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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1159)화 (1,159/1,192)

제1159화

묵용성은 곧장 그의 오해를 알아차리곤 서둘러 해명했다.

“황수를 본 게 아닙니다.”

“하면 누구를 보았단 말이냐?”

묵용성은 술을 과하게 마신 탓에 황형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너무 원망스러웠다. 그가 목을 꼿꼿이 세운 채 대꾸했다.

“어쨌든 황수는 아닙니다.”

묵용성에겐 전과가 있었기에 그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묵용린은 그 말을 절대 믿을 수 없었다. 묵용린은 의심스러운 아우의 행동거지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술 좀 마셨다고 정신 나간 척하지 말거라. 다들 지켜보는데 소란을 피우면 그게 웬 망신이란 말이냐. 만약 네가 황수에게 마음이 있다는 게 소문이라도 난다면, 어디서든 다 비웃음을 살 것이다. 하면 궁 밖에 있는 너의 홍연지기들이 널 높게 평가해 주겠느냐?”

묵용성이 성을 내며 말했다.

“황형, 어찌 신제를 그리 못 믿으십니까? 재차 말씀드리지만 황수는 아닙니다. 못 믿으시겠으면 신제, 맹세라도 하겠습니다.”

그는 곧장 오른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신제, 하늘에 대고 맹세하건대 아직도 황수를 생각한다면 온몸이 종기로 썩어 문드러져 제명에 죽지 못할 것이다.”

묵용성에게는 몹시 치명적인 맹세였다. 풍류를 즐기는 호방한 귀공자로서, 그는 의용儀容을 가장 중시했다. 머리카락이 헝클어지거나 옷에 주름이 잡히는 것도 이미 그에겐 큰일이었다. 그런 그가 이런 맹세를 하다니, 묵용린도 어느 정도는 믿을 수 있었다.

아우를 바라보던 그는 마음이 조금 움직였다.

“황후가 아니라면, 저쪽 여인들 중 마음에 든 자가 있는 것이냐? 하면 짐이 혼인을 명해 주겠다. 어찌 생각하느냐?”

사실 묵용성도 그에겐 하나뿐인 아우이기에, 그는 말로 표현하진 않았지만 내심 아우를 많이 아꼈다. 또 가끔 마음에 가책을 느끼기도 했다. 어쨌든 아우가 마음에 품었던 여인을 자신이 아내로 맞지 않았는가. 만약 묵용성에게 보상해 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옆에서 듣고 있던 사희는 속으로 끙끙 앓았다. 황상께서 술을 너무 많이 마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저쪽은 종친 귀녀들을 제외하면 다른 비빈들도 있는 자리였다. 만약 성 전하께서 비빈 중 누군가를 마음에 들어 한다면, 그래도 혼사를 이어 주겠단 말인가?

묵용성은 황제의 말에 마음이 동요했다. 숙비는 궁에서 거의 투명 인간처럼 지내 왔고 황형은 숙비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으니, 만약 황형이 자신을 도와줄 수 있다면…….

묵용린은 아우가 두 눈을 반짝이며 기대하는, 방금과는 전혀 달라진 모습에 속으로 놀라움을 삼켰다. 그 말인즉슨, 정말 저쪽에 묵용성이 마음에 들어 하는 여인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는 인내심을 갖고 아우가 솔직히 털어놓길 기다렸다.

하지만 묵용성은 술잔에 담긴 술만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번뜩이던 눈망울도 조금씩 그 빛을 잃더니 이내 그는 한숨을 내쉬곤 술을 들이켰다. 그렇게, 또다시 실의에 가득 찬 모습으로 변해 버렸다.

“왜?”

묵용린이 물었다.

“말하지 못하겠느냐?”

묵용성은 취기가 올라오긴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도리에 어긋난 것 같았다. 황형이 숙비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녀가 이미 황형에게 시집을 온 사람이라는 건 변치 않는 사실이었다. 되돌릴 여지가 전혀 없는 일이기에 더 고민해 봤자 어차피 헛수고였다.

묵용린은 잠시 기다려 보았지만, 끝내 대답을 듣지 못하자 안색을 굳혔다.

“역시 황후구나.”

“아닙니다.”

묵용성은 거의 소리치듯 말했다.

“신제가 맹세까지 하지 않았습니까. 어찌 그렇게나 신제를 믿지 못하시는 겁니까?”

