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40화
후원에 도착하니, 정원에 석류와 파초가 심어져 있었다.
석류나무는 푸른 잎으로 뒤덮였고 넓은 파초 잎에는 반짝이는 홍초 하나가 뻗어 있었다. 계단 양쪽에는 커다란 월계화가 피었는데 분홍색, 하얀색, 노란색, 빨간색 꽃송이가 산들바람에 흔들리며 생기를 더했다.
묵용린은 꽃을 보니 처음 사봉봉을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 그녀는 궁에서 꽃을 꺾고 있었고, 그가 그런 그녀를 호되게 혼냈었다. 지금 돌이켜 보니, 자신의 행동이 너무 뜬금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만나자마자 어째서 그리 그녀를 싫어했을까?
사봉봉이 문을 밀더니 고개를 돌려 그를 불렀다.
“황상, 들어오십시오.”
묵용린은 정신을 차리고 계단을 올라 방 안으로 들어갔다.
난생처음 규방에 들어간 그는 마음이 조금 들떴다. 사봉봉과 원탁 하나를 사이에 두었지만, 그럼에도 그의 심장은 그가 제어할 수 없는 수준으로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와 함께한 지도 이미 오래인지라 이런 감정에도 제법 익숙해진 그는, 예전처럼 당황하는 대신 조심스럽게 자신의 감정을 숨기며 방 안을 살폈다.
방은 별로 특별할 게 없었고, 그녀를 닮은 듯 간단하고 단아하게 꾸며져 있었다. 향을 피우지 않았는데도 공기 중에 옅은 향기가 났다.
창문은 반쯤 열렸으며, 위쪽에는 대나무로 만든 작은 바람개비가 꽂혀 있었다. 바람개비는 알록달록한 색지로 꾸며졌는데, 바람이 불어오면 휙휙 돌아갔다. 이 방과는 조금 어울리지 않았다.
황제가 바람개비를 바라보자 사봉봉이 웃으며 설명했다.
“소타가 꽂아 둔 것입니다.”
묵용린이 말없이 미소를 지었다.
어쩐지 소타가 그녀를 좋아하더라니. 다른 사람이었다면 곧장 바람개비를 빼내어 버렸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녀는 정을 중시하기에 그리하지 않았다.
* * *
사부에서 점심 식사를 마친 묵용린은 사봉봉을 데리고 궁으로 돌아왔다. 사람들의 주의를 끌지 않기 위해 그가 타고 왔던 가벼운 어가를 탔다. 내부 공간이 넓지 않았기에 두 사람은 나란히 붙어 앉아야 했다. 그에게는 엄청난 시험인 셈이었다.
그는 자신의 병을 잘 알고 있었다. 신체적 접촉만 없으면 태연하게 행동할 수 있었기에 남들도 그의 이상한 점을 눈치채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등에서 끊임없이 땀이 흐르는 탓에 옷이 달라붙어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얼굴이 자꾸만 뜨거워졌고 호흡도 가빠졌다.
그는 사봉봉이 눈치챌까 봐 최대한 호흡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그런데 이렇게 억누르려 할수록 더욱더 불편해지기만 했다.
어가 안은 쥐 죽은 듯 고요해서, 작은 기척도 유난히 크게 느껴졌다.
묵용린은 사봉봉이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부단히 노력했지만, 그녀는 결국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그녀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황상, 안색이 좋지 않습니다. 어디 불편하십니까?”
묵용린이 고개를 저었다.
“짐은 괜찮소.”
사봉봉이 잠시 고민하더니 어가 벽에 기대어 그와 거리를 벌렸다.
묵용린은 그녀의 행동을 바라보더니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그의 마음을 헤아려서 한 행동인데, 그는 어쩐지 달가워하지 않는 듯했다.
어렵사리 궁에 들어선 뒤, 중문을 지나자 사봉봉이 그에게 말했다.
“황상. 신첩, 점심을 많이 먹은 듯하여 잠시 걷고 싶습니다.”
묵용린이 어찌 그녀의 의중을 알아차리지 못할까.
“짐도 마침 걷고 싶던 참이었소.”
