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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1128)화 (1,128/1,192)

제1128화

이번에는 허 귀비도 도저히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붉으락푸르락한 안색과 잔뜩 당겨진 입가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말았다. 한참 뒤에야 그녀는 몸을 돌리고 애써 미소를 지으며 황후의 봉인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황상께서 말씀하지 않으셨으면 신첩, 깜빡 잊을 뻔했습니다.”

말을 마친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떴다. 그녀의 얼굴에 가득한 노여움을 누구라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묵용린은 눈살을 찌푸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봉봉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황상, 이게 무슨 짓이십니까? 귀비에게 저리 망신을 주시다니요. 얼마나 황망하겠습니까? 황후의 봉인이 그리 갖고 싶다면 주면 그만인 것을요.”

묵용린은 대뜸 성질을 내며 말했다.

“그건 짐의 일이오. 황후가 무슨 상관이오?”

말을 마친 황제는 소매를 뿌리치고 가 버렸다.

금천아는 사봉봉에게 투덜거렸다.

“소인도 다 알겠습니다. 황상께서는 우리를 도와주셨는데, 마마께서는 왜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까?”

사봉봉은 한숨을 내쉬었다.

“본궁은 단지 황상의 의도를 타진해 보려고 했을 뿐이다. 저렇게 성질을 부리실 줄은 몰랐어.”

묵용린은 안뜰 문 쪽으로 돌진하다가 마침 점심 식사를 갖다 주러 온 사람과 마주쳤다. 그 사람은 황제와 맞닥뜨려 잔뜩 겁에 질린 채 얼른 꿇어앉았다.

그대로 걸어가던 묵용린은 다시 돌아와 물었다.

“뭘 가져온 것이냐?”

“황상께 아룁니다. 이건 황후 마마의 점심 식사입니다.”

“열어 봐라.”

소태감은 명에 따라 찬합을 열었는데 그 안엔 차가운 찐빵 두 개와 함채咸菜 한 접시가 놓여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뜬 묵용린은 화를 내지 않고 말했다.

“가서 후궁 주방에 알리거라. 짐도 오늘은 이곳에서 식사를 함께하겠다. 그러니 가서 반찬을 몇 가지 더 해 오라고 전하거라.”

소태감은 알겠다고 답하면서 찬합을 들고 돌아갔다.

묵용린은 문 앞에 잠시 서 있다가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갔다. 사봉봉과 시선이 마주쳤을 때, 그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배가 고프군. 여기서 식사를 하고 가야겠소.”

금천아는 즉시 손수건을 꺼내 탁자와 의자를 모두 닦으며 사봉봉에게 눈짓을 보냈다.

사봉봉은 웃으면서 말했다.

“황상, 괜찮으시다면 이곳에 앉으십시오.”

묵용린이 한쪽에 앉자, 사봉봉은 탁자 모서리를 돌아 그의 옆에 앉으려고 했다. 그 순간 묵용린은 화들짝 놀라듯 일어나더니 그녀의 맞은편으로 자리를 옮겼다.

금천아는 황제가 왜 저러는지 영문을 알 길이 없었다.

반면 웃음을 참지 못한 사봉봉은 수건으로 입을 가린 채 고개를 돌려 한참 웃고서야 비로소 다시 황제를 바라보았다.

사봉봉은 황제가 이곳에 같이 있으면 그녀도 좋은 음식을 함께 먹을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역시, 한 무리의 사람들이 긴 찬합을 줄줄이 들고 와서 낡은 팔선상을 가득 채웠다. 모든 요리가 정교한 모양에, 맛도 다 좋았다.

사봉봉은 한 입 맛보자마자 바로 알 수 있었다. 이 요리들은 후궁 주방이 아니라 어선방에서 가져왔다는 것을.

묵용린의 식사 습관은 말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사봉봉도 조용히 침묵을 지키며 식사를 이어 갔다.

반쯤 먹었을 때, 그녀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황상, 감사합니다.”

묵용린은 시선을 들어 그녀를 봤다. 사봉봉은 살짝 미소를 짓고 있었다. 묵용린의 심장이 순간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는 다시 고개를 내리고 생각했다.

‘설마 병이 더 깊어진 것인가?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데 반응이 있을 줄이야?’

