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39화
이 얘기가 나오니 사앵앵은 자연스럽게 사금언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네 아우도 올해 혼인을 해야 할 나이인데, 이 어미는 줄곧 소타를 눈여겨보고 있단다. 가 대인과 네 아버지가 형제처럼 친분이 두터운 동향이잖니. 가 부인도 성격이 좋고 아이들끼리도 서로 친분이 두터우니, 이렇게 가까운 집안과 혼사를 치르는 것만큼 좋은 게 어디 있다고. 한데 네 아우는 부마가 될 생각을 접지 못하는구나.
도무지 그 꿈에서 헤어 나오질 못한다니까. 청양이도 물론 좋은 여인이지. 우리 집을 위해 큰돈도 내어 주었으니 그 은혜는 어미도 평생 잊지 않을 거다. 하지만 우리 금언이와는 정말 어울리지 않아. 정확히는 금언이가 청양에게 어울리지 않지.
한쪽만 저리 열을 올리고 한쪽은 관심도 없는데, 저러다 결국 금언의 마음만 다칠까 봐 걱정이구나. 저 애가 겉으로 보기엔 건성인 것 같아도, 한번 마음을 뺏기면 황소가 끌어도 헤어 나오지 못하거든.”
사봉봉이 말했다.
“금언의 마음은 저도 대충 알고 있어요. 조금씩 고민하다 보면 제 스스로 단념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저 애가 끝까지 고집을 부린다면 제가 한번 얘기해 볼게요.”
“그래, 저 앤 내가 잔소리를 한다며 매번 이 얘기만 나오면 짜증을 내잖느냐. 네가 한번 잘 얘기해 보렴.”
사봉봉이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만약 금언이 정말 가부와의 혼사를 원치 않는다면, 강요하지는 마시어요. 다른 이로 다시 물색해 보면 되니까요. 임안성에 혼기를 앞둔 여인은 많으니까 분명 좋은 신붓감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알았다.”
사앵앵이 딸의 손을 토닥였다.
“네 말대로 하마.”
딸이 돌아오니 그녀에게는 기댈 기둥이 생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예전처럼 결정하기 어려운 일이나 해결하기 성가신 일을 전부 다 사봉봉에게 맡겼다. 어쨌든 사봉봉은 일을 적절히 잘 처리할 실력이 있기 때문이었다.
가소타가 다녀간 뒤로, 사봉봉이 사부에 왔다는 소식을 제법 많은 이들이 알게 되었다.
묵용청양은 소식을 듣고 곧장 사부로 달려왔다. 궁 안에서도 사봉봉을 자주 보긴 하지만 밖에서 만나는 건 좀 다른 느낌이었다. 지켜보는 이들도 없었고 말을 조심할 필요도 없기에 편안하기 그지없었다.
그렇게 몇 사람이 모여 재잘재잘 이야기를 나누는데, 소식을 들은 묵용성까지 찾아왔다. 예전엔 사부에 자주 드나들던 손님인지라 시종들도 그를 알아보고 곧장 공손히 인사를 건넨 뒤, 안으로 안내했다.
저녁에는 가소타가 가난청을 데리고 찾아왔고 얼마 뒤, 영안도 합류했다.
이들은 정원 곁채에 상을 펼치고 왁자지껄 떠들며 함께 술을 마셨다. 어린 시절 함께 놀던 동무들이 다 모인 덕에, 이번 사건으로 인한 암담한 기운도 제법 옅어졌다.
* * *
사부에서 떠들썩한 연회가 열리던 시각, 묵용린은 어둠 속 낡은 처소를 바라보며 넋을 놓고 있었다. 사봉봉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걷다 보니 어느새 이곳에 다다랐다. 마치 몸에 밴 습관처럼 매일 한 번씩 이곳을 찾아와야 마음이 편안해졌다.
하지만 저리 텅 빈 처소를 바라보니 마음이 헛헛하기만 했다. 순간 그는 사봉봉에게 하룻밤 자고 오라고 한 게 후회스러웠다.
밤바람은 쌀쌀했지만, 달빛은 옥처럼 밝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은쟁반 같은 달을 올려다보았다. 마음이 너무 어지러웠다. 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이란 말인가? 그녀가 없으니 넋이 나간 사람처럼 불안하고 허전했다.
