 본궁은 공자께서 누구인지 아직도 모르네요.”
묵용성은 가슴이 쓰라렸지만, 그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 이글거렸다.
“숙비 마마의 성함이 외자로 교皎라는 것, 압니다. 하늘의 달처럼 밝게 빛난다는 뜻이지요. 휘영청 밝은 빛이 가슴 속까지 비추어…….”
그가 말을 뱉으며 손으로 가슴을 힘껏 눌렀다. 정말로 무엇인가가 그의 가슴으로 들어온 듯했다. 흐리멍덩한 그의 눈빛은 꼭 몽유병을 앓는 사람 같았다.
은령은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덜컥 겁이 났다. 그녀가 송교의 손을 잡아끌며 말했다.
“마마, 어서 가시지요.”
하지만 송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은령은 시를 몰랐기에 과거, 저들이 시를 주고받던 게 그저 시로 벗을 구하는 것인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인가 시에 담긴 의미는 조금씩 변해갔고, 문장 사이사이에 말로 설명하기 힘든 감정이 섞이기 시작했다.
송교는 취기를 빌려 진심을 토로하는 묵용성의 모습에 마음이 복잡해졌다.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고 있자니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어찌해야 좋을지 몰랐다.
묵용성이 앞으로 다가와 송교의 손을 덥석 잡았다.
“한 가지만 물어보겠습니다. 만약 숙비의 자리를 원치 않는다면 제가 황상께, 황상께 청을…….”
그의 말에 은령뿐만 아니라 송교도 화들짝 놀랐다. 송교는 묵용성이 혹여 말썽을 일으킬까 겁이 나 황급히 그의 손을 뿌리쳤다.
“공자, 이러지 마십시오…….”
그녀가 손을 뿌리치자마자, 묵용성은 또다시 손을 잡더니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설마 제 마음을, 아직도 모르겠단 말입니까?”
송교는 침묵에 잠겼다. 아까 그를 만났을 때만 해도 그는 정신이 온전하여 제법 규율에 맞는 말을 늘어놓았지만, 술에 취하고 나니 진심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그녀로서는 정말 난감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그때, 숲 저편에서 소란스러운 발소리가 들려왔다. 가지와 나뭇잎 사이로 수많은 인영이 흔들리는 걸로 보아, 아주 많은 사람이 온 듯했다.
은령은 창백해진 얼굴로 송교를 끌어당기며 낮게 소리쳤다.
“마마, 어서 뛰십시오!”
송교도 놀라긴 마찬가지였기에 묵용성의 손을 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늘 비실거리며 살아온 지난날과는 달리, 지금은 별안간 세상을 이고 우뚝 선 사내처럼 행동했다. 그는 송교의 손을 놓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를 자신의 뒤에 숨겨 준 뒤, 갑작스레 찾아온 불청객들을 빤히 바라보았다.
엄청난 수의 불청객들은 누군가를 앞뒤로 에워쌌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화려하게 치장한 허 귀비가 그 주인공이었다. 그녀는 간통을 저지르는 이들을 잡기 위해 많은 이들을 데려왔다. 한데, 묵용성과 함께 있는 건 사봉봉이 아니라 웬 낯선 여인이었다.
그녀가 흠칫 놀라 물었다.
“전하, 저 여인은 누구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