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왕비초장성 (1144)화 (1,144/1,192)

제1144화

복도에서 사봉봉을 마주한 그는 곧장 무릎을 꿇고 유 귀인의 상황을 낱낱이 고했다.

“마마, 소인도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귀비 마마께서 관여를 하지 않으시니, 감히 마마께 찾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마, 부디 한 번만 저희 마마를 찾아 주십시오. 너무 가여우십니다…….”

옆에 있던 금천아가 언짢은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

“이제 와서 우리 마마께 청을 드리다니, 진작엔 뭘 하고? 예전엔 감히 우리 마마를 모독해 놓고, 무슨 낯짝으로 여길 찾아와?”

사봉봉은 가만히 소안자를 쳐다보았다. 소안자가 눈물 콧물 범벅이 된 게 가여워 보였다. 보아하니 유 귀인의 병세가 정말 나쁜 모양이었다. 목숨과 관련된 일을 소홀히 대할 수는 없었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시도는 해 보겠지만, 본궁이 나갈 수 있을지는 확실하지 않네.”

그녀가 문 앞으로 다가가 보초에게 말했다.

“본궁이 잠시 나갔으면 하는데, 황상께 청을 드려야 하겠지?”

보초가 고개를 저었다.

“황상께서 말씀하시길, 마마께선 어디든 자유롭게 오가도 좋다고 하셨습니다.”

사봉봉이 흠칫 놀라 물었다.

“황상께서 그리 말씀하셨다고?”

“예, 마마. 황상께서 직접 그리 명하셨습니다.”

보초가 공손히 옆으로 물러나 길을 터 주었다.

사봉봉이 말했다.

“그렇다면 잠시 금화궁에 다녀오겠네.”

소안자는 연신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리고 눈물을 닦은 뒤, 길을 안내했다.

문득 그는 어제 허 귀비를 찾아가 청을 드렸던 상황이 떠올랐다.

허 귀비는 느긋하게 차를 마시며 이렇게 말했었다. 태의도 속수무책인데 자신이 어찌 하겠냐며, 괜히 갔다가 병을 옮을 수는 없지 않겠느냐고. 그때 그녀는 차디찬 표정을 전혀 숨김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하지만 황후 마마는 달랐다.

소안자는 그녀가 유 귀인을 진심으로 걱정한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걱정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었다. 냉담하거나 싫어하는 기색은 전혀 없었고, 더욱이 예전의 원한 때문에 고소해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아량이 넓어 경중을 분별할 줄 아는 게 분명했다. 역시 황상께서는 안목이 뛰어났다. 이런 것이야말로 황후라면 응당 가져야 할 기량과 책임이 아니겠는가.

사봉봉은 유 귀인을 보자마자 화들짝 놀랐다. 유 귀인의 병세가 심각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예전의 꽃다웠던 여인은 어디 가고, 누렇고 초췌한 얼굴에 눈두덩이가 움푹 파이고 광대는 도드라진 여인이 침상에 누워 있었다. 겨우 숨을 내쉬는 것 같은 그녀의 모습은 정말이지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눈을 감은 채 누워 있는 게, 죽은 사람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사봉봉은 괴로움에 가슴이 저릿했다. 유 귀인에게 호감은 없었지만, 꽃다운 여인이 이렇게 변했다는 게 너무 안타까웠다.

그녀가 방 안의 노비들을 훑으며 어두운 목소리로 물었다.

“어찌 이리 된 것이냐? 태의를 부르지 않은 것이냐?”

소안자가 웅얼거리며 말했다.

“마마, 소인이 어찌 된 것인지 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랬다. 조금 전, 그가 전부 다 말해 주었다.

유 귀인이 병이 나자 태의가 와서 진맥을 해 주었다. 태의는 그녀의 몸이 너무 쇠약해 약을 가볍게 지어야 한다고 했고, 결국 아무런 효과도 보지 못했다. 병세는 조금씩 더 악화되었고, 약을 더 늘린다면서 유 귀인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의 극약을 썼다.