* * *

벽요궁으로 돌아온 허 귀비는 의자에 앉아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금령은 그런 허 귀비의 모습에 방 안에 있던 이들을 모두 내보내고 그녀를 위로했다.

“마마,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사건이 아직 다 밝혀지지 않은 탓에 황상께서 당장 황후를 폐할 수는 없겠지만, 소인은 그 날이 그리 멀지 않았을 거라고 믿어요.

조정의 은자를 훔치는 건 반란을 일으킨 것과 진배없어요. 그건 구족을 멸하는 대죄예요. 만약 황상이 두둔하신다고 해도 문무백관들이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좌상 나리도 계시잖아요. 분명 좌상 나리께는 방법이 있을 거예요…….”

허 귀비는 시선을 들어 으리으리한 벽요궁을 바라봤다. 원래 이 궁전이 그녀에 대한 황제의 마음을 표현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다시 보니, 웃음이 터져 나올 뿐이다. 입궁한 후 지금까지 황제는 그녀에게 손도 대지 않았는데 무슨 애정이 있었겠는가?

비록 그녀가 경사방에 한 번 기록되었다지만, 그건 가짜였다. 황후도 기록된 적이 한 번 있어서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 알아본 결과, 그것도 가짜였다. 그날 밤 황후가 황제에게 불려 간 건 밤에 당직을 서라는 하명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황제가 황후를 함부로 다룰수록 그녀는 속으로 기뻐했다. 그런데 그런 황제가 도대체 언제부터 황후를 도왔을까? 장사꾼 여인네라고 돈 냄새가 진동한다고 싫어한 게 아니었나?

그녀는 마음이 착잡했다. 자신의 처지가 너무 서러웠다. 거듭 눈을 깜빡였지만, 그녀의 두 눈에선 결국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모습에 금령은 깜짝 놀랐다.

“마마, 그러지 마십시오. 정신 바싹 차리고 이참에 황상을 뺏어 와야 합니다.”

“어떻게 뺏는단 말이냐?”

허 귀비는 그녀를 보며 참담한 미소를 지었다.

“본궁에게 알려 주려무나, 대체 어떻게 뺏는단 말이냐? 화본에서 본 제왕은 모두 무정하다더니 정말이었구나. 황상에게 본궁에 대한 애정이 어디 있단 말이냐…….”

“있습니다. 분명 있어요.”

금령이 말했다.

“황상께서는 마마께 후궁 전체를 관장하라고 맡기셨습니다. 그건 분명 마마를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곳 벽요궁은 황후궁인 봉명궁보다 규모가 더 커요. 이 모든 게 다 마마에 대한 황상의 애정이 분명합니다.”

“그게 뭐라고.”

허 귀비는 손수건으로 눈가를 닦으며 말했다.

“본궁에게 용종을 낳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는데.”

“황후 마마도 아이는 아직 없습니다. 다른 궁전 주인들도 없고요. 마마, 지금부터 노력하셔도 충분합니다.”

그때, 문가에서 어린 궁녀가 고개를 내미는 걸 발견한 금령은 가까이 다가갔다. 궁녀는 그녀의 귓전에 몇 마디를 속삭이더니 총총히 가 버렸다.

허 귀비는 벌써 평소의 도도함을 되찾았다.

“무슨 일이냐?”

금령은 머뭇거리며 말했다.

“황상께서 냉궁에 남아서 황후 마마와 점심 식사를 하셨다고 합니다.”

허 귀비의 아름다운 두 눈에서 불꽃이 번뜩였다. 그녀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일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금령은 또 입을 열었다.

“방금 금화궁에서 사람이 왔는데, 유 귀인의 병세가 더 심각해졌다고 합니다.”

“더 심각해지다니? 왜?”

“태의가 처방해 준 약의 용량이 너무 적어서 효과가 없다고 합니다.”

허 귀비는 허공 어딘가를 응시하며 냉랭하게 말했다.

“그럼, 태의에게 용량을 늘리라고 하거라.”

“네, 알았습니다.”

금령이 말했다.

“소인이 직접 다녀오겠습니다.”

* * *

낮잠을 자고 일어난 사봉봉은 금천아가 서책 한 묶음을 안고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의아해하며 물었다.

“어디서 이렇게 많은 서책을 가져온 거야?”

