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51화
사봉봉은 근 이틀 동안 어쩐지 나른하여 무엇을 해도 기운이 나지 않았다. 그런데 두 명의 수의가 함께 오는 것을 보고 분명히 무슨 일이 생겼다고 짐작했다.
그녀는 비록 외출하지 않았지만, 금천아라는 친절한 몸종을 당해 낼 수 없었다.
금천아는 날만 밝으면 바깥에서 벌어진 일을 그녀에게 말해 주니, 묵용린이 두 사람의 수의와 동반했던 일 또한 그녀도 벌써 알고 있었다.
게다가 묵용린이 양 수의보다 장 수의에게 더 끌리는 듯하다는 것도 그녀는 전해 들었다. 그녀와 함께 앉아 있던 시간은 한두 시진이었지만, 못다 한 말이 많은 것 같았고 그녀를 늦게 안 걸 아쉬워하는 것 같다고 했다.
그래서 사봉봉은 장 수의의 얼굴을 유심히 몇 번이나 훑어보았다. 그녀의 생김새는 양 수의보다는 못했지만, 쾌활하게 웃는 모습이 양 수의보다 훨씬 자유로워 보여서 다가가기엔 더 쉬운 인상이었다.
그들은 대화를 나눌 화제가 많아서 한참 동안이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특히 장 수의는 입담이 좋은 사람이었다. 연지나 장신구부터 시작하여 옷감과 같은 치장에 관한 이야기에, 중추 연회에 준비할 음식부터 어느 극단이 좋다는 이야기, 심지어 강남의 풍경부터 북부 요새의 추위에 대한 이야기까지, 그녀는 어떤 주제든지 대화를 이어 갈 수 있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화제가 황제에 대한 것으로 이어졌다. 황제가 전보다 상냥해졌다는 것부터 시작해서 다양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사봉봉은 인내심이 정말 대단해서, 미소를 지은 채 그 이야기를 다 듣고 있었다. 그녀는 앞에 깔아 놓은 말들은 별로 듣지 않고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하지만 황제에 관한 말이 나오자 그녀는 정말 유심히 들었다. 한두 마디 덧붙여 묻고 나니 무슨 상황인지 훤히 꿸 수 있었다.
묵용린이 두 명의 수의에게 자신과 동반할 것을 명한 것은 당연히 그의 은밀한 병증을 위함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황제가 껴안으려고 한다면 두 명의 수의는 절대로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 우선 그녀들은 그럴 담력이 없고, 여인이라면 누구나 위풍당당한 용모를 가진 묵용린을 흠모할 터. 어찌 그를 밖으로 밀어낼 수 있겠는가?
그녀는 꽃과 옥처럼 아름다운 두 아가씨를 보면서, 묵용린의 병증이 이제 많이 좋아졌으니 손을 잡거나 어깨동무를 하고 허리를 끌어안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로서는 그 이상 나아가는 게 조금 불편했다. 차라리 나머지 일은 두 명의 수의에게 맡기는 게 그녀도 평안을 되찾는 방법이리라.
어쨌든 장차 수녀들을 선발해야 했고, 많은 여인들이 그의 후사를 봐야 했다. 그녀는 황후의 책무만 충실히 하며 국고에 은자만 두둑하게 넣어 두면 된다…….
이렇게 생각하자, 그녀는 좋은 생각이 떠올라서 웃으며 말했다.
“중추절이 다가오고 있으니 궁중에 할 일이 많아요. 황상을 모시는 일은 두 수의들에게 맡기겠어요. 귀비는 지금 금족령을 받았고 유 귀인은 몸이 좋지 않으니, 본궁이 의지할 사람은 두 수의들뿐이에요.”
장 수의와 양 수의는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황후의 뜻을 명확히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떤 여인이 자기 부군을 밖으로 떠밀겠는가? 그러나 그녀들도 황후의 성품을 잘 알고 있었다. 황후는 허 귀비와 달리 진솔한 사람이고, 거짓으로 겸손한 말을 하지도 않았다. 이건 괜히 해 보는 말이 아닌 것 같았다.
* * *
묵용린은 상주서를 반나절 동안 살핀 후에야 겨우 그날의 일을 일단락 지을 수 있었다. 그는 기지개를 켜고, 왕장량에게 뻣뻣한 뒷목을 주무르게 했다.
