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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1143)화 (1,143/1,192)

제1143화

그녀의 손을 꼭 쥐자, 그의 심장은 또다시 빠르게 뛰었고 호흡도 가빠졌다. 손바닥도 땀으로 흥건해지는 것 같았다.

처음엔 조금 괴로웠지만 이번에는 괴로움 속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편안한 기분이 느껴졌다. 마치 욕망을 충족한 것처럼, 심장은 빠르게 뛰지만 안정된 기분이었다.

사봉봉은 단순한 마음에 시작한 일이었다. 묵용린이 그녀에게 잘해 주니, 그녀도 보답을 해야 했다. 묵용린이 그녀에게 잘해 주는 이유를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아마 그녀의 집에 큰일이 생겼으니 그녀가 가엾어 보였을 터. 어쨌든 그 역시 태후에게서 태어났는데, 차가운 성격이라 해도 얼마나 차갑겠는가?

게다가 황제가 먼저 말을 꺼내기 어려운 일이었기에, 황후로서 책임지고 도와야 했다. 훗날 그녀와 황제의 사이가 어찌 되든 적어도 황제에게 미리 공을 세워 둬야 나중에 그녀가 실수를 저지르더라도 좋게 생각해 줄 터.

냉궁을 나온 묵용린은 꼭 솜 위를 걷듯 흔들거렸다. 그는 소매 안에서 주먹을 꼭 쥐었는데, 그렇게 해야 사봉봉의 온기를 더 오래 남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원래는 오늘을 끝으로 더는 그녀를 찾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이제는 마음이 바뀌었다. 사봉봉이 그의 병을 고쳐 준다고 하니, 병부터 고친 뒤에 다시 생각해야겠지.

지금 그에게 병을 고치는 것만큼 중요한 건 없었다. 그는 누군가 자신의 비밀을 아는 게 싫었다. 심지어 월규에게마저 숨길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사봉봉이 알게 되니, 조금 민망하긴 해도 생각만큼 신경 쓰이진 않았다. 어쨌든 사봉봉은 황후가 아니던가. 태후가 부부는 일심동체라 했다. 그도 이젠 그 의미가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 * *

궁에 발이 묶인 묵용성은 기분이 퍽 좋았다.

그날 손수건을 도로 갖고 온 뒤 별안간 기발한 생각이 떠오른 그는, 새 손수건에 시 두 구를 적어 다시 가지 위에 걸어 두었다.

역시나 가인은 또다시 뒤에 두 구를 덧붙여 주었다.

두 사람은 서로 손수건에 쓴 시를 주고받으며 교류를 이어 나갔는데, 시에 감정 대신 날씨나 풍경 등에 대한 정서를 담았다.

비록 만난 적은 없지만, 이러한 교류 방식은 그에게는 매우 새로운 경험이었다. 게다가 낭만적이기도 해서 그는 이러한 감정에 금세 도취되었다.

결국 그는 참지 못하고 숲속으로 가, 꿈에 그리던 가인을 기다렸다.

송교가 숲에 도착했을 때, 그녀를 모시는 궁녀 은령은 곁에 없었다. 피풍을 가져오지 않아 도중에 다시 처소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송교는 묵용성을 보고도 그리 놀라지 않았다. 그녀도 자신과 시를 나누는 벗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다. 이렇게 귀공자의 모습을 한 그를 보자, 그녀는 아주 살짝 가슴이 떨렸다.

묵용성이 먼저 입을 열었다. 손수건을 꺼낸 그가 멋들어지게 웃으며 말했다.

“시도 잘 지으시고 필체도 훌륭하시더군요. 오늘 이렇게 뵙고 나니, 그보다 실물이 더 좋은 분이시라는 걸 이제야 알겠습니다.”

그는 말을 뱉으며 허리를 숙이고 예를 갖췄다.

“부디 제 경솔함을 이해해 주십시오. 전 소저의 재능과 식견에 진심으로 탄복하여 이러는 것이니까요.”

그는 다정하게 웃으면 쉽게 여인들의 호감을 샀다.

송교는 늘 재능 있는 사람을 좋아했기에 외간 남자와 교류하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몸을 살짝 숙이며 미소를 지었다.

“공자의 시도 매우 훌륭합니다. 저는…….”