사봉봉이 냉궁에 들어간 후, 두 사람의 사이는 오히려 예전보다 더 좋아졌다. 매일 얼굴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었고, 바둑을 두었다. 이따금 서로 눈을 마주치며 웃기도 했다. 그런 것들이 그에게는 일종의 기쁨이었다.
많이 만날수록 그는 사봉봉의 좋은 점을 더 많이 발견했다. 그 여인은 대놓고 자신을 드러내진 않았지만, 그에게 늘 새로운 면을 보여 주었다. 마치 숨겨진 보석처럼 캐내면 캐낼수록 즐겁고 놀라웠다.
다만…….
그가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녀 때문에 가슴이 여러 차례나 아픈 것은 대체 무슨 이유 때문이란 말인가?
이튿날 아침, 조정 대신들은 또다시 간언을 늘어놓았다. 황제에게 사장풍과 사가 상호에 죄를 물어 풍파를 잠식시킬 것을 청하는 것이었다.
묵용린은 침착히 옥좌에 앉아 있었다. 그들의 말은 전혀 귀담아듣지 않고 그들이 소란을 피우게 내버려 두었다. 얼추 시간이 되자, 그가 왕장량에게 퇴조를 외치라 분부했고 단폐를 내려가 뒤쪽으로 향했다.
가난청이 그를 쫓아왔다.
“황상, 무슨 근심이라도 있으십니까?”
“음?”
“아래에서 지켜보니, 황상께선 줄곧 다른 걸 생각하고 계신 듯 보였습니다. 대신들의 말은 거의 듣지 못하셨지요?”
묵용린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짐이 듣고 싶지 않은 말이었다.”
“황상께선 어찌 처리하실 생각이십니까?”
“환경문에 맡겼으니, 영안을 믿고 기다릴 것이다.”
가난청이 잠시 망설이다 말했다.
“황상, 죄를 선고하지 않으시는 이유가 혹 황후 마마 때문입니까?”
“짐은 다른 이의 체면을 봐주지 않는다. 환경문에서 사건을 조사하여 보고하면, 짐은 그 결과만 믿을 것이다.”
“어제 황후 마마께서도 그리 말씀하셨지요. 황후 마마와 황상께선 같은 생각이시군요.”
묵용린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어제 황후를 만났느냐?”
“예, 황후 마마께서 모처럼 사부에 오셨으니, 다들 함께 모여 식사를 하였습니다.”
묵용린이 대수롭지 않은 척 물었다.
“또 누가 모였길래?”
“신과 신의 누이, 장공주 전하, 영안, 그리고 성 전하께서도 오셨습니다.
묵용린은 마지막에 들리는 이름에, 미간을 찌푸렸다가 금세 풀었다. 그러나 가는 길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승덕전으로 들어선 그가 왕장량에게 물었다.
“황후가 언제쯤 돌아온다 하였지?”
왕장량이 속으로 황제의 뜻을 헤아려 본 뒤, 대꾸했다.
“마침 소인이 황후 마마를 모셔 오라고 사람을 보내려던 참입니다.”
묵용린이 뒷짐을 진 채 난간 아래에 자란 계수나무를 바라보았다. 아직 꽃이 필 땐 아니었지만 가지 끝에 쌀알만큼 자그마한 꽃봉오리가 맺혀 있었다. 그가 잠시 꽃봉오리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한동안 출궁하지 못해 잠시 밖을 둘러보고 싶구나. 오는 길에 황후도 데려오고.”
왕장량이 곧장 허리를 숙여 답했다.
“예, 황상. 소인이 곧장 준비하겠습니다.”
황제의 출궁은 어제 황후가 사부에 가는 것처럼 대대적인 행렬과는 견줄 것이 못 되었다. 황제는 늘 조용히 출궁해야 하기 때문이다.
가벼운 어가 한 대에 가까운 시위들, 영십칠과 두 암위만이 황제를 따라갔다.
금군들은 아직 사부를 둘러싸고 있었다. 웬 마차가 저택 앞으로 다가오자, 금군은 곧장 어가 앞을 가로막았다.
사희가 요패를 꺼내어 흔드니, 놀란 금군 수장이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추며 서둘러 길을 텄다.
아무도 황제가 왔다는 사실을 고하지 않았기에, 묵용린이 안으로 들어서자 그를 알아보지 못하는 사부의 종들은 멍한 표정으로 바라만 보았다.
