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30화
허 귀비는 황제가 사봉봉을 어떻게 처벌할지는 알 수 없지만, 금령의 말처럼 황후가 냉궁에 있는 틈을 타서 황제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했다. 황제의 마음만 그녀에게 있다면 사봉봉의 능력이 아무리 출중해도 더는 적수가 되지 않았다.
사실 주도적으로 행동한 적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모두 실패로 끝났다. 그동안의 경험을 종합해 본 결과, 그녀는 여전히 자신이 너무 여리고 담이 작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목숨을 걸겠다고 생각했다. 체면을 구기더라도 일단 잡아 두기만 하면 어떻게든 될 것 같았다.
부드러운 팔이 허리를 감싼 찰나, 묵용린은 두피가 저리고 심한 현기증을 느꼈다. 등에선 식은땀이 계속 솟구쳤고, 위장은 마치 태풍이 몰아치듯 뒤집어지는 것 같았다. 그는 그녀의 팔에서 미처 빠져나오지 못하고 허리를 숙인 채 헛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허 귀비가 어찌 황제의 이런 반응을 예상할 수 있었겠는가? 그녀는 깜짝 놀라 그를 더욱 힘껏 끌어당기며 애타게 불렀다.
“황상,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어디가 불편하십니까? 황상, 황상…….”
묵용린은 손발에 힘이 전혀 들어가지 않아서 온몸을 구부린 채 헛구역질을 하며 나지막이 으르렁거렸다.
“저리… 저리, 비켜라, 우욱!”
문밖에서 동태를 살피던 영십칠은 얼른 뛰어들어 왔다. 그는 일말의 고민도 하지 않고 곧장 허 귀비를 붙잡아 한쪽으로 내팽개친 뒤 묵용린을 일으켜 세웠다.
“황상, 괜찮으십니까?”
영십칠의 목소리가 들리자, 묵용린은 상태가 조금 호전되는 걸 느꼈다. 그는 영십칠의 품에 기댄 채 명령했다.
“짐을 데리고 돌아가라.”
사희가 얼른 뒤따라 들어와 황제를 부축했다. 두 사람은 좌우에서 황제를 부축해 어가에 태웠고 부리나케 승덕전으로 돌아갔다.
금령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하기에 다른 사람을 들여보낼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자신이 먼저 들어가 상황을 살펴보니, 허 귀비가 인사불성이 된 채 탁자 옆에 쓰러져 있었다.
놀라서 얼굴이 하얗게 질린 그녀는 얼른 앞으로 달려가 허 귀비를 불렀다.
“마마, 왜 그러고 계세요? 마마, 일어나 보세요. 마마? 괜찮으십니까?”
벽요궁은 일시에 발칵 뒤집어졌다. 금령은 궁녀들을 불러 허 귀비를 침상에 눕힌 뒤 인중을 눌러 응급조치를 취했다. 그러고는 뜨거운 물을 먹인 뒤 태의를 청했다. 어린 궁녀들은 총총거리며 탁자 위에 놓인 음식들을 치웠다…….
허 귀비는 태의가 당도하기도 전에 깨어났다. 잠시 혼수상태였을 뿐 큰 지장은 없었다. 그녀는 깨어나자마자 금령에게 물었다.
“황상은?”
“황상께서는 승덕전으로 돌아가셨습니다.”
“황상의 상태가 어떻다고 하더냐?”
영십칠과 사희의 동작이 너무 빨라서, 금령이 달려왔을 때 황제는 이미 어가에 올라탄 상태였다. 게다가 밖이 캄캄해서 그녀는 아무것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하지만 황제는 흐느적거리고 아무런 기운도 없어 보이는 게, 어디가 좀 불편한 것 같았다.
“황상께서는 어가를 타고 가셨습니다. 어디가 좀 불편하신 것 같았습니다.”
허 귀비는 멍하니 장막 꼭대기를 바라보며 담담한 한숨을 내쉬었다. 연속해서 세 번이나 이런 일이 생겼는데 모르면 그건 미련한 사람이었다. 처음엔 신혼 첫날밤 이곳에서였고, 두 번째는 황제가 벽요궁에서 식사했을 때였다. 배탈이라고 했지만, 그날 그녀 역시 같은 음식을 먹었음에도 그녀에게는 아무 일도 없었다.
앞서 두 번은 너무 당황해서 다른 생각을 하지 못했지만, 오늘 상황은 더 의심할 수 없이 분명했다. 황제는 그녀가 껴안은 순간 발병했다.
