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46화
“…신첩은 단지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갔음을 한탄하는 것입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신첩과 황상이 서로 알고 지낸 지가 벌써 삼 년이나 되었습니다.”
묵용린은 뒷짐을 진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가 늘어놓는 말을 가만히 들었다.
“그 후에 황상께서는 가끔씩 신첩을 찾아 주셨고, 신첩의 생일도 꼭 기억하셔서 사람을 시켜 선물을 보내 주시곤 하셨습니다. 황상, 신첩에 대한 황상의 마음은 신첩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궁에 들어오시자마자 황상께서는 신첩을 이리 푸대접하시는 겁니까?”
그녀는 계속 말했다.
“황상께서 왜 황후를 맞이하셨는지는 신첩도, 문무백관도 다 알고 있습니다. 또한 신첩은 황상께서도 그 당시에 어쩔 수 없었고, 황후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어쨌든 장사꾼 집안의 여인으로 온몸에 이익만 추구하는 모리배의 못된 습성이 가득한데, 어찌 천하를 품는 어머니가 될 수 있겠습니까?
만약 태상황의 명령만 없었다면 지금쯤 황후의 지위는 신첩의 것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황상, 어찌 기껏해야 장사꾼 딸인 여인 때문에 신첩과의 정분을 잊어버릴 수 있으십니까? 사가 상호는 조정의 황금을 강탈하는 큰 죄를 지었지만, 황상께서는 단지 사 주인장을 가택 연금 시키고 황후를 냉궁에 보내셨을 뿐이었습니다.
반면 신첩은 사소한 실수를 저질렀을 뿐인데, 어찌 금족령을 내리십니까? 황상, 이건 신첩에게 너무 불공평한 처사이십니다. 황후는 장사하는 데 익숙하니 당연히 말솜씨가 뛰어나겠지만, 신첩은 언변이 화려하지 않습니다. 하오나 황상, 황상을 향한 신첩의 마음만은 천지신명이 다 알고 있을 겁니다…….”
“그 입 다무시오!”
묵용린은 그녀가 사봉봉을 비난하자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귀비, 감히 당금의 황후를 망령되게 일컫는 것이오? 뭐, 모리배의 못된 습성? 기껏해야 장사꾼의 딸? 황후는 궁에 들어온 이후, 한 번도 언행에 어긋남이 없었소. 그리고 짐의 뜻 또한 매우 적절하게 집행했지.
북부에 가뭄이 들었을 때, 황후는 짐이 입을 열기도 전에 주도적으로 사가 상호에서 은자를 갹출해 백성들을 구제했소. 그녀는 마음속에 이미 천하의 백성들을 품고 있으니, 그녀보다 더 황후에 알맞은 사람은 없을 것이오.
오히려 귀비는 어떻소? 후궁을 대신 맡아 보라고 했더니, 유 귀인의 병세를 더욱더 악화시켜 지금과 같은 지경이 되게 했소. 게다가 감히 짐에게 집적대기나 하다니, 과연 귀비야말로 황후에 어울리는 사람인지 가슴에 손을 얹고 스스로 반성해 보시오.”
너무 놀란 허 귀비는 사슴 같은 두 눈을 크게 뜨고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마치 그가 내뱉은 말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겠다는 듯, 눈물을 머금고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황상, 예전에는 그렇게 잘해 주셨잖습니까. 만약… 만약 황후가 중간에서 이간질하지 않았다면, 황상께서 신첩에게 이렇게까지 냉담하게 변할 수 있겠습니까?”
“귀비, 틀렸소.”
묵용린이 말했다.
“짐은 원래 귀비를 굉장히 높이 평가했소. 그건 귀비의 가문과 성품 때문이었지. 심지어 황후로 세워도 괜찮겠다는 생각도 했었소. 이런 짐의 생각은 대혼 후에도 바뀌지 않았소. 하지만 사람은 시간을 두고 지켜보아야 한다는 말처럼, 귀비는 겉보기에는 단정하고 우아해 보이지만 마음속에는 온통 탐욕이 가득했소.
