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42화
시종들이 물러나자, 사봉봉은 어쩔 수 없이 직접 황제에게 음식을 덜어 주었다. 하지만 황제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몰랐기에 그녀는 음식을 집을 때마다 그에게 물어야 했다.
“황상, 돼지 족발 조림 좀 드시겠습니까? 신첩이 덜어 드리겠습니다.”
엄숙한 표정으로 단정히 앉아 있던 묵용린은 짤막하게 그리하라고 대꾸하곤, 접시를 내밀어 그녀가 음식을 떠 주길 기다렸다.
“…….”
아직 음식을 뜨지도 않았는데 그릇부터 갖다 대다니, 그렇게나 좋아하는 음식이란 말인가?
그녀가 한 국자 가득 떠서 황제의 그릇에 덜어 주었다.
“많이 드십시오, 황상.”
묵용린은 기름진 족발 조림을 바라보며 아주 살짝 미간을 찌푸렸지만, 아무 말 없이 먹기 시작했다.
멀찍이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왕장량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황제는 족발을 좋아하지 않아서 이따금 한 조각 정도 맛만 보는 게 다였다. 만약 황후가 아닌 다른 이가 이렇게 많은 양을 덜어 주었더라면 황제는 분명 화를 내고도 남았을 것이었다.
족발 조림의 맛이 너무 강했던 탓에, 묵용린은 순간 목이 칼칼해졌다. 시종을 불러 물을 따르라고 분부하려는데, 입을 열자마자 목이 막혔다.
사봉봉은 그제야 자신이 오해를 했다는 생각에, 황급히 물을 따라 황제의 입가에 가져갔다.
“너무 짜셨습니까?”
묵용린도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알지 못했다. 황후가 물을 입가에 가져다 대자, 그는 고개를 숙이고 곧장 들이마셨다.
사봉봉은 이 상황이 조금 어색했다. 노비들이 줄지어 서 있는 방 안에서 황제가 너무… 그녀를 편하게 여겼다.
비록 두 사람은 각자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화기애애하게 식사를 마쳤다.
그들은 편정으로 자리를 옮겨 차를 마셨다.
원래는 다 낡아빠진 공간이었지만 묵용린이 인부를 통해 새 탁자와 의자, 장식품 등을 가져다주었다.
겉으로 보기엔 별반 달라진 게 없었지만, 사봉봉은 창가에 놓인 평상이 마음에 들어 한가할 때마다 거기 누워 책을 읽었다. 황제가 보내 준 것들은 거의 다 이곳 편정으로 옮겨 둔 덕에 방이 가득 찬 느낌이었다.
묵용린은 안에 있는 것들을 하나씩 훑어보았다. 평소엔 별 생각 없었는데, 이렇게 보니 그 또한 놀라웠다. 그가 보내 준 것들이 꽤 많았기 때문이었다. 정식으로 절차를 거쳐 보낸 것은 아니었고 먹을 것, 가지고 놀 것, 입을 것 등 생각나는 대로 곧장 보내 주곤 했다.
그가 멍하니 앉아 있자, 사봉봉도 더는 관여하지 않고 책장 앞으로 가서 책을 정리했다.
그녀가 손을 뻗자 너른 소매 사이로 새하얀 피부가 드러났다.
묵용린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눈도 깜빡이지 않고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어느샌가 자신도 모르게 사봉봉 옆으로 다가갔다.
사봉봉은 책장을 넘기느라 순간 황제가 가까이 오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묵용린의 시선은 새하얀 팔목에서 점점 위로 향했다. 어깨를 지나 목으로, 목을 지나 어느새 귓가에 닿았다.
아래로 늘어뜨린 옆머리를 바라보던 그는 손을 뻗어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꼭 도둑질을 하듯 심장이 쿵쿵 뛰었고 목구멍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지만, 차마 물을 달라고 입을 열지 못했다.
사봉봉은 책 한 장을 다 읽은 뒤 다음 장을 읽으려고 고개를 움직였다가, 머리카락이 팽팽히 잡아당겨지는 느낌을 받았다. 흠칫 놀라며 시선을 들어 올린 그녀는 그제야 묵용린이 아주 가까이 와 있단 사실을 깨달았다.
