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41화
궁녀 은령은 그녀가 궁으로 데려온 시종이었다. 어릴 때부터 함께 지내온 탓에 은령도 어느 정도 시를 이해했다. 가까이 다가온 은령이 시구를 바라보더니, 멍한 표정으로 물었다.
“마마, 누가 저희를 봤나 봅니다.”
송교는 늘 재능이 뛰어난 사람을 좋아했기에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봤으면 어떠냐. 우리가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닌데. 복숭아나무 숲에서 그네를 타는 것도 안 된단 말이야?”
그녀가 손수건을 내려놓을 생각이 없어 보이자 은령이 말했다.
“마마, 근본을 모르는 물건이니 만지지 마시어요. 어쩌면 누군가 다시 찾으러 올 수도 있잖아요?”
송교는 여전히 통속적인 시에 빠져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봉황」이란 단어를 넣은 건 부적절하구나. 황후 마마만 이 단어를 쓸 수 있잖느냐. 너무 부주의한 사람이로구나.”
그녀가 손수건을 소매에 넣으며 말했다.
“오늘은 그네를 타지 않을 것이다. 그만 가자.”
은령은 자신의 주인을 바라보며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엔 그만두었다.
그녀의 주인은 궁에 들어온 뒤 투명 인간처럼 지냈다. 몇 달이나 지났지만 황제는 마마를 만나 주지도 않았고, 황후 또한 그녀에게 문안을 오지 말라고 했다.
마마 또한 굳이 시비를 일으키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대부분 자신의 처소에서 홀로 지냈다. 이따금 날씨가 좋을 땐 밖을 거닐었는데, 이 복숭아나무 숲도 그때 우연히 발견한 곳이었다. 조용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던 마마는 그 이후로 이곳을 자주 찾았다.
지금까지는 한 번도 누군가를 만난 적 없었는데, 오늘은 어쩐 일인지 손수건을 주웠다. 생각해 보면 그리 큰일도 아니기에, 은령은 자신의 주인이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 두기로 했다.
송교는 자신의 궁으로 돌아와 은령에게 먹과 붓을 준비하라고 분부했다.
은령이 그것들을 가져오자, 그녀는 붓을 들고 봉황을 뜻하는 ‘봉鳳’자를 ‘화花’자로 바꾸었다. 덕분에 시는 꽃이 그네를 뛴다는 내용으로 바뀌었다. 속뜻은 별반 차이가 없었지만, 훨씬 안전했다. 혹 누군가 그 시를 발견하더라도 성가실 일이 없기 때문이다.
글자를 고친 뒤 먹물을 말린 그녀는, 아직 여운이 가시지 않았는지 잠시 고민하고는 시의 마지막 구절 밑에 두 문장을 더했다.
「오랜 시간 아무도 발길을 주지 않아, 안개 낀 개울물이 차디차구나. 바람이 불어오면 꽃잎 떨어져, 그대는 꽃을 볼 수 없네.」
그리고 그녀는 손수건을 발견했던 곳에 도로 갖다 놓았다.
* * *
얼마 지나지 않아 묵용성이 다시 숲을 찾았다. 그는 혹여 운 좋게 그 가인을 또 만나진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고 찾아왔지만, 가인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실망을 금치 못하고 손수건을 다시 집어 들었다.
그 순간,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가인이 그의 시에 두 줄을 더해 준 것이다.
그는 가슴이 벅차올라, 당장 그 가인 앞에 달려가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고 싶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녀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복숭아나무 숲에서 한나절을 서성이던 그는 결국 자신의 처소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손수건을 곱게 접은 그는 그것이 보물이라도 되는 양, 꼭 움켜쥐었다.
기분이 좋았던 그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헤실헤실 웃으며 걸어가는데 누군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고개를 들자, 그의 미소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그는 황급히 읍하며 예를 갖췄다.
“황형.”
묵용린은 자신의 아우를 위아래로 훑었다. 아우의 심성은 그가 누구보다 잘 알았다. 묵용성의 표정에 그는 괜스레 불안해졌다. 사실을 캐묻지 않으면 두 발 뻗고 잘 수 없을 것 같았다.
“어디서 오는 길이냐?”
