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27화
사봉봉은 천천히 일어섰다.
“전부 본궁 앞에 무릎을 꿇어라.”
시녀와 태감들은 겁먹은 기색이 역력했지만, 무릎을 꿇지 않고 다들 허 귀비를 바라봤다.
사봉봉은 황후의 봉인을 탁자 위에 탁 하고 내려놓으며 호통쳤다.
“황상께서는 아직 본궁을 폐위하지 않으셨으니, 본궁은 여전히 황후다. 너희들이 감히 반역을 저지르려 하는 것이냐!”
반역은 너무 엄청난 죄명이기에 아랫사람들은 서로 눈치를 보다가 다들 무릎을 꿇었다.
금천아는 마치 오리를 잡듯이 나이 든 궁녀의 멱살을 잡아 들어서 땅바닥에 내팽개쳤다.
궁녀는 똑바로 서지 못하고 땅에 쓰러졌다.
금천아는 일어나려는 그녀의 등을 밟았다.
“얌전히 무릎을 꿇고 앉아.”
사봉봉은 그제야 허 귀비를 바라보며 말했다.
“귀비, 더 이상 소란 피우지 말고 아랫사람들 데리고 돌아가십시오. 정말 소란이 일어나면 귀비한테도 좋을 게 없어요.”
그런데 허 귀비가 갑자기 황후의 봉인을 가져갔다.
“황상께서 계속 황후의 봉인을 가져와야 한다고 하셨는데 바빠서 겨를이 없었나 봅니다. 잘 되었습니다. 신첩이 황상께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사봉봉은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앉아서 차를 마셨다. 찻잔은 아직 온기가 남아 있었지만, 차향은 옅어졌다.
허 귀비는 찻잔을 보고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여기 찻잎이 있습니까?”
“방금 내무부에서 보내왔습니다.”
“밖에서 문과 창문을 고치는 것도 그럼 내무부에서 보낸 사람들입니까?”
사봉봉은 귀찮다는 듯 대충 대답했다.
“아마도요.”
허 귀비는 고개를 들어 궤 위에 놓인 양초를 바라보았다.
“냉궁의 규율에 따르면, 하루에 양초는 한 자루만 쓸 수 있습니다. 이건 어디서 난 양초입니까?”
“내무부에 직접 물어보시지요.”
허 귀비가 말했다.
“황상께서 신첩에게 후궁을 다스리라고 하셨으니, 이런 규율에 맞지 않는 일은 신첩이 알게 된 이상 수수방관할 수 없습니다.”
그녀가 금령을 불렀다.
금령은 즉시 양초를 수거했고 또 찻잎들도 꺼내 갔다. 그녀는 거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이곳에 또 다른 무엇을 숨겨 놓았을 거라는 생각에 사람들을 시켜서 집안을 뒤지게 하려고 했다.
그때 사봉봉이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누가 감히 일어서나 본궁이 지켜볼 것이다.”
나이 든 궁녀는 일어나려 했지만, 금천아가 여전히 밟고 있어서 아무리 버둥거려도 일어날 수 없었다.
금령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이 직접 수색했다. 황후는 여전히 위엄이 대단했지만, 자기 주인인 귀비 마마의 체면을 구기게 할 수는 없었다.
그녀가 수색하면서 일부러 물건을 땅바닥으로 집어 던지자,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금천아는 고함을 질렀다.
“망할 것! 수색을 하려는 거야, 아니면 몽땅 부수려는 거야!”
사봉봉이 그녀에게 손사래를 쳤다.
“원래 고물이었으니 내버려 두거라. 망가뜨리면 더 좋지, 새것으로 바꿔 와야 할 테니까.”
금령은 작게 중얼거렸다.
“곧 황후도 뭣도 아니게 될 텐데, 꿈도 야무지네.”
그녀는 문 쪽으로 갔다. 그런데 밖에 누가 서 있기라도 한 듯, 어떤 그림자 하나를 발견했다. 금령은 목을 길게 빼고 바라보다가 마치 온몸에 벼락을 맞은 듯 얼른 땅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말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황… 황, 황상.”
묵용린은 바깥에 서서 이 소란이 어떻게 마무리될지 계속 지켜보고 싶었지만, 금령에게 발각되었으니 안으로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을 힐끗 훑어보고 말했다.
“왜 이렇게 소란스러운 것이오?”
허 귀비가 예를 올렸다.