금천아가 환한 얼굴로 웃었다.

“황상께서 사람을 보내 가져다 드리라고 하셨대요. 마마께서 여기에 계시는 동안 너무 답답할 것 같아서 시간이라도 때우시라고요.”

사봉봉이 신발을 끌며 침상에서 내려왔다.

“황제께서 그리 마음을 써 주시다니, 감사 인사는 드렸어?”

“소인이 철없게 행동했겠습니까, 당연히 감사하다고 인사드렸지요.”

금천아가 겉옷을 들고 그녀에게 입혀 줬다.

“이번에 보니까, 황상은 참 훌륭하십니다. 우리에게 찻잎과 양초도 보내 주시고, 여기서 식사도 같이하고. 게다가 음식도 많이 남기신 덕분에 저희는 저녁 식사를 갖다 주든지 말든지 신경 쓰지 않아도 되잖습니까. 어쨌든 밥도 반찬도 다 있으니 따뜻하게 데우면 바로 먹을 수 있어요. 그리고 마마께 서책도 가져다 드리다니, 황상은 정말 세심하신 분이에요.”

“황상이 우리에게 잘해 준다고 생각해?”

“잘해 주시는 거 아니에요?”

금천아가 반문했다.

“허 귀비가 황후 마마의 봉인을 가져가려는 걸 황상께서 제지하셨잖아요. 이게 뭘 뜻하겠어요? 황상의 마음속에 오직 마마만이 황후라는 뜻이죠. 다른 사람들? 흥, 다 구석에 얌전히 있어야죠!”

사봉봉은 자리에 앉아 머리를 빗으며 웃었다.

“어떻게 된 거야? 이제 황상이 싫지 않아?”

“그동안은 황상께서 마마께 잘하지 않으니까 싫어했던 거죠. 마마에게 잘해 주시는데 소인이 왜 미워하겠어요? 좋아하기도 바쁘죠.”

금천아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타깝게도…….”

“뭐가 안타까워?”

“안타깝게도 황상께는 이미 첩이 있잖습니까. 그것만 아니면 마마께서 황상과 지내시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말이에요.”

사봉봉은 머리 장식을 들고 장난을 치며 말했다.

“그는 황제야. 단순히 첩이 있는 게 아니라, 하늘 아래 첩을 가장 많이 둘 수 있는 남자지.”

“하지만 태상황께서는 첩이 없잖아요.”

사봉봉은 어안이 벙벙했다.

“수백 년 동안 그런 황제는 겨우 한 명뿐이었어.”

금천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마, 만약에 황상께서 태상황처럼 첩을 들이지 않으면 황상을 좋아하실 겁니까?”

사봉봉은 곰곰이 생각해 봤다.

“세상에 만약이란 없어. 그러니 어떨지는 본궁도 모르겠구나.”

금천아는 웃으면서, 틀어 올린 머리에 장신구를 하나 꽂았다.

“마마, 부끄러우신 거죠?”

사봉봉은 탁자 옆에 앉아서 금천아가 가져온 서책을 펼쳐 보았다. 황제가 보낸 책이라기에 『여계女戒』나 『여훈女訓』처럼 여인의 규범에 관한 서책일 줄 알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몇 권의 시집을 제외하면 전부 이야기를 담은 화본話本이었다. 그녀는 어리둥절했다. 설마 황제가 평소에 이런 서책을 본단 말인가?

저녁이 되자, 사희가 친히 물건을 가져다주었는데, 부피가 너무 커서 태감 두 명이 안으로 가지고 들어와야 했다. 게다가 둘 곳이 없어서 침상에 올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사희가 예를 취하며 말했다.

“마마, 황상께서 소인에게 이것을 황후 마마께 보내어 소일거리로 삼으시라고 하셨습니다.”

기뻐서 깡충깡충 뛰어온 금천아는 허리를 숙이고 살폈다.

“이게 뭐죠?”

“조각 그림 맞추기입니다.”

사희가 설명했다.

“황상께서 조각 그림 맞추기를 좋아하셔서 온갖 게 다 있습니다. 황상께서 황후 마마는 머리 쓰는 놀이를 좋아하시는데, 이게 제일 어려우니 마마께 가져다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본궁 대신 황상께 감사 인사를 전해 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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