그렇게 유 귀인은 약 두세 첩을 먹은 뒤, 지금의 상태에 이르렀다. 사실 태의는 이 일에서 혐의를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암암리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다들 훤히 꿰고 있었다.

잠시 침묵하던 사봉봉이 입을 열었다.

“유 귀인의 몸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지켜보면서, 어찌 다른 태의를 불러올 생각은 하지 않은 것인가?”

궁녀가 훌쩍거리며 말했다.

“마마, 소인들처럼 보잘것없는 이들이 어찌 태의를 바꿔 달라 요구할 수 있겠습니까. 모든 일은 전부 귀비 마마께 청을 드려야 하는데, 귀비 마마께서…….”

사봉봉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냉궁에 숨어 있는 동안, 바깥에서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참 악랄하기도 하지.

그녀가 봉인을 금천아에게 주며 말했다.

“네가 직접 가서 노 의정을 모셔 오너라.”

방 안에 있던 노비들의 얼굴에 곧장 화색이 돌았다. 노 의정은 의술이 뛰어나서 늘 황제와 황후의 진료만 담당해 온 만큼, 만약 그가 봐 준다면 유 귀인에게도 희망이 있을지 몰랐다.

금천아는 유 귀인이 몹시 탐탁지 않았지만, 지금은 두말 않고 봉인을 받아 밖으로 향했다.

소안자가 말했다.

“마마, 혹시 모르니 조금 멀리 떨어져 계시지요. 혹 병이 옮을지도 모릅니다.”

사봉봉은 자리에 앉아 꿈쩍도 하지 않았다. 금천아에게 명을 내린 뒤, 그녀는 다시 유 귀인을 바라보았다.

언제 정신을 차린 건지, 유 귀인이 혼탁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봉봉이 웃으며 그녀를 위로했다.

“걱정 말아요. 본궁이 노 의정을 모셔 오라고 명했으니까. 의술이 뛰어난 의정이니, 분명 금방 치료해 줄 거예요.”

유 귀인이 눈을 깜빡이자 그녀의 눈꼬리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가 입술을 움찔거렸지만, 목소리가 너무 작아 잘 들리지 않았다.

사봉봉은 어쩔 수 없이 그녀의 입가에 귀를 갖다 댔다.

“마마, 신, 신첩이 잘못했습니다. 예전에, 신첩이, 잘못…….”

사봉봉이 이불을 여며 주며 말했다.

“그런 말은 하지 말아요. 다 지나간 일이니까.”

유 귀인이 느릿느릿 고개를 젓더니 다시 입을 벌렸다.

“마마, 귀, 귀비를 조, 조심하세요. 귀비…….”

그녀는 너무 급하게 말을 뱉으려던 나머지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사봉봉이 그녀의 가슴을 부드럽게 쓸어내려 주며 말했다.

“몸이 나으려면 기력을 회복해야 하니, 말은 그만하세요.”

유 귀인은 숨을 돌리더니, 고집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봉봉은 어쩔 수 없이 또다시 가까이 다가갔다.

유 귀인이 드문드문 말을 이었다.

“마마, 꼭 기, 기억하십시오. 이번 황금을 찾은, 방법을, 신, 신첩이 언, 언급한 것, 사실, 귀, 귀비가 신첩에게 그, 그리하라고 시킨 것입니다…….”

사봉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 또한 그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날, 묵용청양이 그녀에게 찾아와 황금을 찾을 길이 없다며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때 유 귀인이 해 준 말 덕에 묵용청양은 곧장 환경문으로 달려가 성 내 모든 은장을 조사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사가 은장에서 황금을 찾아냈다.

이 일로 그녀의 어머니는 금족령이 내려졌고, 그녀도 냉궁에 들어갔다. 사가 상호가 가장 큰 혐의를 받게 된 것이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고 유 귀인의 손을 토닥였다.

“걱정하지 말아요. 본궁도 잘 알고 있으니.”