“황상, 오셨습니까? 신첩이 오랫동안 황후 마마를 뵙지 못해 어찌 지내시는지 보러 왔습니다.”
사봉봉은 황제가 왔다는 소리에도 화가 너무 치밀어 꼼짝하지 않고 그대로 앉아 있었다. 황제가 입구에서 한참 동안이나 듣고 있었으니, 분명 자신의 의견을 드러낼 터.
그녀는 사실 황제를 떠보고 싶었다. 묵용린은 속마음을 전혀 드러내지 않아서 심중을 헤아리기가 너무 어려웠다.
그러나 지금 상황이 그에게 아주 유리하다는 건 분명했다. 그는 도난당한 황금이 사가 상호와 전혀 무관하다는 것을 안다고 해도, 얼마든지 진실을 덮을 수 있었다.
그렇게 의혹을 사실로 만들면 그는 황후를 폐위할 수도, 꼴 보기 싫은 그녀까지 제거할 수도 있다. 또 사가 상호의 재물을 전부 국고에 환수하는 정당한 명분까지 생길 것이었다. 이런 일들은 권모술수에 능한 황제에겐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어젯밤에는 그런 말을 했고, 오늘은 사람을 보내서 문과 창문을 고치게 했으며 찻잎과 양초도 보내왔다. 왠지 좋은 예감이 들었다. 그녀는 자신이 사람을 잘못 보지 않았기를 바랄 뿐이었다.
사봉봉은 무릎을 꿇지 않았고, 금천아도 무릎을 꿇지 않은 채, 여전히 한 발로 그 궁녀의 등을 밟고 있었다. 땅에 무릎을 꿇은 노비들은 모두 고개를 숙인 채 숨도 크게 못 내쉬었다.
방 안은 일순간 침묵에 휩싸였다.
묵용린은 다른 사람에게는 눈길도 안 주고 금천아만 바라보았다.
“네 주인이 무릎 꿇지 않는다고 너도 무릎을 꿇지 않는 것이냐? 너도 주인이 되었느냐?”
황제가 콕 집어서 말하니 금천아는 어쩔 수 없이 무릎을 꿇었다. 그녀도 사리분별을 못 하는 것은 아니었다.
“황상, 부디 마마의 억울함을 살펴 주십시오.”
묵용린이 짐짓 놀란 척 작게 탄식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네 말은, 또 누군가 황후를 괴롭히고 있다는 뜻이로구나?”
옆에서 한참을 바라본 허 귀비는 황제가 황후의 측근에게마저 체면을 세워 주지 않자 퍽 흡족했다. 그러고는 다급히 수습에 나섰다.
“별일 아니었습니다. 아침에 금 마마嬷嬷가 식사를 전해 주러 왔는데 금천아가 밀어서 넘어졌습니다. 지긋한 나이에 이런 수모를 겪었으니 울분을 견디지 못한 금 마마가 신첩에게 달려와 하소연을 하였지요. 신첩, 늙고 약한 그녀를 가엾게 여겨서 전후 사정을 알아보러 온 것입니다. 그런데 금천아는 밀지 않았다고 발뺌을 하니, 그 바람에 소란이 일어났습니다.”
묵용린이 물었다.
“그 자리에 아무도 없었소?”
사봉봉이 담담하게 말했다.
“신첩이 있었습니다. 금천아는 금 마마를 밀지 않았습니다. 금 마마가 혼자 넘어진 겁니다.”
허 귀비가 금 마마를 힐끔 보며 말했다.
“황상께서 계시니, 할 말이 있으면 자네가 다 말하게.”
그녀의 속뜻을 알아차린 금 마마는 각오를 단단히 하고 입을 열었다.
“황상, 금천아가 소인을 분명히 밀쳤습니다. 황후 마마께서는 지금 그녀를 두둔하고 계십니다.”
묵용린은 잠시 침음에 잠겼다.
“또 그걸 본 다른 사람은 없느냐?”
사봉봉이 말했다.
“아침에 문과 창문을 고치는 사람이 둘 왔으니, 그들도 보았을 겁니다.”
황제가 따로 분부할 필요 없이 사희가 쏜살같이 뛰어나가 두 사람을 불러왔다.
두 장인은 확실히 보았다. 황제 앞에서 그들은 절대 거짓말을 하지 못하고 사실대로 말했다.
