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38화
묵용린이 찻잔을 매만지며 한참 뒤에야 대답했다.
“짐은 어린 시절, 사 주인장이 모함을 당했던 일을 아직 기억하고 있소. 당시 관원이 사 주인장을 데려갔는데, 사 장군이 성 밖 주둔군에서 소식을 듣고는 말을 타고 돌아와 홀로 수십 명의 관원을 막아섰었지. 사 장군은 절대 처자식을 버리고 혼자 살겠다고 도망칠 사람이 아니오.”
사봉봉은 그의 말이 좀 뜻밖이었다.
“황상께서도 그 일을 알고 계셨습니까?”
“그래, 가 대인이 말해 줬소.”
“신첩의 모친과 그자 사이엔 해묵은 앙심이 있었지요. 그자가 모친을 끌고 가자 부친께서 뒤를 쫓았고, 결국엔 구하셨습니다.
지금껏 부친께서는 늘 모친을 가장 걱정하셨습니다. 이번에도 분명 모친께 문제가 생겼단 소식을 듣고 조급한 마음에 임안으로 돌아오시는 게 틀림없어요. 다만 혹여…….”
사봉봉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더니 결국 그녀는 슬픔 감정이 북받쳐 또다시 눈시울을 붉혔다.
묵용린은 찻잔을 쥐고 있는 그녀의 손을 바라보았다. 손을 매만지며 위로를 건네고 싶었지만 차마 그리할 수 없었다. 그녀가 놀랄까 걱정이기도 했고, 더욱이 자신의 병이 도질까 염려스러웠다. 그는 어쩌다 자신이 그런 기괴한 병에 걸린 건지, 몹시 한스러웠다.
그는 그녀에게 위로의 말밖에 건넬 수 없었다.
“걱정하지 마시오. 사 장군은 무예가 뛰어나니 아무 일 없을 것이오.”
사봉봉이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할수록 엄청난 인물이 배후에 있는 것 같습니다. 서북까지 손을 쓰다니요. 이렇게 큰 판을 짤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겁니다.”
“의심 가는 자가 있소?”
사봉봉이 반문했다.
“황상께서는 의심 가는 자가 있으십니까?”
두 사람은 서로를 빤히 바라보았다.
사봉봉은 담담하기 짝이 없었지만, 묵용린은 심장이 미친 듯 빠르게 뛰었다. 그가 지금 어찌 그런 걸 생각하겠는가. 매번 사봉봉과 시선을 마주할 때마다 그는 심장이 빠르게 뛰고, 호흡도 불안정해져서 어찌 해야 할지 몰라 쩔쩔맸다.
그가 시선을 거두고 최대한 감정을 억누른 뒤에야 입을 열었다.
“그런 건 생각하지 말고, 짐과 바둑이나 둡시다.”
금천아가 바둑판을 가져왔다.
사봉봉은 여전히 흑돌을 잡았지만 오늘은 정신이 다른 데 팔려 있는지, 몇 번이나 잘못된 곳에 돌을 놓았다.
하지만 묵용린은 그녀보다 더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이어 갔고, 잇달아 바둑알을 그녀의 포위망 안으로 밀어 넣었다.
사봉봉은 의아함에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황상, 일부러 지시려는 겁니까?”
묵용린은 그제야 알아차렸다는 듯 시치미를 뗐다.
“이런, 어찌 이런 실수를. 짐이 순간 판단을 잘못 했소.”
그의 능청 떠는 실력이 너무 형편없어서 사봉봉은 단번에 황제가 자신을 즐겁게 해 주려 한다는 걸 알아차렸다.
“황상, 잊지 마십시오. 신첩이 이기면 청을 들어주셔야 합니다.”
묵용린은 오히려 그녀가 청을 하지 않을까 걱정이었기에 서둘러 대꾸했다.
“짐을 이긴 뒤에나 다시 얘기하시오.”
결국 이번 판은 누구나 예측 가능한 결말로 끝이 났다. 바둑을 둘 줄 모르는 금천아마저 결과를 알아볼 정도로 사봉봉이 쉽게 이긴 것이다.
묵용린은 손에 쥔 돌을 함에 담으며 모르는 척 물었다.
“하면 말해 보시오. 원하는 게 무엇이오?”
사봉봉은 입술을 다물며 망설이는 모습을 보였다.
묵용린이 그녀를 다독였다.
“말해 보시오. 무엇이오? 짐이 들어주겠소.”
“하면 신첩, 사양하지 않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짐에게 사양할 게 뭐가 있단 말이오.”
“신첩, 모친을 뵈러 집에 가고 싶습니다.”
“…….”
묵용린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사봉봉의 얼굴에 먹구름이 드리웠다. 그녀가 두 눈을 내리깐 채 말했다.
