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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1152)화 (1,152/1,192)

제1152화

그는 불같이 타오르는 분노를 삭일 수 없어서 소매 속에서 주먹을 꽉 쥐었다. 비록 얼굴 표정에는 아무런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의 온몸이 차갑게 가라앉으며 한기가 피어올랐다.

장 수의는 안마를 하면 할수록 손바닥에 맞닿은 어깨가 풀어지기는커녕 점점 더 굳어지는 걸 느꼈다. 뭔가 좋지 않은 예감에 그녀는 두려운 마음에 도움을 청하듯 사봉봉을 바라보았다.

사봉봉은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챘다. 그녀는 더 이상 억지를 부릴 수 없어서 얼른 말했다.

“시간이 너무 늦었으니, 그대들은 일찍 돌아가서 쉬세요.”

두 수의는 기다렸다는 듯이 예를 취하고 물러갔다.

묵용린은 자리에 그대로 앉아서 시종일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사람들이 다 가기를 기다리고 나서야 사봉봉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황후, 그녀들을 함께 불러온 의도가 무엇이오?”

사봉봉은 웃으며 대답했다.

“신첩, 별다른 의도는 없었습니다. 황상, 괜한 생각이십니다.”

묵용린은 빙빙 돌려서 말하기 번거로워, 아랫사람들을 모두 내보내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황후, 귀찮은 일을 이제 안 하겠다는 뜻이오? 짐의 병을 고쳐 주겠다고 하더니, 이제 와서 변덕을 부리는 것이오?”

황제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으니, 사봉봉도 더는 감추지 않았다.

“황상께서 이틀 동안 두 수의를 번갈아 불러 곁을 지키게 하시기에, 신첩은 황상께서 그녀들을 좋아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이왕 그렇다면 그 둘과 황상께서 편안한 자리를 자주 마련해 드리면 병증을 고치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묵용린은 이를 악물었다. 사봉봉만이 치료를 도와줬으면 좋겠다고 말할 수 없어서, 그는 고개를 한쪽으로 돌리고 울분을 토했다.

그도 사실은 사봉봉처럼 생각했었다. 하지만 수의들이 정말로 곁에 다가오자 그녀들과 친근하게 행동하고 싶은 욕구가 조금도 생기지 않았다.

그녀들의 손가락을 살짝 건드리기만 한 것도 그저 모순적인 심리 때문이었다. 그는 다른 여자와 친해지기는 싫었지만, 그렇다고 사봉봉에게 지고 싶지는 않았다.

사봉봉이 말했다.

“황상, 사람은 그 재능을 다 발휘하고 사물은 그 쓰임을 다해야 하는 법입니다. 두 수의들과 비교하면 신첩은 황상을 위해 국고를 채우는 일을 더 잘합니다.

아까 장 수의가 안마해 드리는 걸 보니, 이제는 황상께서도 아무런 불편함이 없으신 것 같습니다. 신첩이 보기에 이렇게 해 나가면 황상의 병은 곧 완치될 것 같았습니다.”

묵용린은 입술을 움찔거렸지만, 여전히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방금 장 수의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을 때 병세는 나타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너무 화가 치밀어 안마 따위에 신경 쓸 겨를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런 말을 사봉봉에게 할 수 없었다.

한동안 묵묵히 앉아 있던 묵용린이 입을 열었다.

“황후, 오늘 일은 짐이 추궁하지 않겠지만 다음번엔 용서치 않을 것이오. 짐이 누구를 좋아하고 누구를 싫어하든 다 짐의 일이니, 황후가 나서서 간섭할 일이 아니오.

얼마 지나면 곧 중추절이오. 중추 연회를 잘 준비하는 것이 지금 마땅히 신경 써야 할 중요한 일이오.”

사봉봉은 그가 하는 말을 들으며 그에게도 생각하는 바가 있을 거라고 짐작했다.

“예, 황상. 신첩, 명심하겠습니다.”

묵용린은 천천히 장포를 걷어 올리며 남몰래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에게 잘 보이려고 일부러 새로 지은 옷을 입었건만, 정작 그녀는 전혀 안중에도 없었다.

그는 속으로 긴 탄식을 삼켰다. 마음이 동하면 안 됐었는데, 이런 날이 계속된다면 앞으로 어찌 살아야 할지…….

마음을 가라앉히기 어려웠지만, 그는 결국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 흥에 겨워 왔다가 흥이 깨져서 돌아갔다.

