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54화
묵용청양은 환경문으로 들어가며 습관적으로 대청 안을 힐끔거렸다. 탁자 앞에 사람이 아무도 없자, 그녀는 판등에게 물었다.
“영안은?”
판등이 막 대답하려는데 그녀가 손을 내저었다.
“됐어. 어디에 있는지 알겠어.”
그녀는 다시 돌아서서 환경문을 나섰다.
판등은 그녀의 모습이 순식간에 문 입구로 사라지는 것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장공주 전하께서는 정말 총명하시다니까, 내가 입을 열지도 않았는데 안 형이 어디로 갔는지 알아차리다니.”
소제갈이 웃었다.
“총명하신 게 아니라 안 형을 너무 잘 아시는 거야.”
“하긴.”
판등이 말했다.
“두 분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함께 자라서 서로의 밑바닥까지 훤히 알고 있을 테니, 서로에게 너무 익숙하겠지.”
판등은 호기심 어린 말투로 말했다.
“아휴, 이러다 나중에 안 형이 부마가 되는 거 아니야?”
소제갈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웃었다.
“그건 알 수 없지. 두 사람은 서로에게 너무 익숙하니까.”
* * *
그와 너무 익숙한 장공주 전하는 청이각에서 영 부문주를 체포했다.
영안은 그녀를 바라보며 웃었다.
“이제 막 도착했는데 곧장 쫓아오다니, 날 따라다니는 게 그렇게 좋아?”
묵용청양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누가 너를 따라다니겠어? 어렸을 때는 네가 나를 쫓아다녔잖아!”
영안이 대답했다.
“어릴 적에도 네가 나를 따라다녔어. 내가 병들어서 집에 있을 때는 집에까지 찾아왔지.”
지금은 어릴 적 얘기를 꺼내고 싶지 않았던 묵용청양은 얼른 선제공격을 했다.
“너는 왜 또 여기에 왔어? 사건 수사는 안 할 거야?”
그녀가 조급해할수록 영안은 더욱더 느긋한 태도를 보였다.
“황상께서 말씀하셨어, 곧 중추절이니 사건은 잠시 내버려 두라고. 올해는 평화롭지 않았으니 중추절을 더 떠들썩하게 즐기라고. 사흘 동안은 야간 통행도 금하지 않을 거야. 사건은 중추절이 끝나면 다시 조사하기로 했어.”
묵용청양은 투덜거렸다.
“황형도 참! 발등에 불이 떨어졌는데, 놀 생각이나 하다니!”
영안이 물었다.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니? 황후 마마께서 냉궁에서 나오시지 않았어?”
“나오기는 하셨지.”
묵용청양은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사건이 해결되지 않으면 두 사람의 관계는 한 발자국도 더 나아갈 수 없어. 황형은 의심이 많은 사람이고, 그 의심은 가시처럼 마음에 박혀 있을 거야. 난 시간이 너무 지체되면 봉봉에 대한 황형의 선입견이 더욱 깊어질까 봐…….”
그때, 밖에서 가벼운 발자국 소리가 나자 묵용청양은 서둘러 입을 다물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새로 끓인 찻주전자를 들고 들어온 안월이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청양 소저께서 오셨네요.”
묵용청양이 말했다.
“그래요. 정무도 보지 않는 게으름뱅이 영 부문주를 잡으러 왔어요.”
생긋 웃는 안월의 눈빛이 영안을 살짝 스치고 지나갔고, 그녀의 얼굴에는 옅은 홍조가 일었다.
안월은 찻잔의 뚜껑을 열고 찻주전자를 들어 차를 따랐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물을 새하얀 잔에 따르니, 차향이 작은 공간에 가득 퍼져 나가서 가슴속까지 스며들었다.
차도 좋고, 차를 따르는 아가씨도 고왔다. 그녀의 부드러운 목소리는 듣는 이의 기분까지 편안하게 했다.
“전에 마침 좋은 찻잎을 얻어서 두 분을 위해 특별히 남겨 두었어요.”
