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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1149)화 (1,149/1,192)

제1149화

뒤따르던 시종들은 감히 앞으로 다가가 방해하지 못하고 조용히 뒤에서 기다렸다. 황제가 왜 저렇게 근심에 빠져 있는지 의아했다. 분명 황후와는 하루가 다르게 사이가 좋아졌는데, 황제에게 무슨 고민이 있는 것일까?

잠시 후, 왕장량이 다가와 말했다.

“황상, 밤이슬이 내리고 바람이 차갑습니다. 감기에 걸리지 않도록 어서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묵용린은 짧게 응수한 뒤, 승덕전으로 향했다.

그렇게 그는 몇 걸음 걷다가 뒤돌아서 멀리 보이는 봉명궁을 힐끔 바라보았는데, 왠지 알 수 없는 노여움이 끓어올랐다.

‘감히 원하지 않는다고? 흥, 아쉬워할 줄 알고?'

지금은 그의 은밀한 병도 거의 나았고, 궁에 여인이 그녀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설마 그녀가 없다고 그가 살지 못할까? 그는 태상황이 아니었다. 스스로 나무에 목매달고 죽는 짓은 절대 하지 않을 것이다!

다시 발걸음을 옮긴 그의 걸음걸이에서 일말의 결연함이 엿보였다. 그는 더 이상 뒤를 돌아보지 않고 승덕전으로 들어갔다.

* * *

묵용린이 며칠째 사봉봉을 찾지 않자, 아랫사람들은 곤혹스러웠다. 황후 마마가 봉명궁으로 돌아오니, 황상께서 왜 마음을 쓰지 않으시는 거지? 설마 냉궁이 사랑을 속삭일 수 있는 좋은 장소란 말인가?

묵용린이 오지 않으니 자연히 사봉봉도 그를 찾지 않았다. 그녀는 그를 도와주고 싶었지만, 나름의 한계선이 있었다. 지금은 서로 좀 난감한 상황이니 만나지 않는 게 오히려 더 나았다.

그러나 영문을 모르는 금천아는 그녀에게 권유했다.

“마마, 황상께서 요즘 발길이 뜸하신 게, 아마 너무 바쁘신 것 같습니다. 마마께서 뵈러 가시는 건 어떠십니까? 허 귀비는 금족령을 당했고 다른 사람은 황상의 안중에 없으니, 지금이야말로 좋은 기회입니다. 마마, 놓치지 마세요.”

사봉봉은 그녀를 힐끗 쳐다보며 물었다.

“네 말은 본궁이 총애를 얻으려 다투어야 한다는 말이냐?”

“그러면 안 될 이유도 없잖습니까?”

금천아는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황후가 비록 정처라지만, 황제에게는 첩이 너무 많다. 그러니 황제의 총애를 두고 다투지 않으면 어찌 살겠는가?

사봉봉은 들고 있던 찻잔을 탁자 위에 거세게 내려놓더니,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금천아는 그제야 자신의 상전이 화가 난 것을 깨닫고 얼른 뒤쫓아 가려 했지만, 경옥이 그녀를 잡아당기며 말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금천아는 고개를 푹 떨구고 한숨을 내쉬었다.

황후의 속마음을 그녀라고 어찌 모르겠는가? 다른 여자와 자기 남편을 나누려는 여인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사봉봉이 시집온 상대는 황제였다. 황제는 첩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숫자도 적지 않다. 후궁은 아름다운 여인이 삼천은 채워질 터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오색찬란하여 매우 화려하겠지만, 여인들의 강호는 남자들의 것보다 훨씬 더 험악했다.

유 귀인의 말로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부드러운 칼날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곳이었다. 장차 허 귀비보다 더 악랄한 여자가 나타날지도 몰랐다. 황후가 아무리 대단한 지위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황제의 보호가 없다면 그녀 역시 다가오는 위험을 막을 수 없으리라.

지금은 황제가 그녀에게 잘 대해 주고, 허 귀비에게는 금족령이 내려졌으며 나머지는 근심할 것이 못 되었다. 그러니 이런 좋은 기회를 잡지 못한 채 수녀가 선발되고 나면 새롭고 나긋나긋한 여인들이 대거 후궁으로 몰려들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새로운 것을 더 좋아하니, 황제 또한 어찌 그녀를 기억하겠는가?