어떤 일들은 짐이 말하지 않았을 뿐, 모르고 있는 게 아니오. 짐은 좌상의 체면을 봐서라도 귀비가 스스로 잘 처리하길 바랄 뿐이오. 스스로 선택하고 나아간 길이 황후와 도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이오? 황후가 비록 상인 가문 출신이기는 하지만 여태껏 사람을 해치려고 한 적은 없었소.”
“황상!”
절망한 허 귀비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소리쳤다.
“대체 황후가 뭐가 좋다는 거죠? 왜 자꾸 그녀의 편을 드시는 겁니까…….”
“무엄하다!”
묵용린은 정말로 화를 내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지금 자기 자신을 좀 보시오. 이게 어디 귀비의 모습이란 말이오?”
묵용린의 그 한마디가 허 귀비를 일깨웠다. 그래! 그녀는 고귀한 좌상부의 적장녀이며, 높은 지위를 가진 귀비 마마였다. 어찌 저잣거리의 아낙네처럼 큰소리를 칠 수 있겠는가?
얼른 눈물을 거둔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묵용린은 진작에 짜증이 난 상태였다.
“할 말 다했으면, 짐은 이만 가겠소.”
“황상.”
그를 또 불러 세운 허 귀비는 겁에 질린 채 영십칠을 힐끔 쳐다본 뒤,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신첩, 알고 싶은 게 있습니다. 황상께서는 혹시…….”
“혹시 뭐요?”
마음을 독하게 먹은 허 귀비는 이를 악물며 말을 내뱉었다.
“혹시 황상께서는 여자를 만지지 못하시는 것 아닙니까?”
묵용린은 그녀가 죽을 때까지 따귀를 때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이게 무슨 귀비란 말인가? 머리가 모자란 것이 아닌가? 감히 그에게 이런 질문을 해서 그가 분노하면 그녀를 죽일 수도 있다는 걸 모른단 말인가?
그는 속으로는 화가 치밀었지만, 얼굴은 평소와 다름없었다.
“그렇지 않소.”
“아닙니까?”
허 귀비는 의혹을 뿌리칠 수 없었다.
“그럼 왜 신첩이 가까이 갈 때마다 황상, 황상께서는…….”
묵용린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그건 귀비의 몸에서 나는 향이 너무 짙어서 그랬소.”
말을 마치자마자 그는 몸을 돌려 밖으로 걸어 나갔다.
허 귀비는 어리둥절함에 팔을 들어 냄새를 맡았다. 그러나 그녀의 몸에서 나는 향기는 그렇게 짙게 느껴지지 않았다…….
정전으로 돌아온 묵용린은 멈추지 않고 그대로 사봉봉의 손을 잡고 궁전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는 더 이상 한순간도 거기 있고 싶지 않았고, 어리석은 여자를 보는 것도 싫었다.
얼른 뒤따라 나오던 허 귀비는 그 광경에 날벼락을 맞은 것 같았다. 그녀의 안색이 종잇장처럼 하얗게 질렸다. 마음속에 품고 있었던 환상이 순식간에 깨져 버렸다. 황제는 여자를 만질 수 있었다. 단지 그녀를 만지고 싶지 않을 뿐.
그 충격적인 사실에 그녀는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었다. 만약 금령이 얼른 부축하지 않았다면 땅바닥에 쓰러졌을 것이다.
사봉봉은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냥 그가 자신을 끌고 가게 내버려 두었다.
그들의 뒤를 시종들이 멀찍이 뒤따랐다. 오직 측근에서 시중드는 사람만 황제의 기분이 지금 극도로 나쁘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들은 감히 성난 산봉우리를 건들지 못하고 모든 희망을 황후에게 걸었다. 다들 황후의 손을 붙잡고 있는 그의 손을 바라보았다.
심지어 왕장량은 눈물이 앞을 가려 소매 끝으로 눈가를 훔쳤다. 마침내 황제의 병을 고칠 사람이 황후일 거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정말 감개무량했다. 역시 태상황의 선견지명은 대단했다!
금화궁에서 나올 때의 그 아주 급하던 발걸음은 점점 느려졌지만, 그는 계속 사봉봉의 손을 잡고 있었다.
사봉봉은 그를 측근에서 모시던 사람은 아니지만, 타인의 기분과 안색을 읽는 것에 능숙했다. 그녀는 황제의 기분이 아주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가 자신을 마구 끌고 가도록 내버려 두었다.
