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26화
기분이 상한 궁녀가 걸걸한 목소리로 악담을 쏟아냈다.
“쳇, 한마디 물은 것 가지고, 성깔이 아직 대단하네? 자기가 아직도 봉명궁 사람인 줄 알지? 꿈도 꾸지 말고 여길 잘 봐. 이제 네가 있어야 할 곳은 여기야!”
화가 난 금천아가 소매를 걷어붙이고 덤비려고 하자, 그 궁녀는 자신이 그녀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얼른 몸을 돌려 밖으로 도망가며 소리쳤다.
“난리 났네, 난리 났어. 미친개가 사람을 두들겨 패네! 난리 났어…….”
그 궁녀는 문가까지 달려가다 문턱에 걸려 넘어졌고, 뒤를 돌아보니 금천아는 쫓아오지 않고 복도에 그대로 서 있었다.
금천아는 그 광경에 허리도 못 펼 정도로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그 궁녀는 수치심과 분노로 고함을 질렀다.
“두고 봐!”
금천아는 아직도 웃고 있었고, 사봉봉은 그런 그녀를 쿡 찌르며 타박했다.
“저 사람은 뭐 하러 건드려? 내일은 이 찐빵마저 없으면 어떡하려고?”
아침 식사는 차갑게 식은 찐빵 두 개였다. 다행히 아직은 날씨가 춥지 않아서, 찬 찐빵을 물과 함께 먹으면 삼킬 수는 있었다.
사봉봉은 금천아가 찐빵 한 개를 다 먹자, 자기 것을 반으로 쪼개서 그녀에게 주었다. 하지만 금천아는 받지 않았다.
“마마, 드세요. 전 배불러요.”
“배가 부르긴, 한 끼에 밥을 세 공기씩 먹으면서.”
사봉봉이 말했다.
“본궁은 잘 삼키지 못할 것 같으니 조금만 먹으면 된다. 그리고 지금은 네가 배불리 먹어 둬야 해. 누가 찾아와서 트집을 잡으면, 네가 책임지고 그들을 물리쳐야지. 네가 힘이 없으면 어떻게 되겠어?”
담담한 그녀의 말투에는 익살스러운 어조가 뒤섞였다.
사봉봉은 금천아를 웃기려고 했지만, 금천아는 오히려 마음이 더 무거웠다.
위풍당당한 황후가 이런 지경이 되었는데도 , 정작 당사자인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사람처럼 서책 두 권만 가지고 와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사는 곳도 불편하고 음식도 맛이 없었지만, 밤에는 도리어 편안하게 잤다. 어제는 심지어 안뜰에 무성한 풀을 뽑고, 채소를 기를까 궁리하기도 했다. 그렇게 하면 그녀들도 신선한 채소를 먹을 수 있게 될 거라면서 말이다.
평소 이곳 냉궁은 아주 조용한데, 지금은 문과 창문을 고치려고 온 사람들로 뚝딱뚝딱 시끄러웠다. 그래도 소음이 있으니 오히려 사람 사는 곳 같았다.
금천아는 두 장인에게 물을 떠 주기도 하고 일손을 돕기도 했다. 그녀는 힘이 좋아, 사람보다 더 길고 두꺼운 나무판자를 한 아름에 두세 개씩 옮길 수 있었다. 그걸 보고 두 눈이 휘둥그레진 장인들은 이따금 그녀에게 몇 마디 말을 건넸다.
사봉봉은 복도에 앉아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금천아는 허 귀비가 문과 창문을 고치라고 사람을 보낸 것이니, 분명 다른 꿍꿍이가 있을 거라 말했다.
하지만 사봉봉은 허 귀비가 아니라 묵용린이 보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어젯밤에 떠날 때 표정이 좀 이상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문 앞까지 나가 배웅했는데 그는 그녀에게 무슨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머뭇거렸지만,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그렇게 쿵쾅쿵쾅 소란스럽게 문과 창문을 고치고 있는데, 저쪽에서 누군가 찾아와 문을 두드렸다.
사봉봉은 금천아가 일하느라 알아차리지 못하자 직접 마중을 나갔다.
그녀를 찾아온 사람은 소태감이었다. 그는 작은 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사봉봉을 발견한 그는 공손하게 예를 취하며 문안 인사를 건넸다.
사봉봉이 일어나라고 손짓하며 물었다.
“무슨 일로 왔는가?”
소태감은 그녀에게 바구니 속에 든 물건을 보여 주며 말했다.