“아무 데도 가지 않았습니다. 그, 그저, 좀 거니는 중이었습니다.”
“손에 든 건 무엇이냐?”
“날씨가 더워서 땀을 닦으려고 손수건을 가지고 다녔습니다.”
묵용성은 그렇게 말하면서 무의식적으로 손수건을 소매 속으로 밀어 넣었다.
묵용린은 싸늘한 눈빛으로 그의 행동을 지켜보다가 손바닥을 펼치며 말했다.
“짐에게 보여 주거라.”
묵용성은 꿈쩍도 하지 않았지만, 황제의 위엄에 숨도 제대로 쉬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잠시 뒤, 그는 꾸물거리며 손수건을 황제에게 건넸다.
묵용린은 곧장 손수건을 펼쳤다. 순간, 그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두 사람의 필체로 시가 쓰여 있기 때문이었다. 앞부분은 물어볼 것도 없이 묵용성의 필체였고 뒷부분은……. 누구의 필체인지 알 수 없었지만 훌륭했다.
그는 사봉봉의 필체를 이미 본 적 있었다. 그녀를 닮아 무척이나 깔끔하고 참한 필체였다. 사봉봉이 아니니 되었다. 사봉봉이 아닌 다른 사람이라면, 그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는 묵용성에게 손수건을 돌려주며 몇 마디 훈계를 덧붙였다.
“하루 종일 이런 것들만 탐구하지 말고 경서나 읽거라.”
묵용성은 고개를 숙인 채 연신 알겠다고 답했다.
묵용린이 손을 흔들자, 그는 대사면을 받은 사람처럼 황급히 자신의 궁으로 돌아갔다.
묵용린은 계속 앞으로 걷다가 길목에 다다라 서쪽으로 향했다. 두 채의 적막한 궁전을 더 지나면 냉궁이었다.
그는 걸음을 늦추고 잠시 머뭇거렸다.
그날 묵용성에게 그런 얘길 듣고 난 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승덕전으로 돌아오고 나서도 한참 동안 넋을 놓았고, 예전에 진왕이 해 주었던 말을 생각했다.
예전에 그는 진왕에게 누군가를 좋아하는 건 어떻게 아냐고 물었다.
진왕은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자꾸만 그 여인이 생각나고 그 여인을 매일 자신의 시야에 두고 싶어질 거라고 했다.
또한 그녀가 눈앞에 있어도 보고 싶고, 그녀를 볼 때마다 기분이 좋아지며 그보다 더 그녀를 기쁘게 해 주고 싶어질 거라고도 했다.
그녀가 무얼 좋아하는지 알고 그녀를 위해 온 마음을 다해 그녀가 좋아하는 걸 준비하고, 그녀가 싫어하는 건 최대한 조심하고 피하려 하는 것. 그녀와 함께한 모든 일들을 기억하는 것 등등…….
당시 그는 진왕의 말을 듣고 소름이 오소소 돋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의 마음이 진왕이 말한 모든 것에 해당된다는 걸 깨닫자 일순간 넋이 나가 버렸다.
그는 자신이 왜 매일 냉궁으로 찾아가는지 알지 못했다. 어떤 땐 오후에 이미 다녀왔는데도 밤에 또다시 찾아가고 싶기도 했다.
그저 그녀와 함께 있고 싶었다. 아무 말 하지 않아도, 그냥 그녀와 조용히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좋았다.
그녀가 출궁했던 그날 밤, 그는 그녀의 처소 앞에서 오랜 시간 배회했다. 당장 그녀를 데려오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하는 게 안타까울 정도였다.
그의 아우가 사부에서 밥을 먹었단 사실을 알고 난 뒤엔, 그는 성질을 부리는 아이처럼 사부로 찾아가 밥을 한 끼 얻어 먹었다.
분명 여인과 접촉할 수 없는데도 그녀의 손을 잡고 싶었다. 그녀를 품에 안으면 어떤 기분이 들지도 궁금했다.
그는 자신이 거의 미쳐간다고 생각했다. 조회를 할 때도, 밥을 먹을 때도 그녀가 보고 싶었다. 그뿐만 아니라 상주서를 읽을 때도, 침소에 들 때도…….