묵용청양은 안월이 찻주전자를 쥐는 그 다소곳한 손 모양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소지가 살짝 들린 게 말할 나위 없이 아름다웠다. 어여쁜 아가씨가 차를 따르니 특별한 운치마저 느껴졌다. 묵용청양은 부러운 마음에 탁자 밑에서 그녀의 손 모양을 남몰래 흉내 냈다.
안월이 말했다.
“그럼 이야기 나누세요. 내려가서 다과를 좀 더 가져올게요.”
영안이 말했다.
“그런 일 하는 사람들은 따로 있으니, 그냥 여기 앉아 있어.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와야 하는데 귀찮지도 않아?”
안월은 교태스럽게 웃었다.
“공자께만…….”
잠깐 멈칫하던 그녀는 다시 말을 이었다.
“청양 소저께서도 오셨으니, 이렇게 해 드리고 싶습니다.”
말을 마친 그녀는 문을 열고 나갔다.
묵용청양은 천천히 계단을 내려가는 그녀의 발걸음 소리를 듣다가 비아냥거리며 물었다.
“하, 몇 걸음 걷는 것도 가슴이 아픈가 보지?”
영안은 아리송하게 웃으며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았다.
묵용청양은 가슴에 무거운 돌이 올려져 있는 것처럼 답답했고, 어떻게 해도 불편했다. 찻잔을 단번에 비운 그녀는 막 끓인 차가 얼마나 뜨거운지 잊었다. 찻물은 혀끝이 따가울 정도로 뜨거웠다.
“으악!”
찻물을 그대로 토해 낸 묵용청양은 두 손으로 입을 가린 채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영안은 깜짝 놀라 다가왔다.
“어디 봐! 차를 어떻게 마시는 거야! 입을 다치다니! 화상이라도 입은 거야?”
묵용청양이 어찌 그에게 보일 수 있겠는가? 지금은 어렸을 때와 달랐다. 영안 앞에서 추태를 부릴 때마다 그녀는 부끄럽고 수치스러웠다. 정말이지 그의 뒤통수를 내리쳐서 기절시키고 싶은 심정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과를 들고 들어온 안월이 다정하게 말을 건넸다.
“청양 소저, 이건 새로 만든 녹두떡이에요. 가을은 건조해지기 쉽고 상초열이 나기 쉬워요. 녹두떡은 열을 제거하는 데 최고죠.”
영안이 맞장구를 쳤다.
“뭘 해도 덜렁거리고 조심성이 없으니, 당연히 열을 식혀야지!”
묵용청양은 얼른 녹두떡 한 조각을 집어 입에 넣고 그를 노려봤다.
“네가 무슨 상관이야!”
영안은 눈썹을 치켜세우더니 묵용청양과 마찬가지로 녹두떡 한 조각을 입에 넣으며 말했다.
“넌 지금 내 수하이니 내가 상관하는 게 당연하지! 아니면 누가 상관하겠어?”
할 말이 없어서 맞받아치지 못한 묵용청양은 분개하며 한 마디 내뱉었다.
“못돼 처먹었어!”
안월은 그들의 언쟁을 웃으며 바라보다가 말했다.
“이틀만 지나면 중추절이네요. 새로운 연극을 할 예정이니 두 분께서도 꼭 와 주세요.”
묵용청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사흘 동안 휴목이니 할 일이 없어요. 연극을 보러 꼭 올게요.”
안월은 또 영안을 바라보았고, 영안은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안월의 초대인데, 꼭 와야지.”
눈살을 찌푸린 묵용청양은 이번엔 차를 천천히 불어서 식혔다. 잠시 후, 찻잔을 내려놓으며 그녀가 말했다.
“난 이만 갈게요.”
안월이 만류했다.
“청양 소저, 가지 마세요. 제가 노래를 불러 드릴게요.”
묵용청양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
“영안에게 불러 주세요.”
안월은 눈을 깜박거리더니 고개를 돌려 영안을 바라보았다.
“청양 소저가 화났나 봐요?”
영안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괜찮아. 원래 금방 화를 냈다가 금방 풀리니까.”
* * *
묵용청양이 환궁했을 땐 마침 식사 시간이었다.
그녀는 곧장 승덕전으로 향했다. 궁인들은 묵용린의 식사를 준비하는 중이었다. 사람은 많았지만, 궁전 안은 조용했다. 그녀가 아무 말 없이 앉자, 월규는 얼른 그녀에게 그릇과 젓가락을 챙겨 주며 웃었다.
