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32화
옆에 있던 금천아가 깜짝 놀라 물었다.
“마마, 왜 그러세요?”
“알았다!”
사봉봉의 두 눈은 흥분으로 반짝거렸다.
묵용린은 그녀만이 아니라 모든 여자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감추기 위해 그녀에게 거짓 기록을 남겼다. 그녀가 가짜면 허 귀비도, 다른 사람도 다 가짜였다. 그래서 그가 요즘엔 거의 시침을 부르지도 않고 허 귀비에게도 찾아가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허 귀비는 다른 사람과 좀 달랐다. 그녀는 묵용린과 왕래한 과거가 있기 때문에 좀더 대담하게 행동했을 것이다. 그래서 묵용린이 한두 차례 발병했고, 사후에 허 귀비를 문책하지 않은 것이다.
그렇구나! 묵용린이 그녀를 미워하기 때문에 무서워하는 게 아니었구나. 여자를 만질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하늘 아래서 가장 권세 있는 남자가 여자를 무서워한다니, 이건 정말 누구라도 배꼽을 잡고 웃을 이야기였다.
금천아는 자신의 상전이 갑자기 웃자 좀 불안해졌다. 그녀는 사봉봉을 살짝 건드리며 말했다.
“마마, 무섭게 하지 마시어요.”
사봉봉은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본궁은 괜찮다.”
한참 웃고 나니, 그녀는 문득 묵용린이 좀 가여웠다. 이러다간 정말 황위를 이을 사람이 없어질 테고, 그건 그리 좋은 일이 아니었다.
* * *
황금 도난 사건이 일어난 뒤, 묵용린은 줄곧 우울했다. 그날 사희가 한 말을 들은 후에 그는 더욱더 기분이 엉망이었다.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해 나와서 걷다 보면 냉궁에 도착하곤 했는데, 뜰 문을 통해 창밖으로 빛이 새어 나오는 것을 보면 사봉봉도 아직 깨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밤에는 너무 조용해서 작은 소리도 다 들을 수 있었다. 금천아는 금방 눈살을 찌푸렸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누가 오는 거죠?”
그녀는 불안한 마음에 등불을 켜고 문 옆에 서서 물었다.
“누구시오?”
“짐이다.”
무거운 목소리가 벌써 가까운 곳에서 들려왔다.
금천아는 깜짝 놀라 자기도 모르게 사봉봉을 바라봤다. 사봉봉은 이미 침상 가장자리에 앉아 있다가, 얼른 신발을 끌며 밖으로 마중 나갔다.
“신첩, 황상께 문안드립니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어찌 오셨습니까?”
묵용린이 흐릿한 촛불에 의지해 그녀를 훑어봤다.
“자려고 하는 중이었소?”
사봉봉은 막 잠자리에 들려고 했다. 하지만 오늘 알게 된 묵용린의 비밀 때문에 그가 좀 가엾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평소보다 부드러운 태도를 취했다.
“아직입니다. 서책을 좀 더 보다가 자려고 했습니다.”
그녀는 대답을 하면서 황제를 안으로 안내했다.
그녀는 급하게 나와서 겉옷을 걸치지 않고, 그저 새하얀 침의 한 벌만 입은 상황이었다. 사봉봉은 다른 규수들처럼 가식을 떨지도 않았고 산들바람에 흔들릴 것 같은 연약함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침의 아래로 그녀만의 가녀린 자태를 볼 수 있었다. 어깨는 보기 좋은 곡선을 그리고 있었고, 가는 허리는 한 손에 가득 잡힐 것 같았다. 침의 사이로 보이는 새하얀 목덜미에서는 은은한 말리꽃 향기가 배어 나왔다…….
묵용린은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호흡이 가빠 오는 걸 느꼈다. 그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그녀와 거리를 벌렸다.
안으로 들어가 사봉봉이 탁자 옆에 앉으려고 할 때 그가 말했다.
“밤이라 쌀쌀하니 겉옷을 걸치시오.”
사봉봉은 별생각 없이, 금천아의 도움을 받으며 겉옷을 입고 허리띠를 매고서야 금천아에게 차를 대접하라고 명했다.
그때 묵용린이 말했다.
“귀찮게 할 생각은 없소. 짐은 잠시 앉았다가 곧 돌아갈 것이오.”
“귀찮지 않습니다. 신첩도 목이 마릅니다.”
사봉봉은 그를 향해 웃으며 눈을 깜박거렸다.