사실 그녀도 의심을 품고 있었다. 주모자는 황금을 사가 은장에 넣었고, 거액의 은표를 은전으로 바꾸도록 사람들을 움직였다. 여기에 그녀의 아버지에게까지 손을 대서 행방불명에 이르게 했다.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사람은 황제를 제외하면 몇 명 되지 않았다. 다만 주모자는 교활하고 빈틈이 없어서, 영안조차 심증은 있지만 물증은 찾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봉인은 제법 효과가 뛰어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노 의정이 급히 유 귀인의 처소로 찾아왔다. 유 귀인의 상태를 꼼꼼히 확인한 그는 침상 앞에 서서 침묵에 잠겼다.

사봉봉이 그에게 물었다.

“어떠한가. 보양할 약재는 본궁에게도 얼마든지 있네. 삼이나 녹용…….”

노 의정이 고개를 저으며 조용히 말했다.

“아무리 좋은 삼을 쓴다 해도 잠시뿐일 겁니다. 유 귀인께선 명이 다하셨으니, 뒷일을 준비하셔야 합니다.”

사봉봉은 화들짝 놀랐다. 그가 이렇게 말하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한 탓이었다.

“정말 아무런 방법이 없단 말인가? 이렇게 젊은데…….”

그녀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침상에 누워 있던 유 귀인이 응얼거리며 무어라 말했다. 고개를 돌리자, 유 귀인이 온 힘을 다해 자리에 일어나 앉으려 했다.

사봉봉이 서둘러 다가가 그녀를 다시 눕혔다.

“뭐 하는 거예요. 어서 누워 있어요. 노 의정이 있으니 걱정하지…….”

유 귀인은 정신이 혼미하긴 했지만, 그들이 하는 말을 똑똑히 들었다. 그녀가 고개를 저으며 또다시 눈물을 흘렸다. 오히려 이전보다 정신이 더 맑아지는 듯했고 목소리도 방금보다는 더 또렷하게 들렸다.

“마마, 그렇게, 위로해 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신첩의 몸은, 신첩이 잘 아니까요. 신첩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신첩은, 그저 후회막심할 따름입니다. 갈 때가 되어서야, 마마께서 좋은 분이시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신첩이 어리석게도, 잘못된 길을 택했습니다. 마마의 은혜는, 신첩이, 다음 생에, 반드시 갚겠습니다…….”

사봉봉은 그녀의 말에 가슴이 찢어질 듯 괴로웠지만,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달랬다.

“조급해하지 말아요. 우선 노 의정에게 약을 몇 첩 지어 달라고 할게요. 원래 병은 산이 무너지는 것처럼 갑작스레 닥치고 치료 과정은 실을 뽑는 것처럼 길다고 하잖아요. 천천히 치료해 봐요. 귀인은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말고 푹 쉬어요. 모든 건 본궁에게 맡기고.”

모든 걸 다 맡기라는 사봉봉의 말은 유 귀인에게 엄청난 위로가 되었다. 유 귀인은 그 말에 두 눈을 감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 비록 여전히 초췌한 얼굴이었지만 아주 조금은 평온해 보였다.

사봉봉은 잠시 그녀를 지켜보다가 노 의정과 바깥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에게 다시 한 번 방법을 생각해 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그래도 아직 멀쩡히 살아 있는 사람인데, 명이 다했다고 해서 가만히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유 귀인의 노비들은 황후가 노 의정에게 간절히 부탁하는 소리를 들으며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만약 진작에 황후 마마를 찾아갔더라면 그들의 주인이 과연 이 지경까지 되었을까?

사봉봉은 노 의정이 최선을 다하겠다고 해도 그저 시간을 늦출 뿐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잠시 고민한 끝에 금천아를 승덕전으로 보냈다. 그래도 황제에게 한번 와 달라고 청은 드려야 했다. 후궁에 들인 세 귀인들 중, 유 귀인만 유일하게 황제와 오랜 시간 함께하지 않았는가. 어쨌든 황제와 정을 나눈 사이인 만큼, 떠나는 길을 배웅하는 게 도리였다.

금천아도 두말 않고 황급히 승덕전으로 향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