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33화
야식을 다 먹은 묵용린은 더 이상 남아 있기 민망했다. 더 있으면 동이 틀 것이다. 그런데 그는 바둑 상자를 챙기지 않았다.
“일단 이곳에 두시오. 짐이 다음에 또 찾아와 바둑을 둘지도 모르니까.”
사봉봉은 스스럼없이 대답했다.
“신첩은 언제든 환영입니다.”
묵용린이 떠나고, 사봉봉은 하품을 하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곁눈으로 보니 금천아가 슬쩍 웃고 있었다.
“왜 웃느냐?”
금천아는 웃음을 터뜨렸다.
“황상께서 바둑을 둘 때 계속 마마를 훔쳐보셨습니다.”
“아마도 본궁이 이렇게 바둑을 잘 둘지 몰랐기 때문일 거야. 본궁을 다시 봤겠지.”
“소인 생각에는 그게 아니에요. 황상께서는 갑자기 마마가 이렇게 예쁘다는 걸 알게 되신 것 같았습니다.”
사봉봉은 너무 졸려서 금천아와 더 얘기할 겨를도 없이 침상에 눕자마자 곧바로 잠이 들었다.
* * *
묵용린은 승덕전으로 돌아와서도 오랫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사봉봉은 분명 진중한 성격에 어떤 일이든 물샐틈없이 처리하는 사람인데, 그가 어떻게 그녀를 귀엽다고 느낄 수 있을까?
눈을 감으면 그의 머릿속에 사봉봉이 야식을 먹던 모습이 떠올랐다. 두 눈은 크게 뜨고 뺨이 볼록볼록한 것이 마치 다람쥐 같아 귀여웠다.
그리고 새하얀 그녀의 손. 흑돌을 손가락 사이에 끼웠을 때 흑백이 분명히 대비되면서 너무 예뻐 보였다. 침의 아래에 가녀린 몸, 하얀 목덜미, 그윽한 말리꽃 향기, 어깨 위에 늘어뜨린 긴 머리카락은 고급 흑단 같았다.
거기에 웃을 때 빛을 내뿜는 두 눈동자는 눈썹을 추켜올릴 때면 당당하면서도 개구쟁이 같은 느낌이 들었다. 걷는 모습은 허 귀비처럼 우아하게 하늘하늘거리지는 않지만, 친근하게 느껴질 정도로 소박했다…….
침상 위에서 엎치락뒤치락하던 그는 내심 사봉봉에 대한 자신의 평가가 완전 달라진 걸 깨닫자, 깜짝 놀라 두 눈을 크게 뜨고 장막 꼭대기를 멍하니 바라봤다. 한편으로는 사봉봉이 그의 생각보다 훨씬 나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을 배신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면에서 일어난 충돌은 서로 뒤엉킨 채 끝없이 이어졌다.
* * *
사가 은장의 은표 소동은 열하루째가 되어 막을 내렸다.
관리인의 예측대로 열흘 정도가 되자 은장은 텅텅 비고 말았다. 하지만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사가 상호의 도움을 받았던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찾아와 은자를 맡겼다. 액수는 그리 많지 않았지만, 흐르는 물이 모여 강이 되는 법. 다 합치니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니었다.
게다가 사장풍과 사이가 좋은 일부 무관들이 주머니를 털어 사가 상호를 도왔다.
가부와 영부는 말할 필요도 없이 집안의 재산을 보내왔고, 묵용청양 또한 금과 은이 잔뜩 든 자루를 사앵앵에게 보냈다. 묵용성은 워낙 씀씀이가 헤퍼서 별로 모아 둔 돈이 없었지만, 진왕에게서 빌려서라도 돈을 보내 주었다.
이렇게 모인 은전 덕분에 사가 은장은 계속 버텨 나갈 수 있었다.
관리인에게 이러한 소식을 전해 들은 사앵앵은 크게 감동하여 눈시울을 붉혔다.
“그간 신용으로 가게를 운영하고 선행을 베푼 게, 보답을 바란 건 아니었는데……. 역시 세상엔 좋은 사람이 더 많구나…….”
관리인이 말했다.
“누구나 감정이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저희 사가 상호가 그간 어찌 해 왔는지는 백성들도 다 알고 있습니다.”
사앵앵이 물었다.
“사건 소식은 아직인가?”
관리인이 고개를 저었다.