“규율에 맞지 않는다는 것쯤은 알고 있습니다. 황상께서 난처하시다면, 못 들은 걸로 해 주십시오.”
“짐이 난처할 게 뭐가 있소.”
묵용린이 웃으며 말했다.
“집에 일이 생겼으니 사 주인장이 걱정되어 보러 가고 싶은 것일 테지. 이는 인지상정이오. 짐이 막는 것이야말로 사리에 맞지 않는 일이지.”
사봉봉은 그의 말에 기분이 좋아졌다.
“하면 당분간 집에서 머물러도 되겠습니까?”
묵용린이 살짝 안색을 굳혔다.
“오냐오냐하니, 욕심이 끝도 없군.”
사봉봉은 서둘러 고개를 숙이고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묵용린은 그런 그녀의 모습에 속으로 자신을 원망했다. 겨우 기분이 나아졌는데, 그녀의 뜻대로 하는 게 뭐 그리 어렵다고……. 하지만 당분간 집에서 머물겠다니, 당분간이 대체 얼마란 말인가? 사흘? 닷새? 열흘? 보름? 아님 한두 달?
그는 마음속으로 재차 고민하다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사봉봉이 먼저 입을 열고 그에게 물었다.
“황상, 신첩 오늘 안에 다녀와도 되겠습니까?”
묵용린이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점심 어선을 들고 가시오. 짐이 집에 바래다 줄 인력을 구성해 줄 터이니. 모처럼 만에 집에 가는 것이니 사 주인장과 시간을 좀 더 보내는 게 좋겠지…….”
사봉봉은 그의 말에 눈을 반짝였다.
뒤이어 느릿느릿한 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하룻밤 자고 내일 아침 돌아오시오.”
사봉봉은 살짝 실망했지만 하룻밤 묵는 것도 좋았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을 굽히며 예를 갖췄다.
묵용린은 습관적으로 부축을 하듯 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두 사람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 사봉봉의 팔에 그의 손이 정말 닿고 말았다.
순간 그는 전기가 오른 듯 화들짝 놀라며 손을 소맷단 안으로 감췄다.
* * *
그날 오후, 묵용린이 구성한 시위와 금군 들이 사봉봉을 사부까지 호송했다. 또 저택의 여종이 제대로 시중을 들지 못할까 봐 경화와 경옥도 함께 떠났다.
사봉봉이 아직 집 앞에 도착하기도 전에 사앵앵은 미리 이 소식을 접했다. 하지만 좀처럼 믿기지 않았다. 예전엔 딸이 돌아오기만을 눈이 빠져라 기다려도 오지 않았는데, 집안에 사달이 나니 어린 황제가 호의를 베풀어 봉봉이를 보내 주다니?
어쨌든 믿거나 말거나, 곧 진실을 알게 될 터.
성 내 금군들은 여전히 사부를 포위 중이었다. 공 제독은 사장풍과의 오랜 친분 때문에 직접 이곳을 지키고 있었다. 표면적인 이유는 사앵앵이 자택을 벗어나지 못하게 감시하는 것이었지만, 사실 그녀를 지켜 주려는 마음이 더 컸다.
황후의 봉가가 도착한 지금은 더욱더 소홀히 할 수 없었기에 그는 곧장 보초를 멀찍이 떨어뜨려, 사봉봉이 들어갈 수 있도록 대문을 활짝 열어 주었다.
아까부터 대문 앞에 서 있던 사앵앵은 딸을 보자마자 품에 껴안고는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사봉봉도 감정이 격해지긴 마찬가지였다. 헤어진 지 고작 몇 개월밖에 되지 않았지만, 격세지감에 모든 게 꿈만 같았다. 그녀는 자신이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사금언도 밖으로 나와 조용히 눈물을 훔쳤다. 어머니와 누이가 눈물을 그칠 줄 모르자, 그가 거친 목소리로 타일렀다.
“어머니, 밖에서 이러지 마시고 어서 누님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가세요.”
비록 근래 들어 나쁜 소식만 이어졌지만, 딸이 돌아온 것만큼은 사앵앵에게 그야말로 큰 경사였다. 한바탕 눈물을 쏟은 그녀는 활짝 웃으며 사봉봉에게 끊임없이 이야기를 해 주었다. 사가 상호부터 집안 일까지, 이야기는 재잘재잘 끝이 날 줄 몰랐다.
사봉봉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어머니의 말을 들어 주었다.
그녀가 대혼식을 치르기 전에도 두 사람은 늘 이런 식이었다. 대부분 사앵앵이 끊임없이 말했고, 그녀는 어머니의 말을 들어 주다가 마지막에 의견을 보탰다. 그렇게 두 사람의 협의가 마무리되곤 했다.