시선이 맞닿는 순간, 두 사람은 서로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잠시 뒤, 사봉봉이 먼저 침묵을 깼다.
“신첩, 황상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묵용린이 손을 내리고 다시 앉아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말해 보시오.”
사봉봉은 아무 말 없이 문 앞으로 걸어가더니 문과 창문을 닫았다.
늘 침착하던 묵용린은 그녀의 행동에 조금 당황스러웠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물었다.
“무, 무슨 짓이오?”
그는 사봉봉이 자신을 위협했던 일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이렇게나 잘해 주는데, 그녀는 아직도 그를 위협하려 한단 말인가?
사봉봉이 그를 안심시키며 웃었다.
“황상, 긴장하지 마십시오. 신첩이 황상께 무슨 짓을 하겠습니까?”
묵용린이 강경한 말투로 물었다.
“설마 짐이 황후를 무서워할까 봐?”
사봉봉이 손을 뻗었다.
“황상, 신첩이 무섭지 않으시면 신첩의 손을 잡아 주십시오.”
그녀는 그를 부르는 것처럼 손가락을 늘어뜨린 채 허공에 손을 뻗고 있었다.
묵용린이 마른침을 삼키며 물었다.
“짐이 왜 황후의 손을 잡아야 한단 말이오?”
사봉봉이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황상, 신첩은 황상을 도우려는 것입니다.”
묵용린은 곧장 그녀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사봉봉은 그의 은밀한 병을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화를 낼 거라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그는 그저 빤히 그녀의 손을 바라보았고, 그의 마음은 그녀를 향한 갈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진왕은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그 여인에 대한 욕망이 생긴다고 했다. 그녀에게 입을 맞추고 싶고 포옹하고 싶고, 그녀와 몸을 뒤섞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그의 병이 완전히 나을 거라고도 했다.
그는 적잖이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이번이 기회라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었다. 훗날 후궁이 여인들로 가득 찰 텐데, 서둘러 병을 고치지 않으면 그의 비밀을 더는 지키지 못할 것이다.
그가 사봉봉을 바라보았다.
“알고 있었소?”
사봉봉이 고개를 끄덕였다.
“신첩, 다른 뜻은 없습니다. 그저 황상을 돕고 싶습니다.”
그녀가 그를 다독였다.
“황상, 신첩의 손을 잡아 보십시오.”
묵용린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가볍게 그녀의 손을 쥐었다. 심장이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오는 기분이었다. 속이 울렁거릴까 봐 두려웠다. 이제 곧 헛구역질이 나면서 숨을 쉴 수 없게 되겠지…….
보드라운 그녀의 손을 쥐니, 그는 꼭 뜨거운 불덩이를 잡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등에선 땀이 흘렀고 심장은 빠르게 뛰었다. 호흡도 가빠졌다. 그는 또다시 병이 도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구토를 하지도, 속이 울렁거리지도 않았고 숨을 쉬지 못하는 일은 더더욱 없었다.
“황상, 기분이 어떠십니까?”
사봉봉이 물었다.
묵용린은 바싹 마른 입술을 할짝이며 말했다.
“괘, 괜찮소.”
“그럼 잠시 더 잡고 계시지요.”
묵용린이 한참 뒤에야 대답했다.
“알겠소.”
그의 입에서 잔뜩 목이 멘 소리가 흘러나왔다.
묵용린에게는 낯설면서도 신기한 경험이었다. 여인의 손을 잡고 있는데도 아무런 증상이 나타나지 않다니.
그는 어쩌면 사봉봉이 자신의 병을 고쳐 줄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진왕의 말이 옳았다. 욕망은 감정을 따르는 법. 감정이 생기니 자연스레 갈망이 생겨났다. 비록 이러한 갈망이 그에겐 조금 괴롭게 느껴졌지만, 하늘이 노래질 만큼 구토를 하는 것보단 창자까지 다 게워 낼 것 같은 느낌보단 훨씬 더 좋았다.
잠시 뒤, 사봉봉이 말했다.