결국 어가를 세운 두 사람은, 어가에서 내려 유유자적한 자태로 궁 안쪽을 향해 걸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묵용성이 앞쪽에서 바삐 걸어왔다. 사봉봉을 바라본 그는 눈을 반짝이더니, 묵용린에게 시선을 옮기자마자 기쁨에 찬 표정을 거두고 공손히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
묵용린은 그렇지 않아도 어젯밤 그가 사부에 갔던 일을 가슴에 새겨 두고 있었다. 게다가 사봉봉을 보자마자 눈을 반짝이는 걸 보니, 묵용성은 아직도 그녀에 대한 마음을 단념하지 못한 듯했다.
자연스레 안색이 굳어진 그가 날 선 목소리로 물었다.
“어딜 그리 급히 가느냐?”
묵용성이 답했다.
“신제, 육황숙 댁에 가는 길입니다.”
“육황숙을 따라 새를 끼고 꽃밭을 돌려고?”
사봉봉 앞이라 묵용린은 함축된 표현을 썼지만, 묵용성은 황형이 말하는 새와 꽃밭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아들었다. 당황스러웠지만 감히 반박할 수도 없었기에, 그는 나무토막처럼 그 자리에 꼿꼿이 서 있었다.
묵용린은 지난번에 그가 분명하게 말하지 않아, 어리석은 아우가 여전히 환상을 품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무 데도 가지 말거라. 짐이 네게 할 말이 있으니.”
사봉봉은 계속 옆에 서 있을 수 없어 예를 갖춘 뒤, 먼저 물러났다.
묵용린은 그녀가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엔 자신도 자각하지 못하는 다정함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시선을 거두자마자 그는 곧장 서리가 낀 듯 차가운 표정으로 물었다.
“어제 사부에 갔었느냐?”
묵용성이 흠칫 떨었다. 좋지 못한 예감이 들었지만 차마 거짓을 고할 수는 없었다.
“예.”
“가서 무얼 했느냐?”
“별, 별다른 건 하지 않았습니다. 다 같이 가는 거라, 그래서 신제도…….”
“다들 갈 수 있어도, 넌 갈 수 없다. 그것도 모른단 말이냐? 초청을 받지 않았을 땐 물론이거니와, 받았다 한들 가선 안 된다. 의심을 피하는 것도 모르는 것이냐?”
묵용성이 웅얼거리며 대답했다.
“황형, 오, 오해십니다. 신제, 황수께…….”
“황수께, 뭐?”
묵용린은 가차없이 그를 몰아붙였다.
“방금도 보았다. 황후를 보자마자 눈이 휘둥그레지더구나. 한데도 짐을 속이는 것이냐?
지난번 봉명궁에서 짐은 그저 널 조금 일깨워 주려고 분명하게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은 전부 말해야겠구나.
사봉봉은 황후이자 짐의 아내다. 그런 그녀와 접촉하는 것은 물론, 그녀를 생각하는 것도 아니 된다. 만약 그리하거든, 네 머리를 두들겨 팰 것이다. 알겠느냐?”
묵용성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황형, 혹…….”
묵용린이 그의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
“혹 뭐?”
“황형, 혹 황수를 좋아십니까?”
“짐의 일에 네가 관여할 필요 없다.”
묵용린이 뒷짐을 진 채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네 자신이나 신경 쓰거라. 또한 오늘부터 출궁을 금하니, 궁에 얌전히 틀어박혀 있거라.”
말을 마친 그는 묵용성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소매를 뿌리치며 자리를 떴다.
홀로 남은 묵용성은 그 자리에 서서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는 진왕야를 따라 풍류가 넘치는 곳을 돌아다니면서 남녀 간의 정에 대해 깊이 연구했다. 황형은 분명 사봉봉에게 연정을 품은 것이다!
그는 하늘을 바라보며 탄식을 내뱉었다. 이제 정을 끊어야 할 때라는 건 그도 알고 있었다. 황후와 사이가 좋지 않을 때면 황제는 늘 사봉봉을 업신여겼다. 그는 사봉봉이 걱정되어 좀처럼 마음을 놓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황제가 연정을 품었으니 사봉봉을 지켜 줄 테고, 이제 더는 그가 상관해선 안 되었다.
응당 포기해야 하지만 그건 말처럼 쉽진 않은 일이었다. 그는 서글프고 울적했다.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운명의 장난이 미웠고, 사봉봉과 자신의 연이 닿지 않는 게 싫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앞으로 걸어갔다. 그의 몸이 꼭 구름 위를 걷듯 비틀거렸다. 높게 뜬 태양이 그를 처량하게 내리쬐었다.
