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55화
하지만 아랫사람들이 없다면 그녀도 더 이상 예의를 차릴 필요가 없었다. 그녀는 힘껏 묵용린을 밀어내며 말했다.
“황상, 이게 무슨 짓이십니까? 신첩의 옷이 다 구겨졌습니다.”
묵용린이 내려다보니, 그녀의 새하얀 침의는 얇고 부드러운 재질이라 그녀의 아름다운 자태와 우아한 몸매를 훤히 드러내고 있었다.
묵용린은 과거엔 여인의 얼굴만 보았다. 보기 좋고 나쁨은 모두 얼굴을 기준으로 삼았다. 그런데 지금은 얼굴보다 몸이 더 아름답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입맛을 다셨고, 얼굴에는 홍조가 피어올랐다.
사봉봉은 가슴이 철렁했다. 묵용린의 눈빛이 그날 밤처럼 괴상하게 번뜩였다. 마치 사람을 잡아먹으려는 것 같았다. 그녀는 경계심 가득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황상, 이렇게 늦은 시간에 무슨 일이십니까?”
“아무 일도 없소.”
묵용린은 마른침을 삼키며 힘겹게 그녀의 몸에서 시선을 떼고 침상 쪽으로 걸어갔다.
“짐은 자러 왔소.”
사봉봉은 머리털이 곤두섰다. 가장 두려워하던 일이 결국 벌어진 것이다. 순간적으로 그녀는 어쩔 줄 몰랐다.
“황상, 저 그게, 신첩, 신첩은 불편합니다.”
“어째서?”
묵용린은 그녀를 번쩍거리는 시선으로 직시했다.
“어째서 불편하다는 거요?”
사봉봉은 기지를 발휘했다.
“신첩, 좋은 날이 왔습니다.”
묵용린은 좋은 날이 왔다는 게 무슨 뜻인지 전혀 몰랐다. 그녀의 말을 듣고 그는 기분 좋게 말했다.
“확실히 좋은 날이지. 짐이 오늘 처음으로 황후의 처소에서 잠을 청하는 것이니 말이오.”
사봉봉은 울음을 터뜨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황상, 그게, 그럴 수 없습니다. 신첩, 몸이 불편하여…….”
묵용린은 그녀를 노려봤다.
“어디가 아프다는 말이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이를 악물고 있던 사봉봉은 명쾌하게 밝혔다.
“신첩, 달거리를 하는 중입니다.”
“…….”
그가 여인들이 하는 월경에 대해 알게 된 것은 모두 묵용청양 덕분이었다. 여인들은 월경이 오면 다들 부끄러워서 어쩔 줄 몰라 했고, 남들이 알까 봐 전전긍긍했다.
하지만 동월의 장공주는 유독 남달랐다. 그녀는 어선방에 명하여 보혈에 좋은 요리를 해 달라고 아우성을 쳤다.
그는 누이가 어디 다친 곳도 없는데 보혈에 좋은 요리를 찾자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때, 백천범이 그의 귓가에 몇 마디를 속삭여 주었다. 그러자 곧 부끄러움에 얼굴이 온통 새빨개진 그는 당장 그 자리에서 도망쳤었다.
황실의 입장에서 핏빛을 보는 건 불길함을 의미했지만, 묵용린은 체면을 다 내려놓고 온 마당에 그냥 돌아가기는 싫었다. 그는 가볍게 말했다.
“황후, 뭘 두려워하시오? 짐은 아직 완치되지 않아서 아무것도 할 수 없소.”
사봉봉은 그의 말을 듣고 오히려 얼굴이 더 빨개지며 말을 더듬었다.
“그렇지만, 그게…….”
묵용린은 침상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당초 황후는 짐의 병을 치료해 준다고 했고, 짐은 아직 깨끗하게 낫지 않았소. 그런데 황후가 중간에 그만두겠다는 건 자신이 한 말을 지키지 않겠다는 뜻이오?”
사봉봉은 가만히 서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황상의 은밀한 병을 꼭 신첩이 고쳐야 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고…….”
묵용린은 그녀의 말을 끊었다.
“황후, 억지 부리지 마시오. 짐의 말은 한번 내뱉으면 물릴 수 없는 금구옥언이고, 그건 황후도 마찬가지요. 만약 그렇지 않다면, 앞으로 짐이 어떻게 황후를 믿을 수 있겠소?”