사희가 만면에 웃음을 띠고 걸어 들어와 그에게 예를 올리고 말했다.
“황상께 아룁니다, 황후 마마께서 사람을 보내시어 저녁 식사를 함께 하자 청하셨습니다.”
묵용린은 눈을 가늘게 뜨고 안마를 즐기고 있다가, 이 말을 듣고 눈을 번쩍 뜨고는 내심 기뻐했다. 며칠 동안의 답답함이 말끔하게 사라지는 듯했다. 하지만 그는 뼛속까지 신중한 사람이라, 얼굴에 속내를 드러내지 않은 채 느긋하게 대꾸했다.
“알겠다.”
그리고 잠시 뒤에 분부를 내렸다.
“지난달에 새로 지은 평상복을 가져오너라.”
사희는 허리를 굽혀 응대하고 얼른 옷을 찾으러 갔다.
묵용린은 요 며칠 동안 화가 났지만, 속으로 계속 투덜거리면서도 봉명궁에 갈 핑계를 찾았다. 그런데 그가 핑계를 미처 생각해 내기 전에 사봉봉이 먼저 사람을 보내 자리를 청했다. 딱 원하는 시기에 다리가 바르게 놓이니 마음에 쏙 들었다. 역시 그의 황후다웠다.
곧바로 사희는 새로 지은 옷을 가져와 그에게 펼쳐서 보여 주었다.
묵용린이 물었다.
“무슨 향으로 훈향했느냐?”
사희는 어리둥절했다. 무슨 다른 향이 있겠는가? 황제가 사용하는 건 용연향이 유일했다.
그는 사실대로 대답했다.
“황상께 아룁니다, 용연향입니다.”
묵용린은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난향으로 바꾸거라, 청아하게.”
사희는 할 수 없이 난향으로 다시 훈향해야 했다.
옷을 갈아입은 묵용린은 머리를 다시 빗고, 관은 쓰지 않았다. 머리카락을 등 뒤로 늘어뜨린 채 옥구슬 띠 하나로만 묶어서 여유로운 기품을 드러냈다.
날은 아직 어두워지지 않았다.
그는 창문 앞에 서서 금빛 황혼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오늘따라 해가 어찌 이리 느리게 떨어진단 말인가?’
잠시 서 있던 그는 실내를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뒷짐을 지고 미간을 찌푸린 게, 마치 중요한 국사를 고민하는 것 같았다.
사희와 왕장량은 방해가 될까 봐 가만히 서서 기다렸다.
사실 묵용린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저 얼른 봉명궁에 갈 수 있게 빨리 어두워지기를 바랄 뿐이었다. 너무 일찍 가면 그는 빨리 식사를 하고 싶어서 급하게 왔다고 여겨질 것이다.
마침내 양각 궁 등이 켜지자 그는 얼른 발걸음을 옮겼다.
“봉명궁에 가지.”
왕장량은 어가를 준비시켰지만, 묵용린은 타지 않았다. 승덕전은 봉명궁과 멀지 않아서 걸어가는 게 더 빨랐다.
왕장량과 사희는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은근히 웃음을 감췄다. 황제는 난생처음 정분에 빠져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원래 진중한 성격이었던 그가 정말 풋내기처럼 굴고 있었다. 보아하니 태상황의 전철을 그대로 밟을 것 같았다.
묵용린은 급하게 걸어서 봉명궁에 도착했다. 그는 바깥에 있던 아랫사람이 미처 안에 소식을 전할 겨를도 없이 궁전 대문을 들어섰다. 그런데 실내에는 사봉봉 외에도 양 수의와 장 수의, 두 사람이 함께 있었다. 그는 어안이 벙벙했다.
황제가 나타나자 모두 예를 갖추었고, 문안 인사를 올렸다.
며칠 동안 사봉봉을 보지 못한 묵용린은 그녀를 손수 일으켜 세웠다. 그는 그녀의 팔을 잡은 채 놓지 않았다.
사봉봉은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애쓰며 그에게 눈짓을 보냈다. 두 명의 수의가 아직도 쪼그리고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제야 묵용린이 말했다.
“다들 일어나시오.”
사봉봉이 그를 자리로 안내한 뒤 웃으며 말했다.
