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58화
바로 조금 전 그녀가 막 단장을 마친 무렵, 묵용린이 갑자기 찾아와서 아랫사람들을 다 내보내더니 그녀에게 또 무례하게 굴었다. 그녀는 너무 화가 나서 그를 때릴 뻔했다.
비록 부부 사이는 다정한 게 정상적인 거라고 하지만 그녀와 묵용린의 상황은 좀 특수했다. 두 사람이 혼인한 지 이미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 한 침상에서 잠을 잔 적이 없었다.
요즘 들어 어느 정도 익숙해진 건 사실이지만, 그녀의 마음속에서 아직 그 정도까지 익숙해진 건 아니었다. 그녀도 그와 친밀함을 나누는 걸 마다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도 좀 천천히 진행해야 하는 게 아닌가? 이렇게 만날 때마다 집적거리면, 그녀의 마음이 불편한 것은 둘째 치고 그가 곱게 보이지 않았다.
그녀를 따라가던 묵용린은 절망적이고 또 후회스럽기도 했다.
요 이틀 동안 사봉봉과 그 사이에는 냉기류가 흘렸다. 그도 무슨 연고인지 알고 있었다. 그런데 막 화장을 마친 그녀의 작고 예쁜 입술에 윤기가 도는 것을 보고 잠시 넋을 잃은 것이다. 자신이 언제 그녀의 곁으로 갔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방 안에 있던 아랫사람들도 그가 내보낸 게 아니었다. 아마도 상황이 심상치 않은 것을 보고 모두 알아서 피했겠지만, 사봉봉은 전부 그가 한 짓으로 여겼다.
그녀가 화난 눈초리로 쳐다보며 그를 힘껏 밀어 버리고 나서야 그는 정신을 차렸다.
멍하니 한쪽으로 밀려난 그는 화도 내지 않고 그저 심장이 쿵쾅거리는 걸 느끼며 생각했다.
‘아차, 왜 또 그녀를 화나게 했단 말인가?’
이제 곧 들어서게 될 떠들썩한 불빛을 바라보면서, 사봉봉은 그래도 인내심을 발휘해서 발걸음을 멈추고 묵용린을 기다렸다.
그 모습을 본 묵용린은 놀란 나머지 멍한 얼굴로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월규는 어린 부부의 행동이 그저 우습기만 했다. 그녀가 조용히 황제를 재촉했다.
“황후 마마께서 기다리시잖습니까. 황상, 어서 가 보십시오.”
신하들 앞에서 망신당할 준비를 하고 있던 묵용린은 월규의 말에 또다시 희망을 보았다. 그는 기쁜 마음으로 생각했다.
‘역시 짐의 황후는 큰 그림을 볼 줄 아는 사람이구나.’
그는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간절한 목소리로 사봉봉을 불렀다.
“황후.”
금천아는 고개를 숙이고 몰래 웃었다. 마마 앞에 오니 황상의 위엄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잘들 봐 두었겠지? 우리 마마께서 손 한번 까딱이면, 어린 황제에게 한 방 먹이기 충분하다니까.’
사봉봉은 묵용린이 무슨 의도로 그녀를 부르는지 잘 알고 있었다. 늘 묵용린이 위세를 부리는 것에 익숙했던 그녀는, 이런 그의 모습이 조금 가여워 보여서 마음이 불편했다. 어쨌든 그는 황제가 아니던가. 그의 체면을 아예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먼저 손을 내밀었다.
묵용린은 기쁜 마음에 곧장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래도 그는 지금은 이미 그녀에게 죄를 지은 몸이기에 차마 함부로 행동하진 못하고, 조심스레 사봉봉과 앞으로 걸어갔다.
연회장에 가까워지자, 모든 이들이 우르르 무릎을 꿇고 예를 갖췄다.
기분이 아주 좋았던 묵용린이 목청을 높여 외쳤다.
“오늘은 중추 연회니, 예절에 구애 받지 말고 모두 일어나게. 황후가 이번 연회 준비로 적잖이 고생하였는데, 다들 편하게 즐기지 못하면 황후의 호의를 헛되게 하는 것이 아닌가.”