그녀는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숲에서 점점 다가오는 발소리를 들었다. 고개를 들어 보니, 오솔길을 걸어오는 은령의 모습이 보였다.

은령은 황당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달려오더니, 재빨리 묵용성을 훑고는 송교를 끌고 그대로 자리를 떴다.

홀로 남은 묵용성은 얼떨떨한 얼굴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송교는 은령의 손에 이끌려 비틀거렸다. 그녀가 조용히 물었다.

“어찌 이러느냐?”

“마마, 지금 소인에게 따지시는 겁니까?”

은령이 언짢은 목소리로 말했다.

“손수건으로 말을 전하면 그만이지, 직접 만나다니요. 누군가 알기라도 하면 어찌 하시겠습니까?”

은령의 꾸지람에 송교는 괜시리 마음이 불편해졌다. 애당초 처소에 갇혀 지냈던 것도 괜히 문제를 일으키지 않기 위해서였는데, 혹여나 오늘 일이 전해진다면 분명 몹시 성가신 일이 생길 것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묵용성은 아직도 그 자리에 서서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돌아보자, 그는 눈을 반짝이더니 성큼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송교는 더욱 빠른 발걸음으로 은령을 따라갔다.

* * *

“사희 공공, 소인이 황상을 한 번만 뵐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저희 마마께서 정말 큰일이 날 것 같습니다. 사희 공공, 부탁드립니다. 소인이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소안자가 사희의 다리를 붙잡고 간절히 애원했다.

사희가 세차게 발을 뿌리치며 호통쳤다.

“썩 돌아가지 못할까! 황상께서 태의도 아니시건만, 만나 뵈어 무얼 하겠다고? 아직도 황상을 속이려 하다니!”

지난번에 곤장을 맞은 후로, 사희는 더 이상 제 주장을 함부로 펼치지 않았고 귀비든 귀인이든 일절 신경 쓰지 않았다. 요즘 황상께서는 황후 마마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만나려 하지 않으셨다.

더욱이 유 귀인은 황상에게 오점을 남긴 적 있었다. 병을 핑계 삼아 감히 황제 앞에서 황후 마마를 모함하려 하지 않았는가. 이제는 고할 말이 있다 해도 황상께서 만나 주지 않으실 테니, 굳이 안으로 들어가 말을 전할 필요도 없었다.

소안자는 또다시 납작 엎드려 눈물 콧물을 다 쏟았다.

“공공, 저희 마마께서 정말 상태가 안 좋으십니다. 이번엔 정말입니다. 정말이란 말입니다…….”

그가 또다시 바닥에 엎드려 통곡하자, 사희는 옆에 있던 소태감에게 손을 휘저었다.

“황상도 계신데, 시끄럽게 소란을 피우지 못하도록 멀리 끌어내거라.”

소태감 두 명이 소안자를 끌고는 멀찍이 내팽개쳤다.

소안자는 청석판이 깔린 길가에 철퍼덕 넘어졌다. 입이 쩍 벌어질 만큼 고통스러웠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일으켰다. 안에 대고 소리를 지르려는데, 두 호위병이 허리춤에 달린 검집에 손을 대고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얼음처럼 차가운 시선에 겁이 난 소안자는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뒷걸음치다 결국엔 발걸음을 돌렸다.

이제 누구에게 청해야 한단 말인가?

허 귀비가 후궁을 관리했기에 그는 몇 차례나 허 귀비를 찾아가 청을 드렸다.

물론 허 귀비는 태의를 보내 주긴 했다. 태의는 앞서 유 귀인의 몸이 너무 약해졌다며, 약을 적게 처방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약효는 전혀 없었고 오히려 병세만 더 심각해진 탓에 자연히 약도 더 많이 쓰게 되었다.

그러나 유 귀인의 상태는 갈수록 계속 악화될 뿐이었다.

그는 결국 또다시 허 귀비를 찾아갔다.

하지만 그녀는 짜증을 내며 자신은 태의가 아니니 자신에게 애원해 봤자 소용없다며, 저마다 운명이란 게 있으니 하늘의 뜻을 지켜보라고 했다.