* * *

승덕전에서는 묵용린이 양 수의에게 시중을 명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부름에 양 수의는 고금을 챙겨 갔다. 황제를 위해 고금을 타는 것 외에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사희가 편전으로 안내하자 양 수의는 텅 빈 실내를 향해 예를 갖추었다.

“신첩, 황상께 문안 여쭈옵니다.”

정면에서 가볍고 느긋한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짙은 남색의 물결무늬가 새겨진 장포 자락과 그 아래 흑색 천을 금실로 박음질한 두꺼운 바닥의 장화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녀는 황제가 가까이 왔다는 것을 알고 조심스럽게 숨을 죽였지만, 그다음 순간 그녀는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놀랍게도 황제가 직접 그녀를 일으켜 세운 것이다.

그 커다란 손은 그녀의 팔을 꼭 잡고 그녀를 일으켜 세운 뒤에도 놓지 않았다.

양 수의는 감히 고개도 들지 못한 채, 소매 속에서 주먹을 꽉 쥐었다. 그녀는 머릿속이 엉망으로 뒤엉켜서 그저 멍하니 서 있었다. 그다음에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묵용린의 시선이 양 수의의 팔로 향했다. 넓은 장포 소매가 그녀의 팔을 가리고 있었지만, 그의 손바닥은 조금만 힘을 줘도 부러질 듯 가느다란 그녀의 팔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너무 나약한 여인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유약한 게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좋아하는 건 사봉봉처럼 혼자서도 어려움을 막아 낼 수 있는 여인이었다.

사봉봉도 팔뚝은 가늘었지만, 그녀의 부드러운 살갗 아래로 단단한 골격이 느껴졌다. 그녀는 그가 붙잡아도 당황하지 않고 방긋방긋 웃었다…….

황제가 넋을 놓고 있는데, 양 수의는 도저히 버틸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녀는 숨을 참고 있다가 도무지 더는 참을 수 없어서 헛기침을 했고, 그 소리에 묵용린이 깜짝 놀랐다.

양 수의는 자신이 황제를 놀라게 했음을 알았다. 그녀는 황송해하며 털썩 무릎을 꿇고 울부짖었다.

“황상, 신첩이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묵용린은 바닥에 엎드려 벌벌 떨고 있는 여인을 보며 미간을 찡그렸다. 뭐만 하면 울음을 터뜨리고 무릎 꿇다니, 참으로 귀찮군!

역시 황후가 담대하게 대처한다. 집안에 그렇게 큰일이 생겼는데도 그녀가 눈물로 밤을 지새우는 걸 본 적 없었다. 그런 강인함은 아무나 가지고 있는 게 아닌 것을……. 이런, 그는 왜 또 사봉봉을 떠올리고 있는 것이란 말인가.

그는 의자에 앉아 양 수의에게 말했다.

“일어나시오. 일단 고금을 가져왔으니, 짐에게 한 곡 연주해 보시오. 연주를 잘하면 짐이 그대의 죄를 너그러이 용서하겠소.”

양 수의는 곧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건 감히 나설 수 없었지만, 고금만큼은 자신 있었다. 그녀가 일어나니, 고금을 연주할 수 있도록 소태감이 벌써 준비해 놓았다.

그녀는 다리를 비스듬히 편 채 앉았다. 두 팔을 살짝 들어 올리자 긴 소매가 펼쳐지며 가볍게 흩날렸다. 열 손가락이 고금 위에 내려 앉아 현을 뜯으니, 청명한 고금 소리가 휑한 대전에 울려 퍼졌다.

아랫사람들은 감히 고금을 타는 양 수의를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지만, 고금 소리는 그들의 귓가에도 맴돌았다. 감칠맛 나게 이어지는 음률에 다들 취한 듯 빠져들었다.

그런데 의자에 단정하게 앉은 황제의 표정은 아주 담담했다. 눈까지 반쯤 감은 채라서 어디를 보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왕장량은 황제가 지난번처럼 듣다가 잠들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는 잠시 멍하니 앉아 있다가 자세를 바꾸곤 계속 비몽사몽인 듯한 태도를 유지했다.