달빛 아래, 그는 홀로 쓸쓸하게 걸어갔다. 가을바람이 사르르 불어오자 그의 가슴은 더욱더 싸늘해졌다.

왕장량과 사희도 멀지 않은 곳에서 뒤따라가며 황제의 뒷모습에서 쓸쓸함이 가득 묻어나는 걸 알아차렸고,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사희가 말했다.

“화본에서는 누가 먼저 마음이 동하면, 그 사람이 지는 거라고 했습니다. 아무래도 황상께서 태상황의 전철을 밟으시려나 봅니다.”

왕장량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 황후 마마의 성격은 태후만 못하시지. 황상의 길고 긴 고생길이 훤히 보이는 것 같네.”

승덕전으로 들어간 묵용린은 침전을 그대로 지나쳐서 후전에 있는 월규의 처소로 향했다. 그에게 월규는 백천범을 대신할 존재였다. 그는 마음이 편치 않을 때 월규 고고에게 가서 잠시 시간을 보내는 걸 좋아했다.

월규는 등불 아래에서 수를 놓고 있었다. 황제가 찾아온 걸 본 그녀는 얼른 일어나 마중을 나갔다.

“황상, 어쩐 일이십니까?”

묵용린은 그녀의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수틀을 힐끔 쳐다보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이런 일은 아랫사람들에게 시키지, 뭐 하러 고고가 직접 하는 겐가? 이러면 눈만 더 나빠지네.”

월규가 직접 차를 올렸다.

“이 고고는 아직 늙지 않았습니다. 이까짓 일에 눈이 나빠질 리가 있겠습니까?”

황제에게 걱정거리가 있음을 알아차린 월규는 왕장량을 힐끔 쳐다봤다. 왕장량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머리만 살짝 끄덕이자, 그녀는 곧바로 무슨 일 때문인지 알아차렸다.

그녀는 손을 흔들어 모두 나가게 했다.

“황상께서 여기까지 찾아오시다니,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찻잔을 들어 올린 묵용린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월규는 그와 마주 보고 앉아 웃으며 물었다.

“소인이 짐작하기로는 황후 마마와 관련이 있는 것 같은데, 맞습니까?”

묵용린은 의아해하며 고개를 들었다.

“고고가 그걸 어떻게 아는가?”

“황후 마마가 막 봉명궁으로 돌아왔을 때, 황상께서는 하루에도 몇 번이나 봉명궁을 찾으셨습니다. 요 며칠 동안은 안 가시는 걸 보니, 황후 마마와 다투신 것 아니겠습니까?”

묵용린은 입을 꾹 다문 채 묵묵부답이었다.

월규가 말했다.

“어린 부부가 말다툼 한두 번 하는 건 아무것도 아닙니다. 예전에 태후와 태상황께서도 그러셨으니까요. 그런 건 부부 사이에 당연한 정취입니다.

옛말에 때리면 친한 사이고 욕하면 사랑하는 사이라는 말이 있듯이, 싸울수록 정분은 깊어지죠. 황후 마마의 마음에 황상이 있기 때문에 싸우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황후 마마 같은 성미에, 상관하고 싶지 않은 사람과 싸우겠습니까? 귀찮아서 피하겠죠.”

그녀의 말이 묵용린의 폐부를 찔렀다. 그는 절망에 빠진 채 입을 열었다.

“그럼, 황후의 마음속에 짐은 상관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란 말인가? 그녀는 짐과 다투는 것을 귀찮아한다네. 짐 혼자 치밀어 오르는 화를 삭일 뿐이지.”

월규는 어리둥절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녀는 줄곧 황제와 황후 사이의 걸림돌이 황제에게 있다고 여겼다. 왜냐하면 그는 사봉봉에 대한 선입견을 가지고 있어서 그녀를 싫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단 황제가 겉치레를 내려놓고 적극적으로 나선다면 황제와 황후 사이에 놓인 그 얇은 종이는 찢어지기 마련이며, 사봉봉은 사리에 밝으니 당연히 황제와 잘 지내게 될 거라고 여겼다.

묵용린은 자신에게 은밀한 병이 있다는 걸 월규에게 알리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감정에 관해서는 그녀에게 알리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그녀를 웃어른으로 여겼고, 마음이 심란할 때면 누군가가 길을 헤매고 있는 그를 바른길로 이끌어 주길 원하기 때문이었다.

한참을 침묵하던 그는 고민스럽다는 듯 말했다.

“황후가 짐을 싫어하네.”

