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53화
월규의 거처에서 나온 그는 걱정에 휩싸인 채 승덕전을 둘러싼 백옥 울타리 앞에 서서 봉명궁을 바라보았다. 보고 또 보다가 그는 결국 자기도 모르게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중추절이 가까웠기에 하늘에 걸린 달은 옥쟁반처럼 크고 둥글었으며 맑은 빛을 흩뿌렸다.
달빛이 너무 아름다워 마음이 동한 걸까? 봄을 슬퍼하거나 가을을 아파한 적 없던 황제는 뒷짐을 지고 봉명궁 앞에 서서 달을 올려다보며 서글픈 표정을 지었다.
봉명궁 앞에서 문을 지키고 있던 소태감은 난처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다가가서 문안을 드려야 할지, 아니면 달구경에 여념이 없는 황제를 방해하지 말아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금천아는 그 소식을 듣고 내전으로 달려가 사봉봉에게 고하였다.
“마마, 황상께서 오셨어요.”
화장대 앞에 앉아 머리를 빗던 사봉봉은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황상께서 뭐 하러 오셨지……?”
금천아가 말했다.
“소인이 황상께서 왜 오셨는지 어찌 압니까? 마마, 그래도 얼른 나가 보셔야 하지 않겠어요?”
그건 맞는 말이었다. 사봉봉은 머리를 풀어 헤친 채 얼른 마중을 나갔다.
바깥에 나가 보니, 황제가 계단 밑에서 고개를 들고 달구경을 하고 있었다. 그는 봉명궁으로 들어올 의사가 없어 보였다.
그녀는 잠시 망설였지만 황제의 의도를 알 수 없기에 가만히 서 있었다.
금천아는 냉궁에서 황제와 황후가 화목하게 지내던 시절이 너무 그리웠기에, 전력을 다해 둘이 붙어 있게 만들었다. 사봉봉이 발걸음을 멈추자, 그녀는 다급한 마음에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마마, 어서 가 보세요. 황상께서 저기 계십니다.”
사봉봉이 어찌 금천아의 의중을 모르겠는가? 화가 나서 그녀를 노려본 사봉봉은 과한 것이 부족한 것만 못하다는 생각에 태도를 결정했다. 황제가 다가오지 않으면 자신은 주도적으로 다가가지 않겠다고.
계속 고개를 들고 달을 바라보던 묵용린은 목이 뻐근할 지경이었다. 커다란 옥쟁반같이 둥근 달에 사봉봉의 얼굴이 떠올랐는데, 그 얼굴은 그를 향해 해맑게 웃었다. 웃는 모습이 얼마나 보기 좋은지, 초롱초롱한 두 눈과 살짝 구부러진 입꼬리로 계속 예쁘게 웃는 통에 심장마저 떨릴 지경이었다.
그는 탐욕스럽게 그걸 바라보았다. 천하의 어떤 여인도 그의 황후와 비교할 수 없었다. 황후의 아름다움은 과장된 것이 아니라 함축적이고 단아한 것이었다. 그건 시간을 두고 천천히 느껴야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그것을 불과 며칠 만에 완전히 깨달았다.
황제라는 체면이 있기에, 그는 여태껏 누구에게 의지해서 살아 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반대로 온 천하가 그에게 의지해 살아간다. 기껏해야 여자가 뭐라고? 사봉봉이 아니더라도 그를 도와줄 여인은 많았다.
그러나 안 된다, 그녀가 아니면 안 된다. 기분이 내키지 않고, 마음 또한 뒤틀렸다. 이슬비처럼 모두에게 총애를 내리겠다는 건 어느새 빈말이 되었다. 그는 자신에게 강요할 수 없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렇게 되지 않았다.
달빛이 면사처럼 사방을 뒤덮었고, 달 속에 담긴 황후의 얼굴도 그 면사 너머로 아른거렸다.
문득 그가 마음이 통한 것처럼 시선을 옮기니, 어두컴컴한 가운데 사봉봉이 조금 떨어진 높은 단 위에서 나타났다.
복도의 등불은 별로 밝지 않았지만, 그는 분명하게 보았다. 가녀린 자태에 흑단같이 긴 머리카락을 물풀처럼 어깨에 늘어뜨린 그녀의 두 눈은 별이 내려앉은 것처럼 유난히 반짝였다.
