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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1134)화 (1,134/1,192)

제1134화

묵용청양이 영안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냥 싸워 버리자.”

영안이 말했다.

“안 돼, 수가 너무 많아. 경거망동해선 안 돼.”

그때 암기가 바람을 타고 날아왔다.

영안은 곧장 묵용청양을 품에 더 꼭 감싸 안았다.

그녀는 그의 몸이 파르르 떨리고 있음을 느꼈다. 묵용청양이 잔뜩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괜찮아?”

“괜찮아. 다리에 스쳤어.”

그는 그녀를 안고 움푹 패인 비탈 안쪽으로 숨었다. 사방이 빽빽한 나무로 둘러싸여 있어서 몸을 숨기기에 아주 좋은 장소였다.

영안은 돌을 하나 주워 왼쪽으로 힘껏 내던졌다. 곧장 돌이 떨어진 방향으로 암기가 날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희미하게 인영이 움직이는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그쪽을 포위하려는 것 같았다.

영안은 함부로 움직일 수 없어서 묵용청양을 평평한 곳에 세운 뒤, 그녀를 온몸으로 막아 주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의 몸을 밀착시켰다. 얼굴까지 거의 붙을 정도였다. 두 사람은 코끝을 맞댄 채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밝게 빛나는 서로의 눈망울만 바라보았다. 호흡이 한데 뒤엉키자, 박자를 맞추듯 심장이 쿵쿵 뛰었다.

영안의 손은 아직도 묵용청양의 허리에 올려져 있었다. 손바닥이 땀으로 흥건했지만 손을 놓고 싶어도 지금은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 한 번이라도 움직였다간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았다.

두 사람을 찾지 못한 적들은 다시 이쪽으로 걸어왔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리자, 영안은 손을 더 꽉 움켜쥐었다.

그때 묵용청양이 더 안쪽으로 들어오라는 듯, 옷자락을 잡아당기는 게 영안에게 느껴졌다. 가슴 언저리에서 느껴지는 그 부드러운 촉감에 영안은 어찌할 바를 몰라 차마 숨도 쉬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적의 아주 미세한 발소리는 그의 귓가에 또렷이 전해지고 있었다.

그는 머뭇거릴 틈도 없이 고개를 비탈 안쪽으로 더 들이밀었다.

그 순간 장검이 그의 뒤에 있던 나뭇가지를 스치며 그의 옷자락도 함께 베었다.

그는 묵용청양과 얼굴까지 맞댄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자는 아무런 이상도 발견하지 못하자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멀어지는 발소리에 영안은 그제야 조심스럽게 거리를 벌렸다. 그가 몸을 돌리려는데 묵용청양이 그의 팔을 붙잡고는 어둠 속에서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적이 아직 멀리 가지 않았으니 언제든 다시 돌아올 수 있었기에 함부로 위험을 무릅쓸 수 없었다.

영안은 그녀에게 붙잡힌 채로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하지만 묵용청양은 금세 손을 놓더니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숨결이 영안의 후끈거리는 얼굴에 닿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내 더 이상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오지 않게 되었다. 영안과 묵용청양은 안도의 숨을 내쉬곤 천천히 밖으로 나갈 준비를 했다.

너무 긴장했던 탓에 묵용청양도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찬바람이 불자 그녀는 몸이 으슬으슬 떨려서 자신도 모르게 재채기를 했다.

영안은 겉옷을 벗어 그녀에게 걸쳐 주더니 휘파람을 불었다. 그의 말은 그와 오랜 시간 함께 했기에, 그의 휘파람 소리에 곧장 나타났다.

하지만 묵용청양의 말은 어딘가로 사라지고 없었다.

영안이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우선 널 유가진으로 데려다줄 테니 거기서 하루 묵고 내일 다시 임안으로 와.”

묵용청양이 말했다.

“싫어. 너랑 같이 타고 돌아갈래.”

그녀가 잠시 뒤 다시 입을 열었다.

“방금 일은 신경 쓰지 마. 우리 강호인들은 이런 것들도 별로 꺼리지 않거든.”

그녀가 겉옷을 영안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나도 너한테 책임지라고 하진 않을 거야.”

‘어차피 너한텐 안월이 있으니까.’

영안은 옷을 받아 입고는 자조적인 말투로 대꾸했다.

“네 신분 때문에 책임지고 싶어도 못 져.”

