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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1147)화 (1,147/1,192)

제1147화

묵용린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찬찬히 느끼다가 가만히 손을 떼더니, 호숫가에 펼쳐진 계화림을 가리켰다.

“중추가 다가오는데, 그때가 되면 저곳에서 중추절 연회를 열까 하오. 황후의 생각은 어떻소?”

사봉봉은 어렸을 때, 궁중의 중추절 연회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친수대 양쪽에 커다란 연꽃 잔을 매달아서 호숫가를 대낮처럼 밝게 비췄으며, 등불 아래에는 무대를 세워서 가무를 공연하고 악기를 연주했다.

양쪽에 줄지어 늘어선 나무에는 색색의 등불을 달았다. 길을 따라 깊은 곳까지 이어지는 등불은 마치 반짝이는 은하수 같았다.

공기 중에는 계화 향기가 짙게 풍겼고, 어린아이들은 토끼 인형을 손에 들고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게다가 배를 타고 달을 구경할 수도 있었다.

그때 그녀는 아직 어린 나이였지만, 계화 밀주 한 잔 정도는 마실 수 있었다. 그녀는 탁자에 턱을 받치고 앉아서 청양 전하가 다른 아이들을 쫓아다니는 떠들썩한 광경을 구경했었다…….

묵용린은 사봉봉이 자신과 함께 있을 때 딴생각에 빠지는 것이 기분 나빠서 퉁명스럽게 말했다.

“황후, 무슨 생각을 하고 있소?”

사봉봉이 대답했다.

“신첩이 어린 시절, 궁에 들어와서 중추절 연회에 참석했던 때를 떠올려 보았습니다. 그때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묵용린은 매년 중추 연회에 참석했었다. 어리지만 행동이 어른스러웠던 그는 대부분 태상황이나 신하들과 함께 있었고, 내외명부가 모여 있는 곳을 찾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그러니 사봉봉이 말하는 재미는 알지 못했다.

“황후는 그때 무엇을 하고 놀았소?”

“신첩은 화등花燈을 밝히고 수수께끼를 맞히곤 했습니다. 그런데 매번 난청에게 졌습니다. 도무지 이길 수 없었습니다.”

가난청을 언급하면, 묵용린은 항상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만면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동월에서 제일 총명한 사람에게 지는 건 창피한 게 아니오. 때론 짐도 그를 당해 낼 수 없소. 또 무얼 하고 놀았소?”

“그리고 예쁜 토끼 인형을 가지고 놀았습니다. 그 누구의 것보다 예쁜 인형이었지요.”

“짐이 짐작하기에 황후의 것이 최고였을 것이오.”

사봉봉은 약간 의아했다.

“황상, 왜 그렇게 생각하셨습니까?”

“사가 상호의 상대商隊는 만천하에 널려 있으니, 무슨 희한한 장난감이라도 다 구할 수 있었을 것이오.”

사봉봉은 입을 가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황상께서 잘못 짚으셨습니다. 그건 성 전하의 토끼 인형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게 제일 예뻤던 이유는, 성 전하가 제일 신경을 많이 쓰셨기 때문입니다. 그 토끼 인형은 성 전하처럼 맑은 기운이 감돌았습니다.”

묵용린은 듣고 있자니 귀에 거슬렸다. 남자에게 맑은 기운이 있다고 칭찬하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그때, 묵용성이 어린 시절 그녀와 어울리며 함께 자랐으니 당연히 두 사람의 관계가 남들보다 더 돈독할 거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많은 사람이 그에게 사봉봉은 묵용성을 아우로만 대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게 정말인지 그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는 기분이 나빴지만, 안색은 조금의 변화도 없었다.

“어릴 때 자주 함께 놀았으니 감정이 남다르겠소?”

사봉봉은 그때 같이 놀던 모든 아이들을 말하는 줄 알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사이가 매우 좋으니까요.”

묵용린은 자신의 감정이 고요한 호수 아래에 출렁이는 파도인 것 느껴졌다. 당장이라도 기슭에 새하얀 포말이 세 자나 흩날릴 것 같았다.

그는 침울한 목소리로 물었다.

“사이가 얼마나 좋소?”

“신첩은 그 애들을 모두 누이나 아우처럼 여깁니다.”