허 귀비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녀는 정말 금 마마가 맞은 줄 알고 그걸 핑계 삼아 황후의 기세를 꺾으려고 온 것이었다. 설마 금 마마가 거짓말을 고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황제는 엄숙한 표정으로 호통쳤다.
“감히 황후를 비방하다니! 겁이 없어도 유분수지. 황후가 이미 이자의 혓바닥을 자르라고 하명하는 것을 들었다. 한데 왜 아무도 나서지 않는 것이냐? 감히 황후의 명령을 듣지 않겠다는 것이냐?”
모두가 채 반응하기도 전에 시위대 두 명이 금 마마를 끌고 가려고 다가왔다. 금 마마는 감히 반항할 엄두도 내지 못했고 다만 목청 높여 울부짖을 뿐이었다.
“귀비 마마, 살려 주십시오! 소인을 제발…….”
그녀의 목소리는 높고 날카로웠는데, 마지막에는 찢어지는 듯 갈라져서 몹시 비참하게 들렸다.
허 귀비는 차갑게 굳은 표정으로 가만히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감히 자신마저 속이다니, 죽어 마땅했다.
사봉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실 그녀는 금 마마를 겁주려고 했을 뿐, 진짜 그렇게 할 생각은 아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황제가 그녀의 이름을 빌려 자신이 한 말을 사실로 만들어 버렸다.
그렇지만 그녀도 굳이 그 궁녀를 위해 인정을 호소하고 싶지 않았다. 입만 열면 거짓을 말하는 것을 보면, 궁중을 흐리는 능구렁이가 된 지 오래일 터. 그동안 얼마나 많은 짓을 해 왔는지 알 수 없으니, 약간의 교훈을 주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묵용린은 땅바닥에 무릎 꿇은 사람들을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일어나라. 그리고 별다른 일이 없다면 다들 돌아가거라. 황후는 이곳에서 심신을 다스리고 마음을 가다듬는 중이니, 방해받는 걸 싫어한다.”
허 귀비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었기에 그만 물러나려 예를 취했다.
그렇게 모두들 각자의 처소로 막 돌아가려는데, 묵용린의 시야에 금령이 들고 있는 것에 닿았다. 그는 곧장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게 무엇이냐?”
허 귀비가 얼른 나서서 설명했다.
“황상께 아룁니다, 저건 내무부에서 보내온 것들인데, 그들이 냉궁의 규율을 잘 모르고 보낸 것 같습니다. 본디 별것 아니긴 하지만 황상께서 신첩에게 후궁을 돌보라고 하셨으니 신첩, 감히 소홀히 넘길 수 없었습니다. 규율에 맞지 않는 것을 보았으니 관여할 수밖에요. 이것들은 규율에 어긋난 물품이니 다시 가져가라 명하던 참이었습니다.”
사봉봉은 황제가 뭐라고 말할지 궁금해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금천아는 몰랐지만, 그녀는 찻잎과 양초를 보낸 게 내무부가 아니라 황제라는 걸 알고 있었다. 내무부에서 보낸 거라 위장한 건 다른 사람이 모르게 하고 싶기 때문이었다.
사봉봉은 그 이유도 알 수 있었다. 바로 황제 자신의 체면을 위해서였다. 그도 그럴 것이 황제와 자신의 관계는 좀… 한 마디로 설명하기 어려웠다.
의외로 황제는 주저하지 않고 담담하게 시인했다.
“이것들은 내무부에서 보낸 것이 아니라 짐이 보낸 것이오.”
다소 의외의 대답에 사봉봉은 얼른 눈을 내리깔고 감정을 숨겼다.
허 귀비는 깜짝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하지만 곧 평소와 같은 표정으로 돌아왔고 심지어 옅은 미소를 짓기까지 했다.
“황상께서 보내신 것이라면 그대로 두겠습니다. 황후 마마께서 고생하시는 걸 차마 볼 수 없는 황상의 마음을 신첩도 이해합니다. 규율만 아니라면 신첩도 황후 마마를 더 살뜰하게 보필해 드리고 싶었습니다.”
금령은 그녀의 말을 듣고 자연스레 물건들을 내려놓았다.
그런데 허 귀비가 두어 걸음 발을 뗐을 때, 황제는 그녀를 다시 불러 세웠다.
“잠깐.”
발걸음을 멈춘 허 귀비는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소매 안으로, 주먹 쥔 손은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정도로 힘이 들어갔다.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과연, 황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귀비, 황후의 물건을 돌려주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