그가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이리 오시오.”
사봉봉은 하는 수 없이 느릿느릿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묵용린이 그녀의 가느다란 손목을 잡아당기자 그녀는 넘어지듯 그의 품속에 앉았다.
그 자세는 너무 다정한 모습이라 그녀를 불안하게 했다. 시선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겠고, 들이쉬는 숨결엔 남자의 향기가 가득했다.
그녀는 얼굴을 붉힌 채 더듬거렸다.
“이왕 그렇다면, 신첩이 황상께서 일찍 쉬시도록 모시겠습니다.”
묵용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움직이지도 않았다. 사실 이건 너무 큰 도전이었다.
결국 그는 충격을 견디지 못했고, 병증이 또 도지고 말았다. 마치 끓는 물 한 솥이 가슴속에 있어서 그의 심장을 녹여 버리는 것처럼 매우 고통스러웠다.
그는 오직 사봉봉을 꽉 껴안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를 다 녹아 버린 가슴속에 꽉 채워 넣어야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봉봉은 그가 너무 꽉 껴안는 바람에 숨이 막혀 발버둥을 쳤다.
“황상, 신첩을 놓아 주십시오. 숨을 쉴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묵용린은 놓아 주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목소리조차 멀리서 들리는 것 같았다. 그가 이를 덜덜 떨며 말했다.
“움직이지 마시오. 짐이 더 괴롭소.”
사봉봉은 그가 온몸을 떨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치아가 서로 부딪쳐서 딱딱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의 병이 다시 도졌다는 걸 눈치 챈 그녀는 안쓰러운 마음에 주저하며 그를 마주 안아 주었고, 그의 등을 쓰다듬었다.
“황상, 좀 나아졌습니까? 신첩이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이 일은 너무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해야 한다고.”
그녀의 어깨에 머리를 얹고 거친 숨을 몰아쉬는 묵용린은 꽉 껴안은 팔에 조금도 힘을 풀 수 없었다.
사봉봉은 그가 괴로운 상태임을 충분히 이해했지만, 그녀도 너무 괴로웠던 탓에 다시 몸부림치며 그의 다리 위에서 바둥거렸다.
묵용린은 심장이 곧 터질 것만 같아 고함을 질렀다.
“움직이지 말라니까!”
사봉봉은 그 고함 소리에 놀라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 손을 그의 등 뒤에 얹으니, 옷이 이미 흠뻑 젖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시선을 든 그녀는 경악했다. 묵용린의 얼굴이 전에 없을 정도로 새빨개진 것이다. 그의 눈에서는 불꽃이 튀는 것만 같았다.
그 순간 그는 갑자기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고, 너무 힘을 주는 바람에 하마터면 그녀의 허리를 부러뜨릴 뻔했다.
사봉봉이 비명을 내지르려는데, 그의 떨림이 멈췄다.
그는 가만히 앉아 있다가 잠시 후에 천천히 손을 풀었다.
사봉봉은 얼른 일어나 의심스럽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는데, 묵용린의 얼굴은 아까보다 더 빨개져 있었다.
그는 한 마디 말도 하지 않고 일어나서 성큼성큼 걸어가 버렸다.
사봉봉은 영문도 모른 채 두어 걸음 뒤쫓아 가다가, 자신의 침의도 젖어 있는 것을 깨달았다. 아마 그의 땀에 젖은 것 같았다. 그녀는 경화와 경옥에게 물을 길어 와 씻을 준비를 하라고 명했다.
묵용린은 거의 뛰듯이 승덕전으로 돌아왔다. 후전에 있는 온천으로 곧바로 향한 그는 옷도 벗지 않은 채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돌처럼 물 밑까지 가라앉아서 한참 동안 물 밖으로 나오지 않는 그 때문에 왕장량과 사희 모두 놀랐다. 감히 큰 소리로 떠들지는 못했기에 그들은 목이 쉬어 버린 낮은 목소리로 계속 외쳤다.
“황상, 황상, 어서 나오십시오. 질식하면 어쩌려고 이러십니까……?”