그는 현실인지 환상인지 분간하지 못하고 그저 넋 놓아 그녀를 바라보았다.
사봉봉은 어둠 속에 서서 묵용린이 달만 구경하고 그대로 돌아가기를 마음속으로 바라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갑자기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볼 줄 누가 알았겠는가?
사실 그건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다가가서 문안 인사를 올리기만 하면 됐다.
그러나 그녀는 도무지 발걸음을 뗄 수 없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글거리는 그의 눈빛은 마치 그녀를 잡아먹으려는 것만 같아 너무 두려웠다. 지금껏 누군가를 이처럼 겁낸 적이 없었는데 지금은 정말 겁이 났다.
사봉봉뿐만 아니라, 금천아도 황제의 눈빛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고 솜털이 바싹 일어섰다. 아까는 목소리를 낮춰 황후를 재촉했지만, 지금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입도 뻥긋할 수 없었다.
사방이 쥐 죽은 듯 고요했고, 아랫사람들은 모두 눈을 내리깔았다.
묵용린은 넋을 놓고 그녀를 쳐다보았고, 사봉봉은 처음엔 망설이며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그걸 알아차린 황제의 시선에 한 줄기 분노가 느껴지자 그녀도 더는 피하지 않았다.
그렇게 두 사람은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를 사이에 두고, 하얀 달빛 아래에서 서로를 마주 봤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돌연 바람이 불어오더니 솨 소리와 함께 길가의 낙엽들을 쓸고 지나갔다.
묵용린은 문득 놀라 정신을 차리더니 다시 사봉봉을 두어 번 힐끔거린 후, 고개도 돌리지 않고 그대로 가 버렸다.
한참 콩닥거리던 심장이 마침내 안정을 찾은 사봉봉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봉명궁으로 돌아갔다.
금천아가 옆에서 중얼거렸다.
“황상께서 저렇게 마마를 바라보시는 이유가 뭐죠? 또 마마의 꼬투리를 잡으려는 건 아니겠죠?”
금천아는 황제와 황후의 금슬이 좋기를 바랐다. 하지만 황제는 예전에 사봉봉에 대한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고, 또 기회만 있으면 트집을 잡으려 했다. 그런 만큼, 지난 며칠 사이 황제와 황후의 사이가 뜨뜻미지근해 보이자 그녀는 또 슬며시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 * *
밤새 잠을 설친 묵용린은 이튿날 아침 일찍 일어나, 영십구를 데리고 작은 숲속에서 검술을 연마했다. 그 후 아침 식사를 하고 바로 조정에 나갔다.
요즈음은 황금 강도 사건을 제외하면 그나마 평화로운 편이어서 별로 중요한 일은 없었다. 몇 명의 노신들이 또 황금 강도 사건을 물고 늘어지며, 황제에게 빨리 사건을 종결하라고 재촉했다.
묵용린은 휑한 눈빛으로 어딘가를 멍하니 응시하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좀처럼 알 수 없었다.
단폐 아래로, 웅성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대전 안에 꿀벌 천 마리가 날아든 것처럼 소리가 웅웅 울렸다.
소란스러움을 참지 못한 그는 문무백관을 버려둔 채 단폐를 내려와 승덕전으로 가 버렸다.
승덕전에 이르러 계단을 올라가는데, 먼발치에 있는 봉명궁이 보였다. 그는 또 터져 나오는 한숨을 참지 못했다.
요즘 들어 그는 하루에 팔백 번은 사봉봉을 생각하는 것 같았다. 잘 때도, 먹을 때도, 심지어 조정에 나가서도 그녀를 생각했다. 시도 때도 없이 떠오르는 게, 사봉봉의 그림자가 머릿속에 들어와 있는 것만 같았다. 그 그림자를 도저히 쫓아낼 수 없어서 그는 너무 심란했다.
오후에 낮잠을 자고 일어난 그는 남서방에서 가난청과 함께 상주서를 살펴봤다. 하지만 상주서만 펼치면 그녀의 얼굴이 아른거려 그는 또 한참을 넋 놓고 있었다. 가난청이 몇 번이나 황제를 힐끔거리는데도 전혀 알아채지 못할 정도였다.
가난청은 무슨 연유인지 알고 있기에, 남몰래 속으로 놀라워했다. 그는 황제가 이렇게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감정에 빠질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이건 정말 괄목할 상황이었다.