“전하께서 황상과 함께 식사를 하시는 건 정말 오랜만이군요. 오늘은 어찌 그럴 마음이 생기셨습니까?”
묵용청양은 밥그릇으로 달려들었고, 그녀가 밥 먹는 소리는 예전과 다름없이 요란했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왠지 이상했다.
묵용린은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 있는 것이냐?”
묵용청양이 우물거리며 대답했다.
“아뇨.”
아니라고 해 놓고 그녀의 얼굴에는 시무룩한 기색이 역력했다.
묵용린은 문득 회의에 빠졌다. 그들 남매 셋이 어쩌다 이리되었을까? 하나같이 난관에 봉착했다. 묵용성은 의기소침했고, 묵용청양은 수심에 가득 찬 얼굴이었다. 거기에 그 자신은 말할 것도 없이 마음에 걱정이 가득해 한숨만 내쉬고 있었다.
그가 물었다.
“영안과 싸웠느냐?”
밥을 마구 퍼먹던 묵용청양은 잠시 주춤하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그 애랑 싸울 일이 뭐가 있겠어요.”
그녀의 대답에 묵용린은 자신이 단번에 알아맞혔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대체 이게 다 무슨 일이란 말인가. 그들은 천하에서 가장 존귀한 황제와 장공주가 아니던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가지고도 남을 존재이건만 남녀의 사랑이라는 문턱은 넘지 못했다. 그것만은 아무리 원해도 상대에게 닿을 수 없었다.
그는 누이에게 동병상련의 감정을 느꼈다.
“걱정하지 마라. 그 일은 짐에게 맡기거라. 고개만 끄덕이면 네가 원하는 바를 짐이 이루어 주마.”
묵용청양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잠시 얼떨떨한 표정을 짓던 그녀는 그의 말뜻을 알아차리곤 화를 내며 소리쳤다.
“황형! 함부로 나서지 말아요!”
묵용린은 콧방귀를 뀌며 냉소했다. 그는 황제였다. 아무리 나서도 지나치지 않았다. 오늘 저녁, 그는 봉명궁으로 갈 것이다.
* * *
사봉봉은 세수를 마치고 휴식을 취하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궁전 밖에서 고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제 폐하 납시오.”
그녀는 놀라서 침상에서 튕기듯 일어나, 신발을 질질 끌며 얼른 마중을 나갔다.
지난번에 봉명궁 앞에서 달구경을 하다가 돌아간 이후 묵용린은 다시 이곳을 찾지 않았고, 그녀도 평안한 며칠을 보냈다. 그런데 오늘 저녁에는 왜 갑자기 왔는지 알 수 없었다.
침전 문을 나서기도 전에 묵용린은 바로 문 앞까지 이르렀다. 사봉봉은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하마터면 묵용린과 부딪칠 뻔했다.
묵용린은 다가온 그녀를 자연스럽게 끌어안았다. 여러 날의 고뇌가 드디어 뜻을 이루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환희가 찾아왔다.
그는 그녀를 껴안은 손을 풀지 않았다. 비록 월규 앞에선 절대 황제의 체면을 상하게 할 수 없다고 부정했지만, 막상 이 여린 몸이 품 안으로 들어오니 가슴 깊숙한 곳이 떨릴 정도로 달아올랐다. 체면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를 끌어안는 것만이 중요했다.
사봉봉은 그가 만나자마자 이렇게 무례하게 구는 것이 부끄럽고 화가 났다. 그러나 아랫사람들 앞에서 소매를 걷어붙이고 황제와 싸우거나 고함을 지를 수는 없어서, 낮은 목소리로 애원했다.
“황상, 이러지 마십시오, 아랫사람들이 다 보고 있습니다.”
묵용린은 손을 풀지 않고 말했다.
“아랫사람이 어디 있소?”
사봉봉이 고개를 들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정말 그의 말대로였다. 다들 어디로 갔단 말인가? 조금 전까지도 앞뒤에 잔뜩 서 있던 아랫사람들이 눈 깜짝할 사이에 밖으로 도망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