“다들 환경문이 일을 그렇게나 잘한다던데, 제가 보기엔 그저 그런 것 같습니다. 이번 소동은 사가 상호를 일부러 무너뜨리려 하는 누군가가 벌인 짓이라는 걸 백성들도 뻔히 알고 있는데, 환경문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잖습니까.”
사앵앵이 말했다.
“그런 말 말게. 난 영안을 믿네. 분명 다 생각이 있을 걸세.”
* * *
“잘 모르겠어.”
영안이 묵용청양을 바라보며 말했다.
“준비했는데도 분점 은장의 은자를 도둑맞았어. 내 불찰이지. 상대가 앞뒤로 세 조나 보내 공격할 줄은 몰랐으니까. 손도 쓰지 못해서 적들을 놓치고, 은자도 빼앗겼어.”
묵용청양은 너무 초조했다.
“은자를 가져간 놈이 누구인지 알아낼 순 없어?”
“비화루 사람이야.”
영안이 품에서 암기 두 자루를 꺼냈다.
“우리가 유가진 산굴에서 찾았던 거랑 비슷해. 꽃 모양만 조금 다르지. 비화루의 조직원마다 각자 자신의 암기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야.”
소제갈이 말했다.
“유가진은 임안성과 멀지 않고, 사가 은장 분점도 바로 성 밖에 있으니, 비화루 사람이 이미 임안성에 들어온 건 아닐까요?”
영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가능성도 있어. 사가 은장의 소동이 주춤해졌으니 그들이 또 무얼 하는지 지켜봐야겠어. 너희는 저잣거리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해. 난 다시 유가진에 다녀올 테니.”
묵용청양이 물었다.
“유가진에는 왜?”
“시신을 입관해야 하니까. 직접 가서 확인하고 싶어.”
“나도 같이 갈래.”
영안은 거절하고 싶었지만, 묵용청양이 걱정과 기대에 찬 얼굴로 자신을 빤히 바라보니 매몰차게 말할 수 없었다. 그는 할 수 없이 그리하라고 답했다. 그 역시 묵용청양이 사가 상호의 혐의를 벗겨 내기 위해 이번 사건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사람이면 어떻게든 지켜 주려 했으니까.
두 사람은 곧장 유가진으로 출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말 두 필이 성 동쪽 문을 통과해 빠르게 내달렸다. 묵용청양이 앞에서 말을 몰고 영안은 그 뒤를 따랐다. 눈앞의 소녀가 늠름한 자태로 채찍을 휘두르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그의 눈망울에 빛이 번뜩였다.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간 그는 채찍을 휘두르며 그녀에게 더 바짝 따라붙었다.
두 시진이 채 되기도 전에 그들은 유가진의 장원에 도착했다.
열두 개의 관은 두 줄로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무더운 날씨에, 시신의 부패를 막기 위해 관 속에 얼음을 넣어 둔 상태였다. 하지만 그래도 턱없이 부족했고, 시간도 많이 흘렀기 때문에 서둘러 땅에 묻어야 했다.
영안은 관 사이사이를 돌며 일일이 확인했다. 사실 조사해야 할 건 이미 다 조사한 뒤라 다시 살핀다 한들 새로운 게 발견될 일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영안은 여전히 아주 작은 실마리도 놓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유심히 살폈다.
온 정신을 집중해서 살피는 중인데, 묵용청양이 놀라워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고 바라보니 그녀는 어떤 관 옆에 바짝 붙어서는 갸웃거리며 무언가를 의심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가 물었다.
“얼음물에 불어서 그런지, 이자의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 생겼어.”
영안은 곧장 그녀에게 걸어갔다. 그녀가 가리키는 건 호위대의 수장인 장명기莊明奇의 시체였다. 그는 오품 무관으로, 무술 실력이 뛰어났다. 매년 남원에서 황금이 올라올 때마다 그가 운송을 담당했는데 한 번도 실수했던 적이 없었다. 하지만 올해는……. 그의 비보에 조정 동료들은 다들 애석함을 금치 못했다.
묵용청양이 그의 이마를 가리켰다.
“이거 봐, 주름이 생겼지?”
그녀가 가리키는 곳은 원래 머리카락으로 가려져 있던 곳인데, 지금은 머리카락이 위로 올라가서 새하얀 두피가 훤히 드러났다.
영안이 그녀를 흘기며 말했다.
“손대지 말랬지.”
묵용청양이 얼렁뚱땅 대꾸했다.
“난 그냥 머리카락만 넘긴 거지 아무것도 안 했어.”
“…….”