묵용린은 그 말을 듣고서야 그녀가 모든 사람을 가리켰다는 걸 깨달았고, 마음속에 응어리졌던 게 스르르 풀렸다. 그는 그래도 불안한 마음이 완전히 가시지 않아서 다시 물었다.

“모든 아이들이 다 그렇소?”

“네, 모두 다 그렇습니다.”

사봉봉은 미소를 지었다.

“설마 황상께서는 그 애들을 아우처럼 여기지 않습니까?”

예전에 그는 사가를 제외하고 가가와 영가 두 집안과는 모두 친밀한 사이였고, 양가의 아이들을 당연히 아우처럼 여겼지만, 지금은…….

그는 곁눈으로 사봉봉을 슬쩍 훑어봤다. 그런데 지금은 사가의 여인이라는 이 후발 주자가 오히려 원래 관계가 좋았던 아이들을 단번에 앞질렀다.

그는 뒷짐을 진 채 노련한 대답을 내놓았다.

“황후가 아우처럼 여기는 이들이라면, 당연히 짐에게도 그리될 것이오.”

그의 말은 언뜻 듣기엔 그저 당연한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자세히 음미해 보면 다정함과 사랑스러움이 가득 배어 있었다.

사봉봉은 대꾸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얼굴을 살짝 붉혔다. 그녀가 수줍어하는 모습에 그의 마음은 저절로 떨렸고, 지금 하늘을 뒤덮고 있는 햇빛처럼 더없이 찬란하게 빛났다.

“황후.”

그는 그 두 글자에 어떤 맛이 느껴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입맛을 다시더니 말했다.

“저녁에 짐이 다시 오겠소.”

만약 이 말을 다른 궁비들에게 했다면 더없이 기뻐했을 터이지만, 사봉봉은 아니었다. 그녀는 여전히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신첩, 황상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 *

황후가 봉명궁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봉명궁에서 일하는 시종들은 모두 환희로 가득 차서 하마터면 경축 폭죽을 내걸 뻔했다.

사실 사봉봉이 냉궁에서 고생스럽게 지낸 건 며칠밖에 되지 않았다. 그것도 황제가 사나흘에 한 번씩은 물건을 보내 줬으며, 또한 봉명궁 사람들이 냉궁에 들어가는 것을 아무도 막지 않았다.

오죽하면 경화와 경옥은 매일 냉궁을 찾았고,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른 뒤엔 다들 냉궁의 대문을 넘나드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길 정도였다.

그런데도 사봉봉이 완전히 돌아오자, 모두들 황후가 엄청난 고초라도 겪은 것처럼 그녀를 둘러싸고 하염없이 눈물을 훔쳤다. 그 바람에 사봉봉은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녀가 죽었다가 살아 돌아오기라도 한 줄 알 것이다.

눈살을 찌푸린 금천아가 굵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왜들 울어? 마마께서 돌아오신 건 기쁜 일이다! 다들 웃어야지!”

다른 사람을 훈계할 때면 그녀는 두 눈을 소보다 더 크게 떴다. 그러면 얼굴에 있는 근육이 떨리며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봉명궁 전체에서는 그녀가 가장 포악했기에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다들 얼른 눈물을 닦고 웃었다. 그들의 웃음은 가슴에서 나오는 진짜 웃음이었다. 봉명궁의 주인이 돌아왔으니 이제 그들도 기댈 상전이 있기에, 밖에 나가서 걸을 때도 허리를 곧게 펼 수 있었다.

금천아는 그들이 사봉봉을 둘러싸고 소란을 떠는 걸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다시 소리를 질렀다.

“됐으니 이제 그만들 하거라! 마마께서 조용히 계실 수 있도록 다들 물러나거라.”

얼마 지나지 않아 저녁 식사가 차려졌다. 봉명궁에는 따로 숙수가 있어서 사봉봉이 즐겨 먹던 요리를 내왔다.

뜻밖에도 사봉봉은 몇 입 먹더니, 미간을 찡그렸다. 아마도 묵용린을 따라 한동안 어선을 먹다 보니, 덩달아 입맛이 예민해진 것 같았다. 원래는 아주 맛있다고 여겼던 음식이 지금은 좀 평범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다행히 그녀는 먹는 것에 까다롭지 않아서 천천히 식사를 마쳤다.