“마침 오늘 두 수의들이 문안을 드리러 왔기에, 신첩이 함께 식사를 하자고 했습니다. 황상, 설마 신첩이 괜한 일을 벌였다고 탓하시지는 않겠지요?”
묵용린은 그녀가 괜한 짓을 했다고 탓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기분이 좋아 따지지 않고 다정하게 웃었다.
“그게 뭐 탓할 일이오? 사람이 많으면 떠들썩하고 좋지 않소.”
사봉봉은 냉궁에서 묵용린과 함께 식사를 했던 만큼, 그의 취향을 알고 있었다.
“황상, 신첩이 주방에 황상께서 즐겨 드시는 은어를 요리하라 했습니다. 어서 드셔 보시지요.”
사실 이건 하나의 암시였다. 은어 요리는 장 수의 앞에 놓여 있어서 그녀가 못 알아들을 수 없었다. 장 수의는 얼른 한 숟가락 덜어 황제의 그릇에 놓아 주었다.
“황상, 어서 드셔 보십시오.”
묵용린은 사봉봉의 말을 듣고 아주 기뻐했으나, 그 뒤에 장 수의가 은어 요리를 자신의 사발에 담아 주자 마치 도중에 기쁨을 빼앗긴 것 같았다. 그는 조금 화가 났지만, 이런 일 때문에 감정을 드러내기는 불편했기에 아무 말 없이 은어 요리를 입에 넣었다. 그러나 맛이 어떤지 제대로 느낄 수가 없었다.
그의 표정을 유심히 살핀 사봉봉은 그가 화를 내지 않자, 양 수의에게도 적극적으로 나서라는 암시를 전했다.
양 수의는 장 수의보다 담력이 작았지만, 이런 때에는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녀는 황후의 지시에 따라 황제에게 요리를 한 젓가락 집어 주었다.
묵용린의 인내심이 극에 달했다.
“되었소. 혼자 먹을 수 있소. 음식을 나눠 줄 아랫사람들이 있지 않소? 어찌 이런 일을 직접 하시오?”
막 젓가락을 내밀던 사봉봉이 움츠리며 멋쩍게 웃었다.
“신첩도 황상께 마음을 표현하려 했는데…….”
“…….”
‘조금만 더 참을걸…….’
식사를 마치고 다들 자리를 옮겨서 차를 마셨다.
묵용린은 끝까지 남아 있을 예정이었다. 그는 두 명의 수의가 일찍 떠나기를 바랐는데, 사봉봉이 그들과 저렇게 즐겁게 대화를 나눌 줄 어찌 알았겠는가? 그는 조용히 듣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짜증이 나서 견딜 수 없었다. 그리고 자신을 냉대하는 사봉봉이 원망스러웠다.
마침내 사봉봉이 그를 떠올리고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황상께서는 요즘 많이 바쁘시죠?”
그는 담담하게 웃었다.
“짐이 언제 바쁘지 않을 때가 있소?”
말투가 좋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나쁘지도 않았다. 그런데 그는 황후가 그 속뜻을 알아들을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사봉봉이 말했다.
“신첩은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요 며칠간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습니다. 매일 장부를 보느라 허리도 시큰거릴 지경인데, 황상께서는 분명 신첩보다 훨씬 고생하시니 아마 팔도 아프고 허리도 지끈거릴 겁니다…….”
그녀는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묵용린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황후가 직접 그의 어깨를 주무르려 할 것을 직감하고 깜짝 놀라면서도 약간 기대를 품었다.
“맞소. 역시 황후가 짐의 수고를 알아주는구려.”
말하면서 그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사봉봉은 장 수의의 곁으로 다가가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늘 장 수의가 신첩에게 안마를 해 줘서 지금은 많이 좋아졌습니다. 어떠십니까? 황상께서도 장 수의의 안마를 받으시면 피로가 싹 가실 겁니다.”
자연스레 황후의 의도를 알아차린 장 수의는 슬며시 일어났다. 그녀는 묵용린의 뒤로 돌아가더니 두 손을 그의 어깨에 살포시 올렸다.
묵용린은 그제야 비로소 황후의 속뜻을 알게 되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 분노를 표출하지 않기 위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사봉봉이 그에게 함께 식사를 하자 청한 건, 그와 두 명의 수의들 사이에 다리를 놓아서 그의 치료를 두 수의에게 떠넘기기 위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