‘그래, 이 웬수는 남들과는 차원이 다르니까 시체의 머리카락을 넘기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닐 테지.’
그가 허리를 굽혀 이마의 그 주름을 한참 동안 바라보더니 별안간 손을 뻗었다. 그러자 묵용청양이 그의 팔을 붙잡았다.
“뭐 하는 거야?”
영안은 눈을 내리깔고 자신의 손을 움켜쥔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넌 머리카락도 넘겼는데, 내가 좀 만지는 게 뭐 어때서?”
묵용청양이 손을 놓으며 말했다.
“조심해. 지금은 피부가 얼음물에 불었으니까. 잘못 건드리면 바로 훼손될 거야. 그렇게 되면 나중에…….”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영안이 주름을 잡더니 가볍게 아래로 당겼다. 그러자 주름이 벗겨지며 완전한 피부가 드러났고, 더 잡아당기자 천천히 진짜 얼굴이 나타났다.
묵용청양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세상에, 이게 소문으로만 듣던 강호의 변장술이야?”
새로이 드러난 얼굴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낯선 사람의 것이었다. 이자가 누구인지는 중요치 않았다. 중요한 건 장명기가 죽은 열두 명 중에 없다는 사실이다. 즉 그가 황금 도난 사건과 관련 있다는 뜻이었다.
영안은 벗겨 낸 얼굴 가죽을 양피지로 감싼 뒤 품에 넣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나머지 사람들을 조사했지만 다른 특이점은 찾을 수 없었다.
사안이 긴박했기에, 두 사람은 유가진에서 묵는 대신 밤에도 말을 달려 다시 임안으로 돌아갔다.
시체를 발견했던 산골짜기에 다다랐을 때, 영안이 별안간 고삐를 당겨 말을 세웠다.
빠르게 달리고 있던 말은 순간 속력을 줄이지 못해, 앞발을 들어 올리며 불안한 자세로 멈춰 섰다.
묵용청양도 빠르게 고삐를 당기며 물었다.
“왜 그래?”
영안은 조용히 하라는 손짓을 한 뒤, 말 위에 앉은 채 신경을 집중했다.
묵용청양은 곧장 그의 뜻을 이해하고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밤은 마치 거대한 솥을 덮어 둔 듯 칠흑같이 어두웠다. 얇게 굽은 달은 흔적을 찾기 힘들 만큼 희미하게 빛났고, 별빛은 더더욱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은 때마침 바람이 통하는 길목에 서 있었는데, 바람은 악귀가 섞인 것처럼 휙휙 소리를 내며 그들을 밀어낼 듯 불어닥쳤다.
그때 어둠 속에서 무언가 바람을 가르며 날아왔다.
“조심해!”
영안이 소리쳤다.
묵용청양은 몸을 틀어 그것을 피했다. 뒤이어 그녀의 뒤에 있던 커다란 나무에 무언가가 부딪치며 ‘퍽’ 하는 소리가 났다.
영안이 말 머리를 돌리며 말했다.
“유가진으로 돌아가자, 어서!”
묵용청양은 당황한 채 그를 뒤따랐다. 하지만 두 사람은 방금 왔던 길이 아닌, 오른쪽 작은 산길로 방향을 꺾었다. 슬쩍 옆으로 돌아가려 한 것이다.
그러나 상대도 그리 어리석지 않았다. 등 뒤에서 곧장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이어졌다. 그들을 뒤쫓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소리를 들어 보니 그들의 수가 적지 않은 듯했다.
숲속은 밖보다 더 어두웠다. 눈앞에 손을 펼쳐도 다섯 손가락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영안과 묵용청양은 말을 버리고 울퉁불퉁한 길을 헤쳐 안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제아무리 연약한 여인이 아니라지만, 묵용청양도 이런 산길은 거의 걸어 본 적 없었다. 발밑을 조심하지 않으면 넘어지기 십상이었기에, 영안은 그녀의 손을 잡아 주다가 나중엔 그녀의 허리를 꼭 붙잡았다. 걷기 어려운 길이 나타날 땐 아예 안아 주기도 했다.
묵용청양은 두 발이 지면에서 떨어질 때면 본능적으로 영안의 목을 감쌌다. 영안의 키가 그녀보다 훨씬 컸지만 이렇게 안고 있으니 두 사람의 얼굴이 한데 가까워졌고, 호흡마저 서로의 얼굴에 닿아 뜨거웠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뒤에서 바스락바스락 들려오는 소리는 그들이 아직 적을 따돌리지 못했다는 걸 의미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