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37화
사앵앵이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정말이니?”
“당연히 정말이죠.”
가소타가 말했다.
“황상께서 봉봉 언니랑 바둑을 즐겨 두는데, 봉봉 언니가 이길 때마다 황상께서 냉궁으로 좋은 것들을 보내 주신대요.”
“황상께서 냉궁에 자주 가신다고?”
사앵앵은 정말 믿을 수 없었다. 사봉봉을 싫어하는데도 그녀를 보러 자주 찾아가다니. 기어이 어린 황제가 정신이 어찌 된 것이란 말인가? 아니면 봉봉에게 나쁜 수작을 부리려고?
묵용린이 사봉봉을 홀대할 때도 걱정이었지만, 오히려 사봉봉에게 잘해 준다는 지금이 더 걱정스러웠다.
* * *
사건은 파란만장하게 흘러갔다. 장명기에 대해 조사를 하다 보니 전부 다 사가 상호에 불리한 내용만 쏟아졌다.
묵용청양은 울화가 치밀었다. 상대의 함정에 걸려들어 허우적대는 기분이었다.
영안은 누구보다 그녀를 잘 알았기에 그녀의 머리를 쓸어내리며 웃었다.
“이런 걸로도 화를 가라앉히지 못하는 거야?”
묵용청양이 고개를 돌려 그의 손길을 피하더니 성이 난 목소리로 말했다.
“배후에 있는 자는 아주 음험한 사람이야.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채찍질을 하고 싶다고.”
영안이 말했다.
“조급해하지 마. 그자가 우리보다 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할 거야. 사가 상호를 무너뜨리지 못하면 그자는 또 손을 쓰려 할 테고, 그러면 그럴수록 누군가 사가 상호에 대항하고 있다는 걸 증명하는 셈이니까.”
하지만 배후의 주모자가 아직 손을 쓰기도 전에 사장풍이 있는 곳에서 사달이 났다. 서북에서 날아온 전서구가 임안에 소식을 전했는데, 사장풍이 서북 군영에서 이탈해 행방불명되었다는 것이다.
이 일로 조야는 충격에 휩싸였다.
대신들은 잘못이 들통나자 사장풍이 도주를 택한 거라고 여겼다. 사나이가 처자식은 안중에 두지 않고 제 목숨만 건지겠다며 도망치다니. 다들 코웃음을 치며 그를 비난했다.
이 소식을 들은 사앵앵은 울고불고 난리를 치는 대신, 자신의 방에 틀어박혀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그녀가 걱정된 사금언은 초조한 마음에 끊임없이 복도를 서성였다.
결국 사앵앵이 밖으로 나와 언짢은 표정으로 말했다.
“계속 그리 왔다 갔다 하다 바닥에 구멍이 뚫리겠다!”
줄곧 어머니를 걱정하던 사금언은 그녀의 말투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을 꾸짖는다는 건 상태가 그리 심각하지 않다는 걸 뜻했기 때문이다.
“어머니, 밖에서 떠도는 풍문은 신경 쓰지 마세요. 아버지는 그러실 분이 아니잖아요!”
“나도 안다.”
사앵앵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아버지가 어떤 분인진 내가 제일 잘 알아.”
“어머니, 아버지를 걱정하시는 거예요?”
“걱정 안 해. 우리가 여기 있으니 아버지는 조만간 돌아오실 거다!”
사앵앵이 그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가서 밥 먹자. 네 아버지가 행방불명되었으니 정신 똑바로 차려야지. 아버지가 돌아올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자꾸나.”
사금언은 눈시울을 붉히며 사앵앵을 데리고 곁채로 향했다.
* * *
묵용린은 이 소식을 들은 뒤로 계속 침묵에 잠겼다.
하지만 문무백관들은 끊임없이 논쟁을 벌였다. 이런 일이 생겼으니 앞서 사가 상호의 억울함을 호소하던 언관들도 입을 굳게 다물었고, 사가 상호의 잘못을 주장하던 이들은 더 거세게 의견을 토로했다. 그들은 하나둘 무릎을 꿇기 시작하더니 당차게 제 주장을 개진했다.