묵용린은 고개를 들고 한숨을 내쉰 뒤,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 계속 이럴 수는 없었다. 그는 이성적인 두뇌를 가진 영명한 황제다. 자신만의 신념이 굳건하고 큰 뜻을 품고 있는 그가, 어찌 연정의 늪에 빠져 태평성세라는 대업을 망칠 수 있겠는가?
‘아니 된다. 아니 돼.’
그가 고개를 저으며 걸어갔다. 자신마저 태상황의 전철을 밟을 수는 없었다. 절대!
그는 피처럼 새빨간 석양 속을 하염없이 걸었다.
붉은 석양빛은 전당 사이로 서서히 내려앉으며 연기가 피어오르듯 주변을 에워쌌다. 연기는 마치 실재하듯 그의 몸을 감쌌기에 발걸음을 내딛기 힘들었다.
그는 별안간 사희에게 냉궁에서 황후와 함께 어선을 들겠다고 분부한 일이 떠올랐다. 시간을 따져 보니, 지금쯤이면 냉궁에서는 어선을 차렸을 터. 게다가 그가 가지 않으면 황후는 차마 젓가락도 들지 못할 것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친 그는 그 자리에 서서 기나긴 탄식을 내뱉고는 다시 냉궁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는 자신을 위해 속으로 해명을 늘어놓았다.
‘짐의 말은 중천금이니, 약속한 일은 반드시 지켜야 하는 법. 그저 황후와의 마지막 식사라 생각하자. 그리고 앞으로는 스스로를 더 엄히 다스려야겠다. 태상황의 뒤를 밟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절대.’
다시 돌아선 그의 발걸음은 한결 가벼웠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날이 완전히 어두워지기 전에 냉궁에 도착했다. 궁 문을 열자 사봉봉이 복도에 서 있었다.
그를 보자마자 곧장 빙그레 웃는 그녀의 모습에, 그는 잠시 넋을 놓았다. 마치 온몸에 온기가 퍼지는 것 같았다. 방금까지만 해도 복잡했던 마음이 이상하리만치 안정되었다.
묵용린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유난히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짐을 기다렸소?”
“네.”
사봉봉이 고개를 끄덕였다.
“신첩, 황상께서 곧 도착하실 것 같아 밖에서 기다렸습니다.”
“입추가 지나 바람이 차오. 다음엔 밖에 나와 있지 마시오. 바람을 쐬다 감기에 걸릴지도 모르니.”
묵용린은 자기가 뱉은 말에 자신이 더 놀랐다. 그녀와의 정을 끊겠다고 결심해 놓고, 지금 무얼 하고 있단 말인가…….
그의 반응이 조금 의외인 건 사봉봉도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신첩, 밖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황제와 함께 안으로 향한 그녀는 문으로 들어설 때 슬쩍 몸을 틀었다. 묵용린이 먼저 들어가게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묵용린 역시 그녀가 앞장설 수 있도록 양보하는 바람에, 두 사람은 결국 문틈에 몸이 끼이고 말았다.
그 익살스러운 장면에, 방 안에 있던 시종들은 고개를 숙이고 웃음을 참느라 애썼다.
사봉봉은 조금 민망했지만, 그래도 묵용린을 먼저 들여보내기 위해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황제는 그저 황망한 표정만 짓고 있을 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먼저 문턱을 넘었다.
묵용린이 멍하니 서 있던 건 사봉봉의 몸 전체가 그에게 닿았기 때문이었다. 그저 측면이 닿았을 뿐이지만, 머리털이 쭈뼛 서고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기분이었다. 대체 그가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다행히 그건 그저 아주 작은 소란이었기에, 감히 그를 비웃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었다.
방으로 들어간 그는 누구보다 존귀한 황제의 모습을 되찾았다.
음식은 이미 다 차려져 있었다. 황제와 황후가 자리에 앉자, 옆을 지키던 시종들은 평소와 달리 멀찍이 물러났다. 월규 고고의 분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직접 냉궁으로 찾아온 건 아니었지만, 시종들에게 황제와 황후의 시간을 방해하지 말라며 눈치껏 행동하라고 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