그의 어조에 억울함이 가득 묻어나자, 월규는 웃음을 터뜨렸다.

“어찌 그럴 수 있겠습니까? 세상에 황상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황후 마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좋아함을 말하는 게 아니네.”

묵용린은 더듬거리며 말했다.

“고고는 이미 짐이 말하는 의미를 알고 있겠지?”

이제 막 사랑에 눈뜬 어린 황제는 오만함 속에 수줍음을 머금고 있었다. 또, 억울함 속에 약간의 울분을 토로했다. 그런 복잡한 감정이 드러난 그의 얼굴을 월규는 깊이 들여다봤다. 이번에야말로 그녀는 상황을 제대로 파악했다.

그녀는 줄곧 묵용린과 태상황은 감정적으로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태상황은 전심으로 일생을 바쳐서 태후 한 사람만을 사랑했다.

반면 묵용린은 어려서부터 명군이 되겠다는 의지를 불태웠고, 남녀 간의 감정을 하찮게 여겼다. 그는 후궁에 여인들을 들인 뒤 이슬비가 내리듯 골고루 총애를 나누어 주며 태평성세의 대업을 일구려 했다.

그녀가 비록 같은 여인으로서 사봉봉이 다른 여자와 같은 부군을 나누어야 한다는 사실을 애석하게 여기기는 했지만, 그녀의 마음은 황제에게 더 많이 기울어 있었다. 이렇게 고민하는 그를 보게 되니 기쁘고 흐뭇했다. 만약 황제와 황후가 정말 태상황과 태후처럼 될 수 있다면, 또 하나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될 것이다.

월규는 물었다.

“황상, 황후 마마를 좋아하십니까?”

묵용린은 비록 인정하기 싫었지만, 월규 앞에서는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아서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월규는 미소를 지었다.

“이왕 좋아한다면, 앞으로 황후 마마께 신경을 더 많이 쓰십시오. 감정은 차곡차곡 쌓아 나가는 겁니다. 함께 하는 날이 많아지면, 자연스럽게 황후의 마음속에도 황상이 자리 잡게 될 겁니다.”

묵용린이 한탄을 쏟아 냈다.

“황후는 짐의 마음을 받아 주지 않네.”

“한 번에 안 받으면 두 번 시도하고, 또 안 받으면 세 번이고 네 번이고 시도하시면 됩니다. 그리하면 분명 황후께서도 받아 주실 겁니다.”

묵용린은 곤혹스러워했다.

“짐은 황제이네. 그러면 짐의 체면이…….”

월규는 웃음을 터뜨렸다.

“황상, 불경한 말을 내뱉는 소인을 용서하십시오. 여인의 환심을 사려면 체면을 구기는 것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방면에선 태상황께서 황상보다 훨씬 뛰어나셨습니다.

소인이 기억하기에, 언제인가 태후께서 태상황께 화가 단단히 나셔서 그분을 문밖으로 내친 적이 있었습니다. 태상황께서 아무리 좋은 말을 해도 태후께서는 문을 열지 않으셨지요. 마지막에 어떻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묵용린은 너무 궁금했다.

“어떻게 되었는가?”

월규는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나왔다.

“결국 태상황께서는 할 수 없이 담을 넘어서 안으로 들어가셨습니다.”

묵용린은 그들의 금슬 좋은 모습에 익숙했기에 그녀의 대답이 생소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런 일이 자신에게 일어난다면……. 위풍당당한 황제가 아내에 의해 문밖으로 내쳐지는 것도 모자라 담을 넘어야만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니, 이 어찌 천하의 웃음거리가 아닐 수 있겠는가?

그는 속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돼, 그래선 안 돼! 절대 안 돼!

월규가 말했다.

“이럴 때는 체면을 따지지 말아야 합니다. 상대가 나를 무시한다고, 나도 상대를 무시하면 부부 사이가 점점 멀어지기만 할 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황상?”

묵용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짐은 태상황이 아니네. 황제의 체면을 구기는 일은 할 수 없네.”

월규도 더는 권하지 않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비록 소인이 그런 일을 직접 겪지는 않았지만, 태후의 곁을 따라다니며 지겹도록 보았습니다. 두 분께서 더없이 달콤한 꿀단지 속 생활을 하게 되실 때, 황상께서는 이 고고가 오늘 올렸던 말씀을 떠올릴 겁니다.”

묵용린은 월규의 가르침에 뭔가 알 듯 말 듯했지만, 끝내 입을 굳게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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