“황상께 아룁니다, 이보다 더 명확하게 판명될 수는 없사옵니다. 사가 상호는 장명기와 내통하여 황금을 훔친 것입니다. 장명기의 짓인 게 밝혀졌으니 사장풍 또한 죄가 두려워 도주한 것입니다. 부디 황상께서 조서를 내리시어 사부와 사가 상호를 엄중히 취조해 주시옵소서.”
“사건을 너무 길게 끌고 있사옵니다. 황상, 서둘러 매듭지으셔야 합니다.”
“왕자가 법을 어겨도 백성과 똑같이 죄를 물으라 하였습니다. 사장풍이 국구라는 이유로 방자하게 내버려 둘 수는 없사옵니다. 부디 천하의 백성을 위해 본보기를 내 주시옵소서!”
“이렇게 긴 시간 동안 환경문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는 모두 영안, 그자가 사가와 친분이 두터워 소극적으로 대처했기 때문이옵니다. 그러니 황상, 이를 명백히 밝혀내 주십시오.”
“황상께 아룁니다…….”
묵용린은 잠시 눈을 감고 심호흡했다.
다시 두 눈을 뜬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환경문을 헐뜯지 말라. 짐은 영안을 믿는다. 다른 일이 없거든 퇴조하라.”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단폐를 내려왔다. 하지만 신하들은 지긋지긋할 정도로 쉴 새 없이 저희들끼리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왕장량은 황제의 뒤를 따라 승덕전으로 향했다. 얼마 뒤, 뒤에서 누군가 쫓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린 그는 허리 숙여 인사를 건넸다.
“진 대인.”
진회안秦懷安은 도찰원의 좌도어사였다. 묵용린과 제법 말이 잘 통하는 사람이기에 왕장량은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눈치껏 적당히 물러났다.
묵용린이 진회안을 바라보며 물었다.
“할 말이라도 있는가?”
“예, 황상.”
진회안이 허리를 숙이며 답하더니 황제와 함께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황상, 사가 상호의 사 주인장과 태후께서 각별한 사이라는 건 소신도 잘 알고 있습니다. 황상께선 아마 그 때문에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시어 사 주인장을 문책하지 않으셨겠지요. 하지만 이 사건으로 온 세상이 떠들썩합니다. 백관들의 원성 또한 자자하여 서둘러 결론을 짓지 않으시면 아마…….”
그가 잠시 말을 끊더니 목소리를 더욱더 낮췄다.
“더욱이 황상께서 황후 마마를 책립하신 이유가 있으시기에 소신, 감히 망언을 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속으론 황상을 대신하여 불만을 품기도 하였지요.
사가에서 이리 큰 소동이 생겼으니, 이번이 황후를 폐위하실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태상황께서 이 일을 아신다고 해도, 아마 아무 말 못 하실 겁니다.
지금 사가 상호의 그 엄청난 부는 나라 전체와 맞먹습니다. 우리 동월 입장에서는 이미 하늘을 찌를 만큼 커다란 나무가 된 셈이지요. 서둘러 베어 내지 않으면…….”
그는 말끝을 흐렸다.
당시, 황제가 갑자기 사가의 천금을 황후로 세우는 바람에 조야가 발칵 뒤집혔었다. 황제가 그리 결정한 이유에 대해 다들 말을 아꼈지만 사실 속으로는 훤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대혼 후, 황제와 황후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 역시 모든 신하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황후가 석사자상 앞에서 벌을 받았던 것도 보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니 지금이야말로 황제가 판도를 뒤집을 좋은 기회였다. 황후를 폐위하는 동시에 사가 상호의 재산까지 몰수할 수도 있었다. 이렇게 좋은 일을 앞에 두고 어찌 꾸물거릴 수 있단 말인가?
물론 그게 사앵앵과 태후의 관계 때문이라는 것도 다들 알고 있었다. 황제는 혹시라도 태후의 심기를 상하게 할까 봐 망설이며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것이다.
발걸음을 멈춘 묵용린은 뒷짐을 진 채 저 멀리 세워진 누각을 바라보았다. 어느덧 가을에 들어섰지만 여전히 뜨거운 햇살에 노란 기와가 빛을 발하며 장엄한 기세를 내뿜고 있었다.