그가 붓을 내려놓고 입을 열려고 하는데, 사희가 달려 들어오며 말했다.
“황상, 영 부문주께서 오셨습니다.”
묵용린은 다시 정신을 차리고 상주서를 접으며 말했다.
“들라 하라.”
말이 끝나기 무섭게 영안이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와 예를 갖췄다.
“황상.”
사희는 그들이 편안하게 대화할 수 있게 눈짓으로 아랫사람을 모두 내보냈다.
묵용린이 물었다.
“준비는 다 되었느냐?”
“모든 준비를 마쳤습니다.”
“몇 할 정도나 자신 있느냐?”
영안이 대답했다.
“육 할이옵니다.”
묵용린은 잠자코 있다가 입을 열었다.
“육 할이면 승산은 있다. 너의 일 처리라면 짐도 안심할 수 있으니 어서 가 보거라.”
영안이 예를 취하고 문밖으로 물러나자, 묵용린은 의자에 기대어 앉아 오랫동안 침묵을 지켰다.
가난청이 물었다.
“황상, 아직도 망설이십니까?”
황제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한탄을 쏟아 냈다.
“짐은 적어도 십 년이나 이십 년은 지나야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는데, 설마하니 이럴 줄은 생각지도 못했지…….”
가난청이 말했다.
“일찍 겪는 게 늦게 겪는 것보다 낫습니다. 비록 지금은 나무가 크고 뿌리도 깊고, 또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비틀어 뽑아내기가 조금 번거로울 뿐입니다. 하지만 십 년이나 이십 년이 지나 그 나무가 숲을 이룬 후에 제거하려면 나라의 근본을 건드리게 됩니다. 그때가 되면 황상께서 정말 골머리를 앓을 것입니다.”
해 질 무렵, 날이 어둑어둑해지자 아득한 황혼 속에 서 있던 묵용린은 까닭 없이 외로움을 느꼈다. 그는 외로운 황제였다. 고독과 함께 사는 것에는 이미 익숙했지만, 오늘은 왠지 이 허전한 슬픔을 달랠 길이 없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이란 말인가?
그는 사희에게 물었다.
“성아는 지금 궁중에 있느냐?”
“황상께 아룁니다. 황상의 윤허가 없으면 성 전하께서는 감히 출궁하지 못하십니다. 지금 무덕전에 계십니다.”
“성아를 불러오너라. 저녁 식사를 함께 먹어야겠다.”
“예, 황상. 소인이 바로 가서 모셔 오겠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묵용성이 왔다.
형제가 식탁에 마주 앉았지만, 그들은 한 상 가득 차려진 음식을 보고도 입맛이 돌지 않았다. 젓가락을 들면서, 약속이라도 한 듯 한숨을 동시에 내쉬었다.
묵용린은 자신의 아우를 바라보며 괜한 의심이 들었다.
“무슨 일이 있느냐?”
묵용성은 황형의 안색이 좋지 않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서 얼른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신제는 괜찮습니다.”
“아무 일도 없다면서 왜 이렇게 기운이 없는 것이냐?”
묵용린은 또 한 번 사봉봉이 떠오르자, 안색이 더 안 좋아졌다.
“아직도 엉뚱한 생각이나 하고 있느냐.”
“아니요, 아닙니다.”
묵용성이 제일 두려워하는 건 바로 황제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얼른 무릎을 꿇어 심지를 내보이려던 그는 묵용린의 손에 이끌려 제지당했다.
“됐다. 어서 밥이나 먹거라.”
묵용성은 더 이상 풀이 죽어 있지 않고, 정신을 차렸다. 또한 정성스럽게 황제에게 음식을 덜어서 올렸다. 황형의 안색이 여전히 안 좋은 걸 보니, 자신 때문에 화가 난 게 아니라는 걸 깨닫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황형, 무슨 일 있으십니까?”
묵용린은 자신의 속마음을 월규에게는 알려 줄 수도, 측근들에게 들킬 수도 있었다. 하지만 묵용성이 알게 할 수는 없었다. 말을 꺼내는 것도 안 된다. 그는 부끄러움이 분노로 뒤바뀌어 소리쳤다.
“짐에게 무슨 일이 있겠느냐? 이렇게 많은 음식도 너의 입을 막지 못 한다니! 밥이나 어서 먹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