말에 탄 그가 묵용청양에게 손을 내밀었다.

“올라와.”

묵용청양은 영안의 팔을 붙잡고 몸을 기울인 뒤 그의 앞쪽에 올라탔다. 등 바로 뒤에 따스한 그의 품이 있었지만, 그녀는 그와 닿지 않기 위해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무언가 알 수 없는 기분이 들었으나 그녀는 남을 곤경에 빠뜨리는 짓은 하지 않았다.

영안이 말의 배를 다리로 꽉 쥐고 고삐를 내리치자, 말은 빠르게 내달렸다.

하늘빛이 조금 전보다 더 밝아졌다. 동쪽에서 희끄무레한 빛이 번지더니 금세 산 너머로 밝은 태양이 떠올랐다. 새로운 하루가 시작된 것이다.

* * *

두 사람이 성문에 도착했을 땐, 이미 날이 밝은 탓에 농부들이 싱싱한 채소를 성안으로 가져가려고 줄을 서 있었다.

영안은 속도를 줄여 사람들 틈에 섞였다가 넓은 대로가 나오자 다시 빠르게 질주하여 환경문으로 향했다.

이제 막 일어난 판등 무리는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만두를 먹는 중이었다.

묵용청양도 배가 고팠기에 그녀는 접시에 남은 두 개의 만두를 보고 하나는 자신이 먹고, 다른 하나는 영안에게 건넸다.

영안이 만두를 한 입 베어 물며 산응에게 분부했다.

“공 제독을 찾아가서 장명기의 관저를 포위해 달라고 요청해. 우린 관저로 먼저 가 있을게.”

말을 마친 그는 곧장 밖으로 향했다.

눈썰미가 좋은 판등이 별안간 소리쳤다.

“안 형, 다쳤잖아요!”

묵용청양은 고개를 돌려 영안을 바라보았다. 영안의 옷 뒤쪽이 온통 피로 물들어 있었고, 허리에 길게 난 상처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그녀는 놀란 얼굴로 입에 있던 만두를 황급히 삼킨 뒤 영안에게 물었다.

“언제 다친 거야?”

“괜찮아.”

영안이 손을 내저었다.

“뭘 멍하니 서 있어. 어서 따라와.”

묵용청양이 그를 붙잡았다.

“안 돼, 상처부터 보여 줘.”

“보긴 뭘 봐. 네가 의원도 아니고.”

“상처를 동여매는 건 나도 할 수 있어. 그만 떠들고, 얼른.”

그녀의 무지막지한 행동에 영안은 어쩔 수 없이 판등에게 말했다.

“너희부터 먼저 가 있어. 어서.”

묵용청양은 그의 장포를 벗기고 허리의 상처를 살폈다. 살이 베였지만 아주 심각한 상처는 아니었다.

그녀는 쪼그려 앉아 영안의 오른쪽 다리도 살폈다. 자그마한 암기가 각반 사이에 꽂혀 있는 걸 보니 분명 다리를 깊게 찔린 듯했다. 요동치는 말을 타고 그리 오랜 시간 달렸는데도 빠지지 않았다니. 그녀는 차마 암기를 바로 빼내지 못하고 우선 각반부터 풀었다.

영안은 가만히 서서 묵용청양이 각반을 푸는 모습을 바라보더니 별안간 손을 뻗어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하지 마, 내가 할게.”

묵용청양은 그가 자신을 믿지 못하는 줄 알고 다시 쪼그려 앉았다.

“나 정말 할 수 있다니까…….”

영안이 다시 그녀의 팔을 잡아끌고 슬쩍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넌 장공주잖아.”

묵용청양은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웃으며 주먹을 날렸다.

“네가 언제부터 날 장공주라 여겼다고? 괜히 엄살 부리지 마, 암기에 독이라도 묻었으면 큰일이니까.”

“독은 없어.”

“그러니까 네가 신경 안 썼겠지.”

“시간이 없으니까.”

“언제 찔린 거야?”

“숲으로 들어갈 때.”

묵용청양도 그때가 언제였는지 떠올릴 수 있었다. 영안의 몸이 파르르 떨렸었기 때문이다. 암기가 다리를 스쳤다고 하더니, 사실은 다리에 제대로 박힌 것이었다.

“허리가 베인 건?”

영안이 얼굴을 살짝 붉혔다.

“산비탈에 숨어 있을 때.”