묵용린은 정상적인 남자였다. 자연히 자신의 상태가 어떤지 잘 알고 있었지만, 뻔뻔스럽게 나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망신살이 뻗칠 줄은 상상도 못했다.
그는 사봉봉을 다시 볼 면목이 없었다.
* * *
봉명궁에서 도망치듯 나왔던 그는 사봉봉을 한동안 피해 다닐 생각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다음 날 그녀를 보자마자 그까짓 부끄러움은 먼 곳으로 날려 버리고 뻔뻔스럽게 나가는 자신에게 그는 혀를 찰 지경이었다.
사봉봉이 승덕전에 찾아온 건 중추 연회에 관한 일을 상의하기 위해서였다.
묵용린은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의자에 기대어 앉은 채 밝게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사봉봉이 끊임없이 말을 늘어놓았지만, 그는 제대로 듣지 않고 붉고 자그마한 입술이 뻐끔거리며 움직이는 것만 바라보았다.
한바탕 의견을 쏟아낸 사봉봉은 그가 한 마디 대답도 하지 않자, 할 수 없이 재차 물었다.
“황상의 의중은 어떠십니까?”
묵용린은 그녀가 하는 말을 전혀 듣지 않았으나, 어쨌든 그의 황후는 유능한 사람이니 무엇이든 잘할 것이다. 그는 다정하게 말했다.
“황후의 뜻에 따라서 처리하시오.”
사봉봉은 일어나 물러남을 고했다.
“신첩, 그럼 황상을 더는 방해하지 않겠습니다.”
“잠깐.”
묵용린이 손짓했다.
“이리 와 보시오.”
사봉봉은 어젯밤의 일에 대한 두려움이 아직 남아 있어서 그가 서재에서 또 그럴까 봐 경계하며 바라보았다.
“황상, 또 다른 분부가 있으십니까?”
묵용린은 손짓하며 새끼 고양이를 부르듯 빙그레 웃었다.
“와 보시오.”
사봉봉이 고개를 돌려 보았으나, 사희는 원숭이처럼 잽싸게 밖으로 도망쳤기에 순식간에 서재에는 그녀와 묵용린만 남아 있었다. 그녀는 더욱더 불안에 휩싸여 쉽사리 움직일 수 없었다.
그녀가 다가오지 않아도 묵용린은 화를 내지 않았다. 그는 기분 좋게 일어나 그녀의 손을 잡고 두어 번 쓰다듬으며 말했다.
“황후의 말이 맞소. 짐의 병은 천천히 치료해야 하오. 앞으로 황후가 신경 좀 써 주시오.”
그가 손만 잡자 사봉봉은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묵용린의 이글거리는 눈빛과 다정한 몸짓에 그녀는 왠지 모를 두려움으로 온몸이 떨렸다. 앞에 웬 구덩이가 있는데, 그가 자신을 끌어당겨 함께 뛰어들 것만 같았다.
“황상, 내일이면 중추절입니다. 신첩은 할 일이 많으니, 일단 중추절이 지나면…….”
“알았소.”
묵용린은 오늘처럼 성질을 죽였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짐은 굳이 지금 서두르지 않을 것이오. 기다릴 수 있소.”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는 그녀의 손을 놓지 않았다.
“…….”
무슨 까닭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하룻밤이 지난 후 묵용린은 다른 사람처럼 변했다. 어젯밤에 봉명궁에서 나갔을 때만 해도 아직 지존의 모습이 남아 있었는데, 오늘 보니 완전히 파렴치한이 돼 버렸다.
그 부부는 그렇게 잠시 손을 잡고 서 있었다. 한 사람의 표정은 태연자약한 게 약간 넋을 잃은 것 같았고, 다른 한 사람의 표정은 영문을 알 수 없어서 조금 불안해 보였다.
“아, 참.”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묵용린은 마침내 손을 놓고 작은 상자에서 금으로 세공한 깃털 모양의 머리 장식을 꺼냈다.
“짐이 며칠 전에 조판처에 갔는데, 이게 아주 마음에 들었소. 듣기에 요즘 유행하는 장신구라고 하오. 어떻소, 황후도 마음에 드시오?”
그의 말투는 지극히 평범했다. 부군이 자신의 아내에게 머리 장식을 선물하는 건 아주 일반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이런 일도 묵용린에게는 전혀 예사롭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