“소인, 마마께 찻잎과 양초를 가져다드리러 왔습니다.”
사봉봉이 물었다.
“누가 이걸 가져다주라고 했단 말인가?”
소태감은 얼른 대답했다.
“내무부입니다.”
그때, 어디선가 튀어나온 금천아가 소태감이 들고 있던 바구니를 가져가며 말했다.
“내무부 왕 대인이 보낸 거죠? 마마를 대신해서 감사 인사를 전해 줘요.”
갑자기 자기보다 키가 큰 궁녀가 앞을 가로막자, 소태감은 깜짝 놀라 알겠다고 대답하고 자리를 떠났다.
금천아가 바구니 안의 물건을 만지작거리며 답답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허 귀비가 대체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 거죠? 사람을 보내서 이런 걸 가져다주는 이유가 뭘까요?”
“내무부에서 보낸 거야.”
“허 귀비가 입을 열지 않으면 내무부가 감히 이런 걸 보내겠어요?”
“누가 보낸 건진 신경 쓰지 말거라. 보내온 물건이니 우리는 받기만 하면 돼.”
“옳은 말씀이세요. 이제 우리는 차도 마실 수 있고, 마마께서 저녁에 서책을 보실 때도 촛불을 두 개 켤 수 있겠네요.”
금천아는 바구니를 들고 기뻐하며 안으로 들어가더니 곧바로 물을 끓여서 사봉봉에게 차를 타 주었다.
사봉봉은 오랜만에 방 안 가득 퍼지는 차향에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감탄했다.
“좋은 찻잎이네.”
금천아가 말했다.
“마마, 향기만 맡아도 좋은 찻잎인지 아닌지 알 수 있으세요?”
“당연하지.”
사봉봉은 웃으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본궁이 상인 집안의 딸인 것을 벌써 잊어버렸느냐? 본궁의 손을 거쳐 간 찻잎 품종이 백 가지까진 안 되어도 팔십 가지는 넘을 거다. 좋은지 나쁜지도 구분하지 못하면 어떻게 장사를 할 수 있겠어?”
금천아는 찻잔을 그녀의 앞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럼, 한 모금 맛보시고 어떤 차인지 맞혀 보세요.”
사봉봉은 찻잔을 들어 뚜껑을 열고 찻잎을 걷어낸 후, 한 모금 마셨다. 그런데 정말 무슨 차인지 알아낼 수 없었다.
금천아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마마, 어떠세요?”
“차가 너무 뜨거워서 조금밖에 못 마셨어. 한 모금 더 마셔야겠다.”
사봉봉은 차를 몇 번 불어서 식힌 뒤에 한 모금 더 마셨다. 입 속에 남아 있는 차향을 자세히 음미했지만, 견식이 넓은 그녀도 단박에 무슨 찻잎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우전차 같기도 하면서, 고산차 같기도 하고, 또 약간은 약한 불에 덖은 운이차 같기도 했다.
“마마, 도저히 모르시겠죠?”
금천아는 허리에 손을 얹고 우렁차게 웃었는데 그 웃음소리가 멀리까지 울려 퍼졌다.
허 귀비는 문 앞에 도착하기도 전에 금천아의 웃음소리를 듣고 발걸음을 늦췄다. 그녀의 안색은 평소와 다름이 없었지만, 금령은 옆에서 냉소를 지었다.
“여기에서 사는 게 참 즐겁나 보네요.”
소태감이 앞으로 나가 문을 열어 주었다.
안뜰에 들어선 허 귀비는 손수건으로 코를 막았다. 사실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았지만, 안뜰에 잡초가 무성하고 여기저기가 다 썩고 지저분한 게 황량하고 더러워 보였기에 무의식적으로 한 동작이었다. 이런 곳은 당연히 더럽고 퀴퀴한 냄새가 날 거라고 생각했다.
허 귀비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도 사봉봉은 별로 놀라지 않았고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
“귀비, 웬일로 이곳을 다 찾아 주었어요?”
허 귀비도 담담하게 웃었다.
“황상께서 신첩에게 후궁을 돌보라고 하셨는데 너무 바쁘니 잊어버리는 일이 종종 생기곤 합니다. 진작 와 봤어야 했는데, 송구합니다.”
“귀비,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일 뿐입니다.”
“이왕 이렇게 오셨으니 좀 앉으시지요.”
사봉봉은 자리를 권하고 자신이 먼저 앉았다. 비록 냉궁에 있다지만 황후의 기개는 과거 어느 때처럼 충만했다.