복도에서 걸어오던 경화가 황제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 그를 불렀다.
사앵앵 역시 그제야 황제가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봉봉도 화들짝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서둘러 황제를 맞이하러 밖으로 나오니 느긋하게 걸어오는 묵용린의 모습이 보였고, 어머니는 정신을 차리지 못해 넋을 놓고 있었다.
그녀가 서둘러 사앵앵을 끌고 앞으로 걸어가 함께 황제를 맞이했다.
사봉봉이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추자, 묵용린이 곧장 부축하듯 손을 뻗었다.
“예를 갖출 것 없소.”
사앵앵은 묵용린에게 원한도 있고, 자신이 웃어른이라는 이유로 예를 갖추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사봉봉이 끊임없이 눈짓을 보내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허리를 굽혔다. 무릎을 굽혀 제대로 예를 갖추려는데, 묵용린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렸다.
“예를 면하오.”
황제는 자신만의 계산이 있었다. 규율대로라면 선국후가先國後家이기에 사앵앵이 먼저 그에게 예를 갖춘 뒤, 그 또한 그녀에게 답례를 해야 했다. 하지만 두 사람 다 예를 갖추고 싶어 하지 않으니 누구도 예를 갖추지 않는 편이 나았다.
사봉봉은 그들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가서는 경화에게 차를 내오라고 분부한 뒤, 묵용린에게 물었다.
“황상, 무슨 일로 이곳까지 찾아 주셨습니까?”
방 안을 둘러보던 묵용린은 동월 최고 갑부의 방이 평범한 부호들의 방과 별로 다를 게 없다는 걸 깨달았다. 딱히 사치스럽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그가 고개를 저으며 대꾸했다.
“아무 일도 없소. 잠시 출궁하여 밖을 둘러보는데, 황후도 이제 환궁해야 하니 함께 가려고 왔소.”
사봉봉은 속으로 시간을 대략 계산해 보았다. 황제가 조회를 마치고 사부로 찾아온 지금까지 한 시진도 채 지나지 않은 걸 보면, 출궁하자마자 곧장 이리로 향했을 터. 설마 그녀가 도망이라도 칠까 봐 찾아왔단 말인가?
옆에 서 있던 사앵앵은 환궁이라는 말에 서운함을 감출 길 없었다.
“곧 식사 시간인데, 황상께서 괜찮으시다면 식사라도 들고 가시지요.”
묵용린은 사실 그럴 생각으로 찾아온 것이었다. 가난청이 어젯밤 사부에서 다 함께 식사를 했다는 말에 마음이 불편했던 그는 성질을 부리는 어린아이처럼 자신도 이곳에서 식사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고개를 들어 사봉봉을 바라보니, 그녀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기대가 가득 찬 그녀의 눈망울에 그는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리며 다정하게 말했다.
“짐이 번거롭게 하는 게 아니라면, 그리하겠소.”
사앵앵은 흠칫 놀랐지만, 서둘러 활짝 미소를 지었다.
“번거롭다니요. 황상께서 기꺼이 찾아 주신 것만으로도 저희에겐 엄청난 영광입니다. 그…….”
그녀는 엄청난 은혜를 입은 기분에, 서둘러 밖으로 나가 하인을 불렀다.
“어서 주방에 가서 준비하라 이르거라. 음식을 많이 만들어서…….”
황제의 시선이 황급히 뛰쳐나가는 사앵앵의 모습을 좇자, 사봉봉이 웃으며 말했다.
“황상, 개의치 마시어요. 신첩의 모친께서 성격이 워낙 급하셔서 그렇습니다.”
“개의치 않소.”
묵용린이 말했다.
“사 주인장은, 참 좋소.”
“…….”
황제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오니 왠지 모르게 진담 같지 않았다. 그가 그녀의 어머니를 칭찬하다니?
묵용린은 자신을 바라보는 사봉봉의 시선에, 부자연스럽게 창문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더니 별안간 그녀에게 물었다.
“황후는 어디에서 지냈소?”
사봉봉이 말했다.
“신첩의 규방은 뒤쪽에 있습니다.”
그의 의도를 추측했는지 그녀가 웃으며 물었다.
“가서 보시겠습니까?”
묵용린이 태연한 척 헛기침을 했다.
“어차피 할 일도 없으니 한번 가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사봉봉이 빙그레 웃으며 길을 안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