어릴 때부터 쌓아 온 정을 버리는 건 살을 베는 듯 고통스러웠다. 그 통증에, 묵용성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햇살이 너무 눈부셔서 손으로 얼굴을 가린 그는 한참 동안 슬픔을 억눌렀다.
한참 뒤, 손을 내린 묵용성은 자신이 길을 잃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궁에서 자랐음에도 길을 잃다니, 남들이 들으면 퍽 우스운 일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정말 와 본 적이 없었다.
앞쪽에는 작은 연못이 보였고 주변엔 갈대가 자라 있었다. 잔잔하고 고요한 연못 표면은 비취처럼 녹색빛을 띠었다.
왼쪽은 복숭아나무 숲이었다. 꽃은 이미 떨어진 지 오래였고, 푸르스름한 작은 과실이 가지 끝에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잎이 무성할 만큼 나무가 빼곡히 들어선 숲이었다.
그는 평소 걸어 봤자 매화 숲이나 명호 주변을 거닐었다. 그런 곳은 전문적으로 관리하는 인력이 있었기에 언제나 풍경이 뛰어났다.
하지만 이곳은 오는 이가 적은 것인지, 별로 잘 가꾸어진 상태가 아니었다. 연못가에는 오물이 떠다녔고 숲에 난 오솔길은 슬쩍 보기에도 보수가 오랫동안 이루어지지 않은 듯했다.
상심한 그는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기에, 숲에서 잠시 시간을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결국 그는 걸음을 내디뎌 비탈길 위로 올라갔다.
오솔길은 역시나 방치되어 있었다. 바닥에 깔린 돌 틈으로 잡초가 무성히 자라났는데, 짙푸른 녹음이 오솔길을 덮은 게 오히려 제법 잘 어울렸다.
잠시 걸어가던 그는 별안간 누군가의 말소리를 들었다. 여인의 목소리였는데, 냇물이 졸졸 흐르듯 듣기 좋았다.
그는 호기심에 까치발을 들고 나무 뒤로 몸을 숨긴 뒤, 고개를 내밀었다.
순간 그는 넋을 잃었다.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커다란 나무 아래에서 어여쁜 가인이 그네를 타고 있었기 때문이다.
청초한 얼굴을 가진 가인은 맑게 빛나는 두 눈으로 활짝 웃고 있었다. 볼 양쪽에는 자그마한 보조개가 패였고, 붉은 입술을 오므렸다 벌렸다 하며 옆에 있는 궁녀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뭐라고 하는지는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귓속으로 흘러들어 온 그녀의 목소리가 마치 그의 심장을 꽉 움켜쥐는 듯했다.
어린 궁녀는 짓궂은 성격인지, 있는 힘껏 그네를 밀었다.
가인은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꼭 어린 사슴처럼 잔뜩 겁이 난 표정이었다. 하지만 높게 올라 갔다 내려올 땐 또다시 활짝 웃었고, 어린 궁녀의 행동을 탓하지 않았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묵용성은 넋을 놓고 지켜보았다.
궁에 있는 여인은 노비거나 후궁의 비빈이었다. 그는 모든 비빈을 만나 보았지만, 저 여인은 본 적 없었다. 그렇다면 대체 저 여인은 누구란 말인가?
그는 그녀가 누구일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 여인의 일거수일투족을 눈에 담았다. 찌푸렸다 웃었다 하는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방금 전까지 괴로웠던 가슴이 또다시 뛰는 것 같았다.
* * *
이튿날 다시 복숭아나무 숲을 찾은 송교는 그네 옆 나뭇가지에 손수건이 걸려 있는 걸 발견했다. 그녀는 궁녀가 떨어뜨린 것이란 생각에 가까이 다가가 집어 들었다.
새하얀 손수건을 펼쳐 보니, 구름 모양 무늬와 글자가 수놓아져 있었다. 보아하니 신분이 꽤 높은 자가 흘린 듯했다.
그녀는 궁금한 마음에, 거기 적힌 글자를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노을은 연못을 비추고, 복숭아 열매는 푸른빛을 뿜는구나. 가을바람은 서늘한데 봉황이 그네를 뛰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