허 귀비는 낡은 의자를 힐끗 쳐다보며 망설이다가 끝내 앉지 않았다.
사봉봉은 눈가에 웃음기를 머금은 채 물었다.
“귀비,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요?”
“신첩은 그저 황후 마마께서 잘 지내시는지 뵈러 왔습니다.”
“그럼, 다 봤겠네요. 본궁은 잘 지내고 있어요.”
사봉봉이 말했다.
“다른 일이 없으면 귀비께서는 그만 돌아가 보세요. 여기는 정말 오래 머무를 곳이 아니니까요.”
그녀의 말에 꿈쩍도 하지 않던 허 귀비는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
“아침에 식사를 나르던 궁녀가 황후 마마의 사람에게 맞았다고 해서 신첩이 대신 시시비비를 가리려고 합니다.”
그녀의 말에 금천아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막 발을 동동 구르려던 참이었다.
사봉봉이 눈짓을 보내 금천아를 제지하고 웃으며 나섰다.
“본궁은 귀비가 똑똑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어째서 나이 든 궁녀에게 이렇게 휘둘리는 거죠? 천아는 그녀를 때리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혼자 문 앞에서 문턱에 걸려 넘어진 거예요.”
그러자 금령이 그 궁녀를 밀쳐 앞으로 내보냈다.
그 궁녀는 털썩 무릎을 꿇더니 울상을 지었다.
“귀비 마마, 금천아가 소인을 밀어서 넘어뜨린 겁니다. 다 늙은 몸으로 어떻게 그녀의 힘을 당해 낼 수 있겠습니까? 하마터면 영영 일어나지 못할 뻔했습니다. 부디 소인의 억울함을 풀어 주시옵소서.”
사봉봉은 피식 비웃음을 지었다.
“지금 자네의 말뜻은 본궁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인가?”
나이 든 궁녀는 원래부터 약자에게는 강하고 강자에게는 약한 소인배였다. 다들 황후가 냉궁에 갇혔으니 십중팔구는 다시 돌아오지 못할 거라 말하니, 그녀는 당연히 허 귀비의 환심을 사려고 했다. 황후는 별로 안중에 두지 않았다.
“황후 마마께서는 금천아가 소인을 밀치는 것을 보고도 박장대소를 터뜨리셨습니다.”
사봉봉의 얼굴에 웃음기가 더욱더 짙어졌다. 이 궁녀는 사실을 교묘하게 왜곡하는 솜씨가 대단했다. 그녀는 정색하고 궁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황후를 모독하면 어떤 벌을 받는지 아느냐?”
나이 든 궁녀는 중얼거렸다.
“여기에서 나갈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황후인 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사봉봉이 말했다.
“입이 아주 못됐구나. 천아, 이자의 혓바닥을 잘라 버려라.”
궁녀는 그녀의 말을 듣고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허 귀비가 여기 있는데 누가 감히 자신을 건드릴 수 있겠는가?
그러나 금천아가 정말 비수를 뽑았고 눈처럼 하얀 칼날이 시퍼렇게 빛나자, 그녀는 그제서야 덜컥 겁이 나 허 귀비의 발아래에 바싹 엎드렸다.
“마마, 저 천한 것이 소인의 혀를 자르려고 합니다!”
허 귀비가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어딜 감히!”
그런데 금천아는 정말 비수를 들고 가까이 오더니 단번에 궁녀를 끌어당겼다.
궁녀는 겁에 질려 울부짖었다.
“마마, 살려 주십시오. 마마, 제발 소인 좀 살려 주십시오…….”
허 귀비는 안색이 하얗게 질렸고, 금령은 뒤따라오던 사람들을 향해 소리쳤다.
“얼른 저 방자한 것을 잡아들이지 않고 뭘 멀뚱멀뚱 보고만 있는가!”
허 귀비는 외출할 때 위신을 중시해서 항상 많으면 열 명, 적으면 여덟 명을 데리고 다녔다. 궁녀뿐만 아니라 태감도 함께였다.
금령의 명령을 듣고 태감 두 명이 금천아를 잡기 위해 앞으로 나섰다.
사봉봉이 일갈했다.
“무엄하다!”
그녀는 평소에 아주 온화하게 아랫사람을 대했지만, 일단 화가 나면 서릿발같이 싸늘한 그녀의 호통은 굉장히 위협적이었다.
그 순간 묵용린도 문가에 서 있었는데, 오죽하면 그까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아서 들어가려던 발걸음이 멈출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