“아니라면 왜 말을 못 하는 것이냐? 이 천하에 감히 짐도 어쩌지 못하는 아가씨가 있단 말이냐?”

묵용성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다 투덜거리듯 말했다.

“아가씨가 아닙니다.”

묵용린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가씨가 아니면, 사내란 말이냐? 너 설마…….”

순간, 묵용성은 화가 나서 규율도 잊고 황제에게 세 번이나 연달아 침을 튀겼다.

“황형,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씀입니까! 신제는 지극히 평범한 취향을 가지고 있단 말입니다.”

묵용린은 아우의 무례한 행동에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며 말했다.

“아, 아가씨가 아니라 부인인 게로구나. 이미 혼인한.”

그가 술잔을 가볍게 흔들며 말했다.

“그건 좀 쉽지 않겠구나. 만일 짐이 그 여인에게 부군과의 이혼을 명한다면 틀림없이 오명을 얻게 될 테니, 일말의 빈틈도 없는 방법을 고안해야 할 것이야.”

사희는 속으로 생각했던 일이 정말로 일어나자, 온몸에 땀이 날 정도로 놀랐다. 황상께서, 술이 깬 뒤에 당신이 저리 황당한 말을 하셨다는 걸 알게 되면 어떤 기분일까? 자신의 아우를 위해 부녀자를 이혼시키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것이야말로 혼군이 아니던가?

묵용린은 아우의 고충을 이해하곤 더는 캐묻지 않았다. 어차피 나중엔 다 알게 될 터. 묵용성이 다른 이를 마음에 품은 것만으로도 그는 이미 수백 배는 더 기뻤다.

“알았다.”

그가 아우의 어깨를 토닥이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말하고 싶을 때가 되거든 그때 짐에게 말해 주려무나. 짐에게 아우는 너 하나뿐인데, 짐이 널 도와주지 않으면 누굴 돕겠느냐.”

말을 마친 그는 술잔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군신들과 함께 술을 마시기 위해 다른 탁자로 향했다. 마음속 근심을 없앴으니, 마땅히 축하주를 들어야 했다.

연회가 절반 정도 흐르자, 분위기는 더욱더 무르익었다. 다들 더는 앉아만 있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돌아다니며 친한 이들과 함께 술을 마셨다.

부녀자들이 있는 곳도 마찬가지로, 그들도 자리에서 일어나 등불 수수께끼를 풀거나 꽃배를 타기 위해 친수대로 향했다. 연배가 높고 좌담을 즐기는 이들은 한데 모여 시답잖은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사봉봉은 술을 두 잔 정도 마시곤 얼굴이 불그스레 달아올랐다. 손수건으로 입꼬리를 닦은 그녀는 가소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가소타를 찾아가고자 막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사희가 그녀에게 다가와 상아옥 같은 토끼 인형을 들고 웃으며 말했다.

“마마, 황상께서 이걸 마마께 전해 드리라 하셨습니다. 올해 토끼 인형 중에서 아마 이것이 가장 좋을 거라고 하셨습니다.”

사봉봉은 조금 뜻밖이었다. 황제가 자신이 한 말을 아직까지 기억하고 좋은 토끼 인형을 구해 주다니. 그녀가 웃으며 대꾸했다.

“황상께서도 참, 본궁이 아이도 아닌 것을. 어찌 아직도 이런 걸 가지고 논단 말인가.”

“그래도 황상의 마음이니, 받아 주시지요.”

사봉봉이 인형을 건네받으며 말했다.

“본궁 대신 황상께 감사 인사를 전해 주게.”

그녀는 토끼 인형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정말 예쁜 인형이었다. 정교한 짜임새는 말할 것도 없고, 상아도 상등 옥색을 띠어 토끼 털빛과 매우 흡사했다. 눈에는 자그마한 붉은색 옥석을 박아 넣었고 두 귀는 곧게 서 있었다. 여기에 금박을 두른 옷을 입혔고, 말까지 타고 있었다.

식견이 넓은 그녀는 이 인형이 매우 뛰어난 것임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황제는 대체 어디에서 이런 걸 구했단 말인가?

그녀는 손가락으로 토끼 인형의 귀를 가볍게 매만지다 조금 우스운 생각이 들었다. 토끼 인형을 서로 견주며 우열을 가리는 건 어릴 때나 하던 일이었다.