묵용청양의 얼굴도 붉어졌다. 그녀가 영안을 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영안, 비록 네겐 이미… 있지만, 네가 계속 날 가장 친한 벗이라고 생각하는 건 나도 알아.”

‘목숨을 내던지면서까지 날 지켜 주는 그런 벗 말이야.’

상처를 잘 동여맨 영안은 묵용청양과 서둘러 길을 재촉했다.

장명기의 관저는 이미 금군에게 포위된 상태였다.

판등이 그들을 맞으며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안 형, 우리가 한발 늦었어요.”

영안은 안색이 급변해서는 서둘러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묵용청양도 그의 뒤를 쫓았다.

정원 안으로 들어가니, 바닥에 시체 세 구가 널브러져 있었고 검시관이 그것들을 살펴보는 중이었다.

영안이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판등이 답했다.

“와 보니 저택 사람들이 다 죽어 있었습니다.”

“몇 명이나?”

“방금 조사를 마쳤는데, 어른과 아이 다 합해서 열다섯 명입니다.”

“장명기의 아내도?”

판등이 고개를 저었다.

“죽은 이들 중에 부인과 아이가 있긴 했지만 장명기의 아내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친척을 불러서 확인해 봐.”

묵용청양은 이런 참상을 보는 게 무엇보다 힘들었다. 검집을 쥔 그녀가 분노하며 외쳤다.

“대체 누가 한 짓이야?”

영안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어젯밤 그자들은 우릴 죽이려던 게 아니라, 시간을 끌어서 이 사람들에게 손을 쓰려던 거야.”

묵용청양이 이를 악물며 소리쳤다.

“비열한 놈들!”

‘비밀을 지키려고 무고한 사람을 마구잡이로 죽이다니. 이런 악랄한 놈들, 내 손에 잡히면 힘줄을 자르고 가죽을 벗겨 죽이는 것보다 더한 고통을 보여 줄 것이다!’

그때 구문제독 공춘홍이 다가와 영안에게 읍하며 말했다.

“영 부문주, 장부莊府에 사달이 난 걸 어찌 알았는가?”

영안은 유가진에서 있었던 일을 그에게 알려 주었다.

공춘홍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하면 장명기가 황금을 훔치고 죽음으로 입을 막으려 했단 말인가?”

“주모자는 그가 아닐 겁니다. 아직은 정확하지 않지만요.”

영안이 말했다.

“하지만 분명 혐의를 벗진 못할 겁니다. 이제 장명기라는 실마리를 찾았으니 진상을 밝히고 진짜 범인을 찾아야 합니다. 아, 시신에서 특별한 점이 발견된 건 없습니까?”

공춘홍이 말했다.

“다들 단칼에 목숨을 잃었네. 범인은 무예가 엄청난 사람이야.”

“암기 같은 것도 발견되지 않았습니까?”

“없었네.”

영안이 검시관에게 물었다.

“죽은 지 얼마나 되었습니까?”

검시관이 답했다.

“몸에 아직 온기가 남아 있고 시반 또한 나타나지 않은데다 사후 경직 역시 진행되지 않았으니, 아직 한 시진이 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 해가 밝기 전에 숨이 끊겼을 겁니다.”

영안은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그의 추측대로였다. 만약 그들이 한 시진만 일찍 왔더라면 현행범을 맞닥뜨릴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지금은……. 괴로웠던 그는 방 안으로 들어가 상황을 제대로 조사하기 시작했다. 영안은 남들보다 현장을 더 유심히 조사하는 편이었다.

공춘홍의 말대로 모든 이들이 단칼에 목숨을 잃었다. 범인은 상대에게 그 어떤 반격의 기회도 주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그자의 솜씨가 매우 뛰어나거나, 불시에 공격을 가했을 가능성이 컸다.

시신에 난 상처들을 비교해 보니 상처는 깊진 않았지만 매우 정확했다. 보아하니 매우 노련한 솜씨를 가진 자였다. 어떻게 해야 빠르게 목숨을 끊을 수 있는지 잘 아는 사람인 것이다.

상처는 전부 옆으로 비스듬히 나 있었는데, 이는 검이 일반적인 것보다 얇다는 걸 뜻했다.

만약 그의 추측대로라면, 피가 흐르기 전까지 상처는 흔적도 찾아보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는 속으로 탄식을 내뱉었다. 엄청난 고수의 짓이 틀림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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