“이번에는 황상께 차를 대접할 수 있습니다.”
묵용린도 웃으며 대꾸했다.
“마음에 든다면 다음에 더 보내라고 하겠소.”
“충분합니다. 여기는 신첩과 천아 둘만 있으니 찻잎을 많이 쓰지 않습니다.”
안을 둘러보던 묵용린이 궤짝 위에 놓인 서책을 힐끗 보더니 물었다.
“서책은 다 읽었소? 다 읽었으면 더 보내 주겠소.”
“아직 다 못 봤습니다. 보내 주신 화본들이 참 재미있습니다. 황상께서도 평소에 그런 걸 읽으십니까?”
묵용린은 웃으며 말했다.
“짐이 그런 걸 읽겠소? 그건 태후께서 남겨 놓고 가신 것들인데, 보통 황후 같은 여인들이 좋아할 것 같아서 보낸 것이오,”
“황상, 정말 세심하십니다.”
말하고 있자니 정말 이상했다. 평소에 이 두 사람은 서로 빈정거리거나 아니면 할 말이 없었는데, 오늘 밤은 어찌 된 영문인지 대화를 나누면서도 어색하지 않았다. 정말 평범한 부부의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묵용린은 여기서 그렇게 오래 있을 생각이 아니었다. 하지만 따뜻한 찻잔을 손에 들고 차향이 은은하게 퍼지는 가운데, 맞은편에 앉은 여인이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화본에 나온 이야기를 해 주고 있었다.
골치가 아프던 가을밤에 누군가가 이렇게 함께 있어 주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적어도 지금은 그곳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사봉봉도 묵용린이 그녀의 얘기를 듣는 게 혹여 성가시진 않은지 알 길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앉은 채 갈 생각이 없어 보였고, 그녀도 그를 굳이 서둘러 보내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밤이 깊고 고요했기 때문일까? 낮에 그랬던 것처럼 감정을 꽁꽁 숨기지 않는 청년 황제의 살짝 찌푸린 미간에서 뭔가 고민이 있는 게 느껴졌다. 사봉봉은 묵용린의 가장 큰 고민은 아마도 그가 감추고 있는 비밀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갑자기 물었다.
“황상, 바둑 두는 것을 좋아하십니까?”
“오, 황후가 바둑도 둘 줄 아시오?”
사봉봉은 불만스럽다는 듯 투덜거렸다.
“황상의 눈에는 신첩이 돈만 벌 줄 아는 사람인 듯합니다.”
묵용린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건 아니오. 황후도 바둑을 좋아하오?”
“할 줄은 압니다. 궁에 들어오고 나서는 같이 바둑을 둘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 못 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지금 두고 싶소?”
사봉봉이 입술을 오므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한데 너무 늦은 시간이라서…….”
“그게 뭐가 어렵소?”
묵용린이 소리쳐 사람을 불렀다.
“사희, 짐의 바둑 상자를 가져와라.”
사희는 밖에서 응대하고는 후다닥 뛰어갔다. 그는 이틀 전에 곤장을 맞아서 아직 걸음이 시원치 않았으나, 아픈 걸 신경 쓸 상황이 아니었다. 황상께서 흥이 나서 바둑을 두겠다고 하시기 때문이다. 그것도 무려 황후와 두는 바둑이었다. 그는 왠지 좋은 예감이 들어, 승덕전 쪽으로 성큼성큼 달려갔다.
곧 사희가 바둑판과 바둑돌을 가져왔다. 낡고 허름한 팔선상에서 묵용린과 사봉봉은 그들의 첫 대국을 시작했다.
금천아가 눈치 있게 양초 두 개를 더 키자, 따뜻한 불빛이 집 안을 환하게 비췄다. 바둑판 위에 점점이 놓인 흑백의 옥돌이 불빛을 반사해 반짝거렸다.
묵용린은 바둑을 두는 일에 있어서 군자였기에, 여인에게 흑을 양보했다. 사봉봉도 딱히 사양하지 않았다. 흑돌을 끼운 가느다란 손가락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움직였다.
예전에 묵용린이 유 귀인과 바둑을 둘 때는 어떻게든 기회를 봐서 여인의 손을 잡아 보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생각은 뇌리에 스치기만 했고, 바둑을 두는 데 집중하다 보니 금세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오늘 밤에는 그 생각이 자꾸 머릿속을 맴돌면서 도무지 사라지지 않았다. 심지어 그 생각 때문에 바둑에 전념할 수 없었다. 그의 시선이 자꾸 옥처럼 희고, 먹빛 바둑알을 손가락 사이에 끼운 손에 머물렀다. 마치 녹아서 없어질 것 같아서 도무지 눈을 뗄 수 없었다.