“되었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시지요. 서두르면 오히려 일을 그르칠지도 모르니, 천천히 해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녀는 말을 뱉으며 자신의 손을 빼냈다.
묵용린은 손이 텅 비자, 마음까지 비워지는 것 같았다. 그가 낙담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황상, 그만 돌아가셔야 합니다.”
사봉봉이 그를 일깨워 주었다.
묵용린은 아무 말 없이 느릿느릿 자리에 앉더니 이미 식어 버린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어찌 알았소?”
사봉봉은 황제가 의심이 많은 사람인 걸 알고 있기에 어쩔 수 없이 자리에 앉았다.
“신첩이 그때 황상을 몰아붙이지 않았습니까, 기억 안 나십니까?”
“기억하오. 하지만 그땐 그저 시험해 본 것이었을 터. 어찌 이리 확신할 수 있었소?”
“신첩은 그 당시만 해도 황상께서 신첩을 싫어하시어 신첩에게 가까이 접근하지 않으시는 줄 알았습니다. 나중에서야…….”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 허 귀비가 그날 했던 말을 알려 주었다.
“그래서 알게 되었습니다. 황상께서 신첩뿐만 아니라 다른 여인도 가까이 하시지 않는다는 것을요.”
묵용린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허 귀비도 이미 알고 있었다니, 하긴 벽요궁에서만 세 번이나 발병했으니 허 귀비가 그리 추측하는 것도 이상할 게 없었다.
“황상.”
사봉봉이 조심스럽게 그의 안색을 살폈다.
"황상, 마음 놓으십시오. 신첩이 다른 이에게 말할 일은 없을 겁니다. 허 귀비도 마찬가지고요.”
묵용린이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귀비는 그리하지 못할 테지. 하지만 황후는.”
그가 다시 말투를 누그러뜨리며 말했다.
“황후는 담이 크지 않소. 방금 짐은 죽음으로 황후의 입을 막아야 하는 건 아닌지 고민했소.”
사봉봉이 놀란 척 대꾸했다.
“황상께선 신첩을 죽이실 수 없습니다. 신첩에게 면사 금패가 있으니까요.”
“하면 금천아를 죽이면 되지. 그 애는 이미 짐에게 몇 차례나 불경을 저질렀으니, 그 빚을 조만간 갚는 셈 치고 말이오.”
“차라리 신첩을 죽이십시오. 그 애는 신첩 때문에 궁에 들어온 것이니까요.”
사봉봉이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황상, 어째서 꼭 신첩을 죽이시려는 겁니까. 신첩은 황상을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설마 황상께선 허 귀비에게 도움을 받고 싶으신 겁니까? 황상께선 허 귀비의 처소에서 세 번이나 증세를 보이셨습니다. 신첩이 감히 장담하건대, 귀비가 신첩만큼 병을 잘 치료하진 못할 겁니다.”
묵용린은 자화자찬을 늘어놓는 그녀의 모습에 웃음이 터졌다. 그가 손을 뻗어 그녀의 이마를 찌르며 말했다.
“황후가 언제부터 이리 번지르르하게 변했단 말이오?”
묵용린은 그녀의 이마를 찌르자마자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저 손을 한 번 잡았을 뿐인데, 이렇게 친밀하게 대하다니…….
사실 요즘 들어 두 사람은 정말 많이 친해졌다. 매일 만나 함께 바둑을 두고, 밥을 먹고 차를 마셨다. 이젠 손을 잡는 사이까지 발전했으니 비약적인 관계가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사봉봉은 그의 손길을 따라 고개를 기울이더니 곧 웃음을 터뜨렸다.
“황상, 청양 전하께도 늘 이러십니까?”
묵용린도 그녀를 따라 웃음을 터뜨렸다.
“계속 이리 나온다면 앞으로 청양한테는 하지 않고 황후만 찌르겠소.”
두 사람은 아무 거리낌 없이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이 마치 다년간 정을 나눈 오랜 벗 같았다.
묵용린은 사봉봉의 반짝이는 눈을 바라보며 마른침을 삼키곤 다시 손을 내밀었다.
“다시 한번 잡아 봐도 되겠소?”
사봉봉은 군말 없이 그의 손에 자신의 손을 포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