유 귀인의 노비들은 그제야 알게 되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유 귀인의 목숨은 허 귀비의 손아귀에 달려 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 허 귀비가 유 귀인에게 고육지책을 쓰도록 종용했을 때부터 짜여진 판이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유 귀인은 허 귀비의 말대로 자신의 몸을 상하게 했다. 그 뒤로 줄곧 나아지지 않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태의는 오로지 허 귀비의 뜻에 따라 치료했다. 약을 줄이고 늘리는 것도 다 이유가 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빤히 알면서도, 그들이 어찌 감히 입에 올릴 수 있겠는가?

유 귀인의 이런 말로를 알게 되었다 해도, 노비인 그들이 주인의 억울함을 호소할 곳은 없었다. 황제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는데, 황제도 만날 수 없으니 이제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인가?

소안자는 넋을 놓고 걸어가다가 유 귀인이 처음 입궁했을 때의 그 아리따웠던 모습을 떠올렸다.

그녀는 노비들에게도 늘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그 때문에 그들 역시 자신들처럼 노비로서 파견된 궁의 상전에게 충심을 다하며 주인이 승승장구하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처음엔 그들에게도 희망이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나중에는…….

그들은 유 귀인의 모든 행보를 지켜보고 있었지만, 구태여 말리진 않았다. 그들도 사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와 이런 상황이 되자 후회가 막심했다. 하지만 이 세상에 어디 후회되지 않는 일이 있던가.

하염없이 걷던 그의 눈가에 어느새 눈물이 맺혔다. 멀지 않은 곳에 봉명궁이 보였다. 그는 속으로 깊은 탄식을 내뱉었다.

‘황후 마마께서 냉궁에 계시지만 않았어도 찾아가 애원해 보는 건데…….’

시일이 지나면서 누가 좋고 나쁜지, 다들 훤히 꿰고 있었다. 귀비에 비해 황후 마마는 더 따스했고 다가가기도 편했다. 자신의 주인이 어쩌다 황후 마마와 다투게 되었는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몇 걸음 더 걸어가던 그의 뇌리에 별안간 무언가 스쳤다. 황후가 냉궁으로 들어가긴 했어도 황제는 늘 황후를 보러 갔고, 좋은 물건도 잔뜩 보내 주었다. 그런 걸 보면, 냉궁에서 고생을 하고 있는 것 같진 않고 오히려 조용히 숨어 지내는 듯했다.

그는 속으로 잠시 따져 보다가 서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쨌든 주인의 목숨이 위태로우니 무엇이든 시도해 봐야 했다.

냉궁에 다다르니, 보초가 문 앞을 지키고 있었다.

그는 문 앞을 배회했다. 과연 자신을 들여보내 줄까? 그런데 입을 열기도 전에, 보초가 먼저 물었다.

“황후 마마를 찾아왔소?”

“예.”

그가 허리를 굽혀 예를 갖췄다.

“소인, 황후 마마를 찾아왔습니다.”

“어느 궁에서 왔나?”

“금화궁에서 왔습니다. 저희 마마의 병세가 깊어, 황후 마마께 보고를 드리려 합니다.”

“지금 마마께선 후궁의 일을 관장하지 않으시니, 관장하는 분께 찾아가게.”

소안자는 그의 말에 눈물을 흘렸다.

“소인, 그쪽도 찾아가 보았습니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지요. 저희 마마께서 곧 사달이 날 것 같은데…….”

그가 통곡하며 무릎을 꿇었다.

“부디 황후 마마를 한 번만 뵐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그때, 방에서 나온 금천아가 멀찍이 그 모습을 지켜보더니 목청을 높여 물었다.

“누가 황후 마마를 뵙고 싶어 한단 말인가?”

소안자가 곧장 소리쳤다.

“금천아 누이, 소인 소안자입니다. 저희 마마께서 곧 큰일이 나실 듯합니다. 누이께서 인정을 베풀어 부디 황후 마마를 뵐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사봉봉은 그 소란에 문발을 걷고 나와 보초에게 말했다.

“들여보내게.”

황후의 말에 보초는 소안자를 들여보냈다. 그가 가여워 보였는지 한 마디 덧붙였다.

“마마를 뵈면 잘 말씀드려 보게.”

소안자는 알겠다 대꾸하고는, 소매로 눈물을 닦은 뒤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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