황제와 황후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은 모든 이들이 아는 사실이었다. 처음에 두 사람이 앞뒤로 나란히 걸어 왔을 땐 그 사실에 더 힘이 실렸다. 하지만 나중엔 손을 맞잡은 것도 모자라 황제가 저런 말까지 했다. 대체 그들의 사이는 좋은 것인가, 나쁜 것인가? 모든 이들이 또다시 의심하기 시작했다.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 황후에게 감사를 표하는 인사치레를 건넸다.
좌상은 군중들 사이에 서서 허 귀비와 눈짓을 주고받았다. 허 귀비는 도도하고 냉담한 자태를 유지하며 아무 일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좌상은 시선을 약간 내리깐 채 소매 밑으로 손가락을 살짝 오므렸다.
그는 황제를 찾아가 인사를 건네는 대신, 다른 이들이 자리를 뜰 때까지 기다렸다. 그 후, 그는 등불 수수께끼를 푸는 척 천천히 조용한 곳으로 향했다.
잠시 뒤, 허 귀비가 찾아와 나지막이 그를 불렀다.
“아버지.”
좌상이 물었다.
“어떻게 된 것이냐?”
허 귀비는 그가 무얼 물어보는지 알고 있었기에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지금껏 본궁도 몰랐습니다. 사봉봉은 그저 온몸에서 돈 냄새만 나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알랑거리는 솜씨가 저리도 수준급이더군요. 냉궁에 들어갔다가도 다시 풀려나다니. 본궁이 사봉봉을 너무 얕봤습니다.”
좌상이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넌 황상의 눈에 든 여인이다. 입궁 전에 서로 감정도 쌓았건만, 어찌 일개 장사꾼도 이기지 못하는 거냐? 애당초 황상께서 사봉봉을 얼마나 싫어하셨는지 잘 알고 있지 않으냐. 이리 좋은 기회를 눈앞에 두고도 잡지 못하는 것도 모자라, 저 장사꾼에게 홀랑 넘겨주다니!”
허 귀비는 좌상의 꾸짖음에 얼굴이 새빨개졌지만,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그녀가 굴욕까지 겪어 가며 자발적으로 나섰음에도 황제를 붙잡지 못한 걸 좌상이 알게 될 바엔, 차라리 벽에 머리를 박고 죽는 게 더 나았다.
어두워진 딸의 안색을 바라보던 좌상은 그래도 귀비 마마라는 생각에 더 심하게 몰아세울 수 없었다. 그가 말투를 누그러뜨리며 말했다.
“황금 절도 사건도 황상께서 이리 질질 끄시니, 서둘러 판결을 내리지 않으면 독이 될 것이다.”
허 귀비가 이를 악물었다.
“아버지, 걱정하지 마십시오. 사봉봉이 잘되는 일은 절대 만들지 않을 테니.”
“그래.”
좌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되었다. 황상께 찾아가 얼굴이나 비치려무나. 황후 혼자 황상께 붙어 있게 두지 말고.”
하지만 그들의 생각과 달리 사봉봉은 전혀 그러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녀는 몇 마디 인사치레만 건네고 자리를 뜨고 싶었지만, 묵용린에게 손이 붙잡힌 탓에 그럴 수 없었다. 그녀는 묵용린을 빤히 바라보았으나, 그는 신하들과 이야기를 나누느라 그녀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신하들 앞에서 대화를 나누기 편치 않았기에 사봉봉은 몸을 살짝 틀어 조용히 말했다.
“황상, 신첩은 이만 가 보려 합니다.”
중추 연회에서는 남녀를 구별하기 때문에, 황후는 응당 부녀자들과 함께 있어야 했다. 묵용린도 잘 아는 사실이었지만, 모르는 척 조용히 그녀에게 되물었다.
“어딜 간단 말이오?”
사봉봉은 살짝 턱을 들어 올리며 저쪽에서 황후만 기다리고 있는 부녀자들을 가리켰다.
그녀가 명확히 뜻을 밝히자, 묵용린도 더는 모르는 체할 수 없었다. 다만 아쉬운 마음에 아주 느릿느릿 행동했다. 그는 한참이 지나서야 놀란 척 대꾸했다.
“아, 저쪽.”
사봉봉은 그가 손을 바로 놓아 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설마하니 자신도 함께 간다고 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짐이 데려다주겠소.”
사봉봉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저 몇 걸음만 가면 되는 것을요. 번거롭게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신첩 혼자 갈 수 있습니다.”