그마저도 묵용청양이 남쪽으로 간 뒤에는 먼저 나서서 하는 사람이 없어, 하지 않았다. 이제 묵용청양도 성인이 되어 이런 일에는 진작 흥미를 잃었을 터.

하지만 이렇게 예쁜 토끼 인형이라면 소타는 분명 좋아할 것이다.

그녀는 토끼 인형을 들고 호숫가로 향했다. 막 몇 걸음 떼지 않았는데 어디에서 나타난 건지, 누군가 예를 갖추며 단아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황후 마마를 뵙습니다.”

사봉봉은 발걸음을 멈추고 그자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낯선 얼굴이었다. 얼굴이 예쁜 건 말할 것도 없었고, 우아한 기품에 천성적으로 남들의 호감을 사는 분위기를 풍기는 여인이었다.

순간적으로 그녀에게 호감이 생긴 사봉봉이 온화한 목소리로 물었다.

“누구신가요?”

옆에 있던 궁녀가 대신 대꾸했다.

“마마께 아룁니다. 숙비 마마이십니다.”

사봉봉은 입궁할 때 미리 계획을 세워 두었다. 묵용린의 첩들과 자발적으로 어울리지 않는 것. 그래서 그녀는 성가신 일을 사전에 차단하고자, 그들에게 아침 문안 인사도 오지 못하게 했다.

그녀도 처음엔 숙비가 있다는 걸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점점 많은 일이 닥쳤기 때문에 미처 숙비를 떠올릴 겨를이 없었다.

황제가 트집을 잡으며 그녀를 괴롭히던 일, 허 귀비의 음해, 후궁 정비와 북방의 가뭄, 그리고 황금 절도 사건에 사가 상호가 휘말려 냉궁으로 들어가야 했던 일까지……. 물론 숙비가 줄곧 사봉봉에게 얼굴을 비치지 않고 투명 인간처럼 지낸 탓도 있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흐르다 보니 사봉봉은 숙비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앞에 서 있는 여인이 숙비라는 말에, 사봉봉은 자신도 모르게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자가 숙비로구나!’

숙비에 대한 사봉봉의 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숙비는 지금껏 총애를 다투지도, 수작을 부리지도 않으면서 마치 세속에 연연하지 않는 은둔자처럼 살아왔기 때문이었다. 오늘 이렇게 보니, 그녀는 사봉봉이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훌륭했다.

그녀가 송교의 손을 잡으며 웃었다.

“숙비께선 정말 침착한 성격이시군요, 오늘에서야 얼굴을 보다니요.”

송교가 황급히 죄를 고했다.

“신첩의 잘못입니다. 신첩이 진작에 마마께 문안을 드렸어야 했는데 말입니다.”

사봉봉은 웃음을 터뜨리더니 숙비를 데리고 인적이 드문 곳으로 향했다. 어렵사리 만났으니 숙비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였다.

“괜한 생각 마세요. 본궁은 질책하려는 게 아닙니다. 본궁은 그저 숙비의 조용한 성격에 감탄한 것이에요. 만약 본궁이었다면 절대 그리하지 못했을 테니.”

송교가 입술을 오므리고 부끄러운 듯 미소를 지었다.

“신첩, 집에 있을 때도 늘 이런 성격이었습니다. 양친께서 부르지 않으신다면 수방에 틀어박혀 한 달 동안은 나오지 않을 수도 있었답니다. 하여 처음 입궁할 때 어머니께서 무척이나 걱정하셨지요. 이런 신첩의 성격을 황상께서 싫어하실 거라고 말입니다.

한데 막상 입궁하고 나니 황상과 마마께서도 조용한 걸 좋아하시더군요. 신첩에게 아침 문안도 면해 주시어 신첩, 더 게을러졌습니다. 이제 와서 돌이켜 보니 참 송구스럽습니다.”

사봉봉이 그녀의 손을 토닥이며 말했다.

“문안 인사는 불필요한 인사치레일 뿐입니다. 혹 답답해서 밖을 거닐고 싶을 땐 언제든 봉명궁으로 찾아오십시오.”

그녀가 숙비를 바라보더니 또다시 입을 열었다.

“물론, 계속해서 평소대로 지내면 됩니다. 본궁이 한 말 때문에 굳이 바꿀 필요는 없어요. 궁중에서 지내는 게 괴롭다는 건 본궁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규범을 벗어나는 것만 아니라면 숙비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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