진회안이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 또한 일찍부터 온갖 생각에 잠겨 있었다. 분명 지금이 사봉봉에게서 벗어날 가장 좋은 기회였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언제부터인가 그의 마음속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런 얘기를 들으면 이젠 그저 답답할 뿐이었다.
진회안은 조심스럽게 황제의 안색을 살피다 또다시 입을 열었다.
“황상, 대업을 이루고자 하실 땐 사소한 것에 구애받지 마셔야 합니다. 태후께서도 황상의 고충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실 것입니다…….”
묵용린이 시선을 거두고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자네에게 이 말을 전하라 한 자가 누구인가?”
그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고 말투도 평소와 다름없었지만, 진회안은 화들짝 놀라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아무도 전하라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소신의 가슴에서 우러나온 말이었습니다. 소신, 도찰원의 좌도어사로서 관리를 규탄하는 것이 소신의 직분이옵니다. 간사한 신하나 소인배들 간 결탁, 위세를 부려 정치를 어지럽히는 자들이라면 소신은 절대 좌시할 수 없습니다. 소신은 오로지 황상에 대한 충심으로, 소신이 행하는 것은 늘 황상과 조정을 위해…….”
묵용린이 말했다.
“일어나게.”
그는 진회안을 신경 쓰지 않고 뒷짐을 진 채 홀로 걸음을 옮겼다.
진회안은 황제의 뒷모습을 황망한 얼굴로 바라보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나 궁을 빠져나갔다.
왕장량은 묵용린이 승덕전으로 가지 않자, 어딜 가려는 것인지 곧장 깨달았다. 그는 불진을 든 채 천천히 황제의 뒤를 따랐고 얼마 뒤, 냉궁에 다다랐다.
묵용린은 다른 건 염려되지 않았지만 사장풍의 행방불명 소식이 사봉봉 귀에 전해져 그녀가 속상해할까 걱정이었다.
‘속상해서 울고 있는 건 아니겠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그는 마음이 조금씩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걱정은 심할수록 더 현실이 되는 법이었다.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눈시울을 붉힌 채 눈물이 그렁그렁한 사봉봉의 얼굴이 보였다. 방금까지 한바탕 울음을 터뜨린 모양새였다.
그는 별안간 심장이 누군가 쥐어짜는 것처럼 아파 왔다. 문 앞에 선 그는 어찌해야 할 줄 몰라 머뭇거렸다.
사봉봉은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황제를 보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이했다. 예를 갖추려는데 묵용린이 손을 내밀며 예를 면했다.
“짐이 말하지 않았소, 그리 예를 차릴 것 없다고.”
그는 일부러 가벼운 어조로 그녀를 놀리며 물었다.
“짐은 황후도 울 수 있을 줄 몰랐소.”
사봉봉은 그와 장난칠 기분이 아니었기에 두 눈을 내리깐 채 금천아에게 차를 내오라고 분부했다.
그는 예전 같았으면 그녀의 그런 행동에 탁자를 내리치며 호통을 쳤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조용히 의자에 앉아 사봉봉에게 물었다.
“누가 왔다 갔소?”
사봉봉이 대꾸했다.
“청양 전하가 막 다녀갔습니다.”
묵용린이 이를 악물었다. 내 이럴 줄 알았지. 귀신도 꺼려하는 누이가 일을 망쳤구나. 그 일을 사봉봉에게 알려 주면 걱정하고 가슴을 졸이기밖에 더하겠는가?
그가 손으로 입을 가리며 헛기침을 했다.
“들었소?”
“네.”
“사 장군이 걱정되오?”
사봉봉이 고개를 끄덕였다. 감정을 잘 억누르는 그녀도 가족과 관련된 일에는 좀처럼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묵용린이 뜨거운 차가 담긴 찻잔을 그녀의 손 옆으로 밀어 주었다.
“차 한 모금 마시고 마음을 가라앉히시오.”
사봉봉은 그의 말대로 찻잔을 들더니 뜨거운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이미 많이 울었으니 황상께선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묵용린은 짐이 걱정할 게 뭐가 있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결국엔 하지 않았다.
“황상.”
사봉봉이 그를 바라보았다.
“신첩의 부친을 의심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