금천아는 한쪽에 서 있다가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더니 농담을 건넸다.

“마마, 황상께서 안 계시니 입맛이 없으십니까?”

사봉봉은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말했다.

“냉궁에 한 번 들어갔다 나오더니, 담이 점점 커지는구나. 감히 본궁까지 마음대로 판단하다니. 경화와 경옥이 본궁에게 공양하기로 한 경문을 아직 다 베끼지 못했으니, 네가 이어서 베끼도록 하거라.”

차마 말을 잇지 못하던 금천아가 이내 인상을 구기며 애원했다.

“마마, 소인을 용서해 주십시오. 소인은 경서만 보면 머리가 아픕니다.”

사봉봉이 말했다.

“네가 본궁에 대해 함부로 말하는 건 상관없다. 하지만 만약 그걸 황상께서 듣기라도 하면 네가 가지고 있는 면사 금패를 황상께 돌려 드려야 할지도 모른다.”

금천아는 혀를 내밀며, 경화와 경옥을 향해 익살스러운 귀신 표정을 지었다. 원래 생긴 게 까칠한 그녀가 익살스러운 표정을 짓자, 더욱더 우스꽝스러워서 경화와 경옥은 몰래 웃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식사를 마친 사봉봉은 소화도 시킬 겸, 긴 복도를 따라 내려가서 산책을 했다.

어느덧 황혼이 사방을 뒤덮었고, 날이 어두워지려 했다.

만물이 하늘빛 속에서 희미한 그림자를 남길 때, 먼 곳에서 어떤 사람 그림자가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게 보였다.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옷차림이 잘 보이지 않지만, 그녀는 그 사람이 묵용린임을 알아보았다. 궁궐 전체에서 황제만이 갖는 독특한 풍격이 있었다. 유유자적하고 오만한 그의 걸음걸이에는 군왕의 기개가 가득했다.

그녀는 길가에 서서 조용히 그를 기다렸다.

묵용린도 멀리서 사봉봉을 보고 한눈에 황후임을 알아보았다. 황후의 걸음걸이는 다른 여인들처럼 바람에 흔들리는 버들가지같이 휘청거리지 않았다.

그녀는 평온하고 안정적으로 걸어서 의젓한 기개가 돋보였다. 그녀도 이미 그를 알아보았기에 길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난생처음으로 그는 누군가가 자신을 기다리는 것이 매우 기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마음까지 훈훈해졌다.

얼굴에 웃음을 감추지 못한 그는 사봉봉의 곁으로 다가가 자연스럽게 손을 잡았다.

“짐을 기다렸소?”

“네.”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사봉봉은 마주 잡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다. 물과 불처럼 섞이지 못하던 두 사람이 어쩌다 이렇게 사이가 좋아졌을까?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들을 서로가 좋아 죽는 다정한 부부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 모든 게 다 황제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더 걷겠소?”

묵용린이 그녀에게 물었다.

사봉봉은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두워졌으니 이만 돌아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긴 복도를 따라 걷다가 다시 계단을 올라 대전으로 들어갔다. 묵용린은 그때까지도 사봉봉의 손을 놓지 않았다.

봉명궁 사람들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황제와 황후가 반목하던 장면들이 아직도 눈에 선했고, 황후가 겪은 상처와 처벌을 다들 기억하고 있었는데 언제 두 사람의 관계가 이렇게 좋아졌단 말인가? 그들이 도대체 무엇을 놓친 걸까?

게다가 황제와 황후가 곧장 침전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거니, 다들 너무 놀라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너도나도 금천아를 바라보며 궁금증을 풀어 주길 원했다.

그러나 그녀는 의미심장한 미소만 지을 뿐 한사코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손을 휘저어 모두를 쫓아내더니, 자신도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 대기했다.

냉궁에 있을 때, 그녀도 눈치챌 수 있었다. 황제는 분명 마마께 마음이 동한 게 틀림없었다. 비록 금천아가 보기에 묵용린은 그리 흡족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그가 노력하고 있다는 건 좋은 일이었다. 그녀의 생각은 아주 단순했다. 마마께서 누구에게 시집을 가시든 마마를 행복하게만 해 준다면 그 사람은 무조건 좋은 남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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