사봉봉이 가볍게 웃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그는 그녀가 자신의 바둑알을 모두 에워쌌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득의양양하게 눈썹을 치켜세우더니 네 개의 백돌을 그의 바둑 상자에 던져 넣었다.
바둑알이 서로 부딪쳐서 듣기 좋은 소리를 냈다.
그는 바둑알을 잃었지만, 기분은 유쾌했다.
“황후의 기예가 보통이 아니군. 누구한테 바둑을 배웠소?”
“배운 적 없습니다.”
사봉봉이 말했다.
“어릴 적 신첩은 서북 역참에서 지냈는데, 그곳에는 남북을 오가는 상대가 많았습니다. 누군가 바둑을 두면 신첩은 옆에서 지켜봤습니다.
신첩이 흥미를 보이자, 한두 명이 신첩에게 가르쳐 줬고 그렇게 실력이 점점 늘었습니다. 모친께서 신첩이 바둑을 좋아하는 걸 아시곤 기보를 구해다 주셨습니다. 아직도 신첩의 집에는 희귀한 기보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랬군.”
묵용린이 웃음을 터뜨렸다.
“어쩐지 황후의 기법이 정통은 아니었소.”
정통이 아니란 말을 들어도 사봉봉은 개의치 않았다.
“정통이든 아니든 이길 수 있으면 좋은 기법이죠.”
그녀는 또 백돌 석 점을 잡았다.
“황상, 조심하셔야겠습니다.”
“짐을 이기고 나서나 그렇게 말하시오.”
그는 기예가 꽤 출중했지만 도저히 집중을 할 수 없었다. 바둑을 두다가 보면 사봉봉의 손가락에 시선이 꽂혔고, 그 손이 허공에 떠 있는 것을 자꾸 보고 있자니 쥐어 보고 싶은 충동을 참을 수 없었다. 만약 그에게 그런 병증이 없었다면 주저하지 않고 그 손을 잡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며칠 전에 벽요궁에서 있었던 일이 아직도 눈에 선한데 모험을 할 수 없었다. 그저 가슴속에서 고양이 한 마리가 긁고 있는 것처럼 심장이 간질거렸다.
그는 가까스로 자신을 억제했다. 왕장량이 사람들을 이끌고 야식을 가져올 때까지 그의 노력은 계속되었다.
야식은 시원하게 먹는 식후 간식인 행인파라동杏仁菠蘿凍이었다. 원래는 여름에 먹는 것이지만, 황제가 워낙 즐겨 먹기에 가을에 접어들어도 끊이지 않게 준비했다. 따끈따끈한 진주완자 단술도 있었다.
사봉봉은 냉궁에서 지내는 요 며칠 동안 무엇을 먹어도 다 맛있게 느껴졌다. 행인파라동은 몇 숟가락 만에 입 속으로 사라졌고, 그녀는 얼른 또 진주완자 단술을 들고 떠먹었다. 단술이 아직 약간 뜨거워서 진주완자를 먼저 골라 먹었다. 씹을 때마다 뺨이 볼록거리는 게 어쩐지 귀여워 보였다.
묵용린의 심장이 크게 널뛰기 시작했고, 가느다란 바늘로 촘촘하게 찌르는 듯한 느낌이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올라왔다. 아픈지 어떤지 명확하게 말할 수는 없었다. 그는 얼른 눈을 감았다. 심장 박동을 가까스로 진정시키고 나서야 다시 눈을 뜰 수 있었다.
왕장량은 한쪽 구석에 서서 황제와 황후가 양쪽으로 나눠 앉아서 화기애애하게 야식을 먹는 모습을 보며 흐뭇해했다. 그는 조용히 뜰로 물러나 허공에 뜬 달을 보고 길게 읍하며 기원을 드렸다.
‘하늘이 보우하신 덕에, 마침내 황상의 은밀한 병증이 치유될 희망이 생겼습니다.’
진왕야는 역시 대단했다. 막 대혼을 했을 때, 그는 황제에게 황후와 한번 시도해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때만 해도 황제는 황후를 몹시도 싫어해서 일언지하에 거절했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