묵용린은 명호까지 가서야 발걸음을 멈췄다. 그는 마음이 너무 복잡하고 수많은 것들이 뒤엉켜서 도저히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허 귀비에게 말했듯이, 어떤 일들은 그가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아예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어떤 일들은 알고 있음에도, 여러 방면을 고려해서 모른 척할 따름이었다.
그는 한때 허 귀비와의 아름다운 미래를 구상했었다. 그러나 지금 보아하니 그건 현실과 아주 동떨어진 구상이었다. 삼 년 동안이나 감정을 키워 왔던 여인이 저렇게 추악하기 짝이 없으니. 그는 자신의 안목과 판단력에 슬며시 의심을 품었다.
그와 동시에 태상황에게는 오체투지를 할 정도로 탄복했다. 생강은 역시 오래된 것이 매웠다. 태상황의 안목은 독보적이었고, 장기적인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 이미 누가 동월의 황후로 가장 적합한지 알고 있던 것이다.
손 안에 잡혀 있던 자그마한 손이 살짝 움직이자 그는 무의식적으로 꽉 쥐며 정신을 차렸다. 이제 보니 계속 사봉봉의 손을 잡고 있었다.
그는 그 손을 놓고 싶기도 했지만, 또 뭔가 아쉽기도 했다. 그 자그마한 손은 그의 어지러웠던 감정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는 이상한 작용을 일으켰다. 하지만 안 놓고 그대로 잡고 있자니, 그건 또 계면쩍었다. 이런 감정을 처음 겪는 황제는 조금 쑥스러웠다.
결국 그는 그녀의 손을 놓고 매우 진지한 어조로 사봉봉에게 말했다.
“짐이 많이 좋아진 것 같소.”
사봉봉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이대로만 하시면 황상께서는 곧 완전히 나으실 겁니다.”
넓은 소매 안으로 손을 넣은 그녀는 살며시 소매 안에서 손바닥을 닦았다. 황제의 손바닥은 온통 땀으로 젖어서 끈적거렸다. 비록 많이 좋아지기는 했지만 황제는 여전히 잔뜩 긴장했다.
가을이 찾아온 호수는 암녹색이어서 마치 거대한 녹옥綠玉 같았다. 이따금 바람이 스쳐 지나가면 수면에 잔잔한 물결이 일었고, 파문이 원을 그리며 멀리까지 퍼져나가 한참 동안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묵용린은 겹겹이 퍼져 나가는 잔물결을 바라보다가 불쑥 입을 열었다.
“황후는 짐이 귀비를 너무 두둔한다고 생각하지 않소?”
사봉봉도 잔잔한 파문을 한참 응시하다가 말했다.
“황상께서 두둔하시는 건 귀비가 아니라 좌상이지 않습니까?”
묵용린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자, 사봉봉도 시선을 가져오며 그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신첩이 틀렸습니까?”
묵용린은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짐의 의중을 멋대로 짐작하다니, 죄가 무겁군!”
사봉봉은 단언했다.
“황상께서는 신첩에게 죄를 묻지 않으실 겁니다.”
“무엇 때문에 그리 생각하시오?”
“신첩이 하옥되면 누가 황상의 병을 고치겠습니까?”
“감히 짐을 협박하는 것이오?”
“신첩이 어찌 감히 그럴 수 있겠습니까.”
사봉봉이 얼른 공손하게 예를 취하는 척했고 묵용린은 습관적으로 부축하는 척만 하려고 했는데, 뜻밖에도 뻗은 손에 그녀의 팔이 정말로 닿았다. 자기도 모르게 굳어진 그의 손바닥에는 그녀의 부드러운 감촉과 따뜻함이 느껴졌고, 그의 심장 박동은 또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짐은 그래도 이제 황후의 팔에 닿을 수 있게 됐소.”
사봉봉이 비록 뭇사람들 앞에 얼굴을 드러내는 것에 이미 익숙했지만, 여인으로서의 조심스러움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황제의 상황이 조금 특수하기에, 그녀는 좀 불편하더라도 그의 손길을 피하지 않고 웃으며 대답했다.
“경하드립니다, 황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