묵용린은 또다시 그녀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느리게 손을 놓았다.
사봉봉은 허리를 살짝 숙여 예를 갖춘 뒤, 긴 숨을 내쉬며 부녀자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향했다.
모든 이들이 황제와 황후가 속닥이는 모습을 바라보며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앞서 두 사람의 관계를 의심하던 이들도 이제는 상황을 모두 알아차렸다. 황제는 황후에게 잘해 주었고, 말도 나긋나긋하게 했다. 황후를 바라보는 눈빛 또한 다정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황후는 황제를 조금 성가셔하는 듯했다.
연회가 시작되고 황제와 황후가 각자의 자리에 앉았다. 황제는 종친 및 신하들과 함께했고 황후는 고명 부인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두 사람 다 아직 나이는 어렸지만, 어려서부터 단련해 온 탓에 규모가 큰 곳일수록 더 침착하게 행동했다.
이런 면에서 사봉봉은 과거의 백천범보다 훨씬 더 뛰어났다. 태후가 사봉봉 나이였을 때, 그녀는 아직 아이 티를 벗지 못했었다. 더구나 태상황은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안쓰러워하며 태후를 끔찍이 아끼기 바빴으니, 어찌 그녀 혼자 부녀자들을 상대할 수 있었을까. 결국 태상황은 늘 태후를 품에 둔 채 그녀가 갖춰야 할 번잡스러운 규율 따위는 철저히 무시했다.
사봉봉의 손을 잡고 난 묵용린은 기분이 좋았기에 술잔을 들고 신하들과 호탕하게 즐겼다. 그러나 왁자지껄한 불빛 안에서도 분위기와 걸맞지 않은 사람이 있게 마련인 법. 묵용린은 조용히 그자를 힐끔거렸다. 묵용성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는지, 연거푸 술만 들이켜며 더욱더 쓸쓸한 모습을 자아냈다.
묵용린이 사희에게 분부했다.
“성아에게 이리 오라고 전하거라. 짐이 몇 잔 같이 마셔야겠구나.”
사희는 서둘러 묵용성에게 자리를 청했다.
청승맞게 홀로 술을 마시던 성 전하는 스스로가 가련하게만 느껴졌다. 자고로 술은 담력을 키워 주는 법. 황제가 술을 청한다는 말에 그도 사양하지 않고 벌게진 얼굴로 휘청거리며 황제에게로 향했다.
묵용린은 태상황과 다르게 어릴 때부터 규율을 중시해 왔다. 그는 연회를 열 때마다 따로 작은 상을 차려 군신 간 유별을 강조했다. 그렇기에 지금처럼 아우와 마주 앉아 사적인 이야기를 나누어도 신하들이 들을까 염려할 필요는 없었다.
묵용성이 가까이 다가오자, 사희가 곧장 의자를 빼 주고 그릇과 젓가락을 가져다주었다.
묵용성은 전혀 사양하지 않고, 예도 갖추지 않은 채 그대로 의자에 털썩 걸터앉아 자신의 잔에 술을 가득 채웠다. 술을 들이켜려는데, 묵용린이 그를 제지했다. 묵용린은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말투는 그리 밝지 않았다.
“오늘은 또 어인 일이신지?”
묵용성은 황형을 바라보고 있자니 마음이 더 복잡해졌다. 우물쭈물 망설이던 그는 결국 긴 탄식만 내뱉고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묵용린은 그런 아우의 모습에 더 기이하기만 했다.
“대체 무슨 일이냐. 짐에게 말해 보거라.”
묵용성은 속으로 말했다.
‘그걸 어떻게 말한단 말입니까. 분명 전생에 신제가 황형께 빚을 져서, 이번 생에 황형께서 복수하시려는 게 틀림없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신제가 좋아하는 여인이 어찌 다 황형의 여인일 수 있단 말입니까?’
그는 고개를 돌려 부녀자들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지만, 병풍에 가려져 희미한 그림자만 볼 수 있었다. 송교의 얼굴을 떠올리니, 그는 가슴을 칼로 도려내는 듯 고통스러웠다.
묵용린은 아우가 부녀자들이 모여 있는 곳을 바라보니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그가 탁자 아래로 묵용성의 다리를 걷어차며 말했다.
“어딜 보는 것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