양 수의가 연주한 곡은 매우 경쾌한 곡조로, 흐르는 물소리와 지저귀는 새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꽃들이 활짝 피어나며 새들이 하늘을 날아다니는 풍경도 절로 머릿속에 그려졌다. 푸르른 봄날에 답청을 나온 사람들의 모습을 묘사한 곡이었다.

양 수의의 고금 연주 솜씨가 워낙 뛰어난 덕에, 꽃피는 봄의 장면들이 눈앞에 생생하게 살아나는 것 같았다.

한 곡조가 끝난 뒤에도 고금의 현은 그녀의 손가락 아래에서 떨리며 깊은 여운을 남겼다.

대전은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옥좌에 앉은 사람이 입을 열지 않으니, 아무도 움직일 수 없었다. 아무리 힐끔거려도 황제는 우두커니 앉아서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양 수의는 할 수 없이 왕장량을 바라봤다. 계속 연주를 해야 한단 말인가?

왕장량은 차마 황제를 방해할 수 없어서 고개를 끄덕였고, 그렇게 양 수의는 두 번째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황제가 정겨운 곡조를 싫어해서 별로 반응하지 않은 거라고 생각한 그녀는 이번엔 전혼곡을 연주했다. 창칼과 철마가 즐비하고 연기와 안개가 자욱하게 펼쳐진 전장과, 기세가 웅장하며 사기가 충만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지는 듯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감히 숨조차 내쉴 수 없었다.

하지만 황제는 여전히 나태한 자세로 옥좌에 앉아서 눈을 반쯤 감은 채, 완전히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있었다.

양 수의는 문득 자신의 실력에 의문이 생겼다. 분명 제일 자신 있는 곡조를 연주했는데 여전히 황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설마 자신의 고금 실력이 이런 지경까지 퇴보했단 말인가?

왕장량은 이번에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가 보기에도 황제는 고금 연주를 전혀 듣지 않고 있었다. 더 이상 연주를 계속하는 건 무의미했다. 그는 앞으로 다가가 가볍게 속삭였다.

“황상, 황상……?”

묵용린은 눈을 살짝 치켜떴다.

“응?”

“양 수의 마마께 고금을 계속 연주하라고 할까요?”

묵용린은 어찌할 바를 모르는 양 수의에게 시선을 옮겨 손짓했다.

“이리 와 보시오.”

양 수의는 얼른 일어나 잔걸음으로 황제 앞으로 다가갔다.

“손을 내밀어 보시오.”

양 수의는 그의 말에, 손바닥이 위로 향하게 손을 내밀었다. 황제가 그녀에게 무엇을 주려고 하는 걸까? 아니면 손금을 봐 주려고?

묵용린은 그녀의 손을 한참이나 보고 있더니, 마치 양 수의의 손을 덮을 것처럼 자기 손을 손바닥이 아래로 향하게 한 채 내밀었다. 하지만 내려오던 도중에 잠시 머뭇거리더니, 그는 네 손가락을 접고 한 손가락만 남겼다. 그는 손끝으로 조심스레 양 수의의 중지를 살짝 건드린 후 얼른 뒷걸음질 쳤다.

* * *

양 수의가 황상의 시중을 들고 돌아왔다는 소식에, 장 수의는 즉시 대화를 나누러 왔다.

그동안 궁중에는 몇 가지 큰 사건이 있었다. 황후는 냉궁에서 나왔고, 허 귀비는 금족령을 당했다. 유 귀인은 중태에 빠졌으며, 그동안 거들떠보지도 않던 황제가 오랜만에 양 수의에게 시중을 들게 했다. 왠지 궁중의 판도에 변화가 올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장 수의가 안으로 들어가 보니, 양 수의는 의자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녀는 오른손을 살짝 오므린 채, 치켜든 중지를 눈도 깜빡이지 않고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장 수의는 웃으며 물었다.

“형님, 뭘 그렇게 보면서 넋을 놓고 있어요?”

양 수의는 고개를 들었다.

“아우님, 오셨어요.”

“황상께서 형님께 곁을 지키라고 명하셨는데, 어찌 벌써 오셨어요?”

“음.”

양 수의가 이어 말했다.

“두 곡조만 연주하고 돌아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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