또, 그녀는 승덕전에 갔던 때를 떠올렸다. 다정하게 황제의 지친 어깨를 주무르려 했으나, 호통만 들었다. 그렇게 냉랭한 얼굴로 사람을 천 리 밖으로 밀어내는 차가움에 그녀는 깊은 상처를 입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그의 본능적인 반응일 뿐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여자와 닿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보다 더 황당한 우스갯소리는 없을 것이다. 위풍당당한 군왕, 하늘 아래에서 가장 권세가 높은 황제, 후궁에 삼천 명의 미인을 품을 수 있는 남자가 여자만 닿으면 과민 반응을 일으키다니! 어쩐지 경사방 기록이 너무 빈약하더니, 황제는 여색을 가까이하지 않는 게 아니라 근본적으로 그럴 수 없던 것이다!
어린 궁녀가 들어와 고했다.
“마마, 태의가 왔습니다.”
허 귀비는 손사래를 쳤다.
“본궁은 괜찮으니 그냥 돌아가라고 전해라.”
금령은 불안해하며 한 번 더 권했다.
“마마, 그래도 태의에게 보이는 것이 좋겠습니다. 아무런 이유 없이 쓰러지신 건 아닐 겁니다. 소인은 걱정이 되어서…….”
허 귀비는 확 짜증이 치밀어 고함을 질렀다.
“본궁이 괜찮다고 하면 괜찮은 것이다. 태의를 돌려보내거라. 본궁은 지금 누구도 보고 싶지 않다.”
사람이 이유 없이 쓰러졌겠는가? 분명 그 시체같이 아무런 표정 없는 영십칠이 밀쳐 넘어지면서 기절한 것이리라. 그렇지만 차마 그 상황을 다른 사람에게 말할 수 없었다.
이런 그녀를 보고 금령은 어린 궁녀에게 밖으로 나가 말을 전하게 하고, 장막을 늘어뜨려 허 귀비가 조용히 쉴 수 있게 했다.
* * *
승덕전에서 묵용린은 이미 목욕을 마치고 침상에 기대어 있었다. 소태감 한 명이 손수건을 들고 그의 머리카락을 닦아 주는 동안 그는 아무 생각 없이 멍하게 들보를 바라보며 넋을 놓고 있었다.
편전에서는 왕장량이 나지막하게 사희를 꾸짖고 있었다.
“황상의 병증을 뻔히 알면서도 귀비 마마께 가시게 하다니, 대체 무슨 생각이었던 것인가!”
사희는 고개를 숙인 채 중얼거렸다.
“이렇게 저렇게 계속 시도해 봐야 뭔가 진전이 있을 것 같아서…….”
“진전?”
왕장량이 피식 비웃으며 말했다.
“황상께서 귀비 마마한테 몇 번이나 고꾸라졌는지 생각 좀 해 보게. 시도를 하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해 보셔야지, 황상께서도 귀비 마마를 찾지 않으시는데 자네가 왜 고집을 부리는 것인가?
내가 모르는 줄 아는가? 곽도와 귀비 마마께서 자네에게 적지 않은 하사품을 내렸다는 걸 다 알고 있네. 상전이 내리는 하사품을 노비가 받지 않는 것도 예법에 어긋나는 것이지만, 받을 때도 받는 규칙이 있네. 상이 너무 과하면 저들을 위해 일을 해야 하지.
하지만 다른 건 몰라도 황상에 대한 것만은 절대 안 되네. 황상께서는 우리의 상전이시네. 설마 자네, 욕심에 눈이 멀어 팔을 밖으로 굽히려는 건 아니겠지?”
사희는 왕장량의 꾸짖음에 수치스러워 고개를 숙이다가 결국 무릎을 꿇었다.
“대총관, 제발 그만 말씀하십시오. 제가 정말 잘못했습니다.”
왕장량은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자네 운수가 어찌 될진 지켜봐야 알겠지.”
사희는 묵용린의 곁을 십 년이나 지켰으니, 어린 황제가 자라는 걸 다 지켜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렇게 오랜 시간 주종의 관계를 맺어 왔으니, 그에게 황제보다 더 중요한 건 없었다.
오늘 이런 일이 벌어진 이유 중에 일부는 귀비에게서 받은 것을 돌려주고 싶어서였지만, 더 중요한 건 황제가 더 많이 시도해 보길 바라는 마음 때문이었다. 자꾸 시도해 보면 좋아질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는 조용히 내전으로 들어갔다.
묵용린은 원래 자세를 그대로 유지한 채 반쯤 누워 있었고, 소태감은 사희가 들어오자 조용히 물러났다.
사희는 아무 말 없이 황제 앞에서 털썩 무릎을 꿇었다.