오늘은 무언가를 협의할 일은 없었기에 일상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다.
하지만 사장풍의 실종 이야기가 나오자, 사봉봉의 눈가에 맺혀 있던 눈물이 결국 떨어지며 백자 같은 얼굴에 한 줄기 흔적을 남겼다.
사앵앵이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며 말했다.
“울지 말거라. 아버지는 잘 계실 거야. 며칠 기다리면 분명 우릴 보러 와 주실 거다.”
사봉봉은 어머니의 말에 위안을 얻었다. 어머니는 다른 누구보다 아버지를 믿어 주었다. 일종의 견고한 신념과도 같았다.
딸이 속상해할까 봐 사앵앵이 화제를 바꾸었다.
“황제가 어찌 널 집에 보내 주었니? 못된 꿍꿍이인 거야, 우리의 결점을 찾아내려고. 그렇지?”
사봉봉이 고개를 저었다.
“제가 바둑을 이겨서 온 거예요.”
그녀의 말에 사앵앵은 소타가 해 준 얘기가 떠올랐다.
“소타도 황제가 너와 자주 바둑을 둔다던데, 이기면 좋은 걸 준다면서 말이다. 그 말이 정말이었니?”
“네.”
사봉봉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이에요.”
사앵앵이 근심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좀처럼 이해가 안 되는구나. 황제는 태상황에게 바둑을 배웠으니 그 솜씨가 보통이 아닐 텐데, 어찌 네게 진단 말이냐. 한두 번 실수도 아니고 그리 자주 지다니. 혹 일부러 네게 져 주는 것은 아닐까?”
사봉봉이 빙긋 미소를 지었다.
“일부러 져 주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좋은 것부터 얻어 낸 뒤에 생각해 봐야죠.”
“신중해야 한다. 황제는 속이 시커머니까. 이렇게 중요한 때에 별안간 태도를 바꾸다니, 난 어쩐지 이 일이 황제와 관련 있는 것 같구나. 영안 말로는 배후의 주모자가 권세가일 거라던데, 세상에서 가장 권세 있는 사람이 황제 아니더냐?”
사봉봉이 속으로 탄식을 내뱉었다. 자신의 어머니지만, 정말 담이 엄청났다. 황제를 헐뜯을 땐 아예 대놓고 헐뜯었다. 다행히 지금은 모든 이들을 물린 상태라 망정이지, 만약 누군가 이 얘길 듣고 황제의 귀에 전했으면 또다시 화를 입을 것이었다.
“어머니, 그리 단편적으로만 보지 마세요. 황상은 권력자라 당연히 다른 이들보다 더 치밀해야 해요. 태후께서 낳으신 분인데, 아무리 나빠 봤자 얼마나 나쁘겠어요?”
사앵앵은 조금 의아했다.
“어째서 그리 감싸는 것이냐? 어릴 때 널 그 깜깜한 방에 가뒀던 것도 다 잊은 거야?”
“그게 언제 적 일인데, 아직까지 생각해서 뭐 하겠어요?”
사앵앵이 딸을 유심히 바라보며 물었다.
“너 설마, 어린 황제를 좋아하게 된 건 아니지?”
사봉봉이 화륵 얼굴을 붉혔다. 그녀는 부끄러움에 괜스레 성을 냈다.
“아니에요. 함부로 추측하지 마시어요.”
사앵앵이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황제가 네게 잘해 주는 거라면 그래도 좋은 사위라고 할 수 있겠지. 하지만 안타깝게도 황제잖니. 부인이 그리 많으니 결국 좋은 사람이 될 수는 없을 거다.
지금 당장은 궁에 여인이 많지 않다 해도 삼 년 뒤면 수녀를 선발하니 한꺼번에 수십 수백 명이 쏟아져 들어올 테고, 그렇게 되면 많아도 너무 많아지겠지. 어딜 가도 귀가 조용할 날이 없을 거야. 다들 소란을 피우느라 정신이 없을 테니까. 온종일 서로가 서로를 시샘하느라 쉴 틈이 없을 테지.
멀쩡한 사람이 그런 곳에 빠져 지내다 보면 마음이 완전히 변하는 법이란다. 이 어미는 다른 건 걱정되지 않지만, 네가 그런 곳에서 지내다 그자들처럼 변할까 걱정이구나.”
사봉봉은 사앵앵의 말을 듣고 있으니 조금 우스웠다. 어머니는 정말 생각이 너무 많았다. 자신의 마음을 지키는 건 입신立身의 근본을 지키는 것이었다. 그녀는 그렇게 어리석지 않았기에 대항할 줄도, 그 안에서 빠져나올 줄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