묵용린은 그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 송자관음을 보았을 때, 그는 이미 무슨 일인지 알아차렸다. 그러나 이미 허 귀비를 찾아왔고, 또 그녀의 생일이니 얼굴이나 보며 식사 한 끼 정도 먹는 건 상관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다만 허 귀비가 마지막에 그렇게 달려들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지난번에도 그에게 집적거리더니, 이번에는 그 정도가 더 심해서 하마터면 심장과 간, 비장까지 다 토해 낼 뻔했다.
그 괴로움을 생각하니 그는 화가 치밀어 냅다 일어나 사희를 걷어찼다.
그가 냉소를 지었다.
“네가 그렇게 귀비에게 충성을 바칠 거라면 아예 벽요궁으로 보내 주마!”
사희는 순식간에 안색이 하얗게 질리며 바닥에 엎드려 울부짖었다.
“황상, 소인이 잘못했습니다. 소인이 죽을죄를 지었나이다. 하지만 소인의 충심은 일월처럼 변함이 없습니다. 만약 소인이 황상께 두 마음을 품었다면 당장 천벌을 받아 마땅할 것입니다. 소인은 그저 이런 일은 여러 번 시도해 봐야 한다고 생각했고, 귀비 마마께서는 또 황상의 심중에 계신 분일 뿐만 아니라 궁중의 주인들 중에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소인에게 사심이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정말 황상을 위해 한 일입니다. 대혼을 치른 지 이미 몇 달이 지났습니다. 경사방에 기록도 몇 안 되고 황상께서 시침을 명하지도 않으시니, 이 일을 이제 더는 숨길 수 없음이 분명합니다. 만약 언관들이 알게 된다면 난리가 날지도 모릅니다, 황상…….”
사희가 말한 것들이 바로 묵용린의 골칫거리였다. 미인이 궁에 들어왔어도 그의 은밀한 병증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고 그를 괴롭혔다. 아름다운 여인이 앞에 있어도 그는 다가가 시도를 해 보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생기지 않았다.
사희가 그의 은밀한 병증을 언급하자, 묵용린은 화낼 기운도 사라져 버렸다. 그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스스로 형방에 가서 곤장 스무 대를 맞거라.”
* * *
그날 일로 그다지 큰 소동까지 벌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궁중에 어떤 소문이 슬그머니 퍼졌다.
적막한 궁중 깊숙한 곳에 한가한 노비들이 잔뜩 있으니, 그들은 조그마한 얘깃거리라도 생기면 다들 흥미진진하게 떠들어댔다.
처음 전해진 소식은 바로 이것이었다.
‘황제가 벽요궁에서 귀비 마마와 다툼을 벌이다가 귀비를 밀쳤다.’
그런데 이 소식이 한 바퀴 돌더니 이렇게 바뀌었다.
‘황상이 벽요궁에서 식중독에 걸려 한밤중에 태의를 불러 진찰을 받았다.’
그리고 이 소식은 다시 이렇게 바뀌었다.
‘귀비가 황제에게 한 번 더 독을 썼지만, 다행히도 황제는 화를 면했다.’
양 수의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라 장 수의에게 물었다.
“설마요. 귀비 마마께서 어찌 황상께 독을 쓸 수 있겠어요?”
장 수의는 허 귀비에 대한 인상이 그리 좋지 않았다.
“누가 알겠어요? 어쩌면 너무 좋아서 한이 많아진 건지도 모르죠. 유 귀인이 총애 받는 걸 시기해서 말이에요. 어쨌든 여자가 독해지면 무슨 일이든 해내거든요.”
“하지만 귀비 마마가 잡혀가지는 않았잖아요.”
“그건 황상의 뜻을 봐야겠죠. 지난번에 황상께서 벽요궁에서 배탈이 났을 때도 시시비비를 따지지 않고 넘어갔잖아요. 어찌 됐든 허 귀비는 황상께서 좋아하셨던 여인이니까요. 아무래도 애정이 남다르겠죠.”
“내가 보기에는 유 귀인에 대한 황상의 총애는 이미 끝장난 거 같아요. 황상께서 이제 더 이상 그녀에게 동행을 명하지 않잖아요. 그리고 그동안 계속 병치레하느라 병색마저 짙어졌으니 황상께서는 더욱더 그녀를 찾지 않으실 거예요.”
“역시 화본에 적힌 말이 틀린 것 하나 없네요. 천하에 제왕이 가장 무정하다더니. 황상께서는 매일 당신의 곁을 지키던 유 귀인이 병으로 앓아누웠는데도 한 번도 보러 가지 않으셨어요.”
“유 귀인은 어차피 틀렸으니까, 우린 귀비 마마가 이번 일을 어찌 처리하실지나 지켜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