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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1125)화 (1,125/1,192)

제1125화

묵용린은 요 며칠간 왠지 모르게 마음이 불편했다. 가난청과 바둑을 둘 때도 정신을 집중할 수 없었다.

가난청은 벌써 황제의 상태를 알아차렸지만, 입을 다물고 섣불리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떠나기 직전에서야 한마디 했다.

“황상, 뜻은 마음에서 비롯되고 마음으로 인해 소멸합니다. 만약 마음을 정할 수 없다면, 차라리 한번 가서 만나 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묵용린이 무슨 말인지 물어보려는 찰나에 가난청은 예를 취하고 돌아가 버렸다.

‘한번 만나 보라고? 누구를 만나라는 거지?’

저녁 식사를 마친 후 묵용린은 밖을 천천히 걸었다.

여름이 아직 가지 않았지만 가을은 이미 성큼 다가와 있었다. 산들바람에 낙엽이 살랑살랑 떠다니는 게 마치 길을 잃은 나비처럼 돌아갈 곳을 잊은 듯했다.

묵용린은 그 낙엽을 따라 목적 없이 걸었다.

그러다가 낙엽이 땅바닥에 슥 떨어지자, 그는 고개를 들었고 자신이 얼마 걷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바로 앞에 희미하게 보이는 궁전은 봉명궁이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한참 바라보다가 봉명궁을 돌아 서쪽으로 갔다.

날은 점점 어두워지는데, 그는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황제가 홀로 있을 때, 곁에 있는 시종들은 감히 가까이 가지 못했다. 등롱을 들고 멀리서 비추던 사희는 왠지 모르게 마음이 불안했다.

묵용린은 후궁을 크게 돌아 마침내 냉궁에 도착했다.

오늘 밤은 유난히 하늘이 어두웠다. 달빛은 쓸쓸했으며 별들도 그 빛을 잃었다.

보초병은 문가에 기대어 졸다가 인기척을 듣고 얼른 눈을 떴다. 매우 당황하여 막 무릎을 꿇고 예를 취하려고 하는데, 묵용린은 손을 휘휘 흔들더니 문을 가볍게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뒤에 남은 보초병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멍한 얼굴로 황제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안뜰은 어두컴컴하여 길이 보이지 않았고, 아무렇게나 자란 잡초가 그의 옷자락을 스쳤다.

문 앞에 이르자 그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서 있었다. 문틈이 매우 커서 빛이 새어 나왔다. 그는 가까이 다가가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작은 팔선상에 촛불이 하나 켜져 있었다. 콩알만 한 불빛으로 온 집안을 비추고 있으니 실내가 너무 어둡게 느껴졌다.

그 작은 불빛 위로, 탁자 옆에서 여유롭게 서책을 읽고 있는 사봉봉의 얼굴이 보였다. 그녀는 긴 속눈썹을 드리우고 있었는데, 불빛이 밝지 않아서 그런지 눈을 두어 번 비볐다.

그 장면은 그를 순식간에 몇 년 전 기억으로 날려 보냈다.

사봉봉이 아홉 살쯤 되었을 것이다. 그는 흉계를 꾸며 그녀를 어두운 골방에 가둬 버렸다. 그녀가 울기를 바랐지만 결과는 달랐다. 몰래 가 보니 그 소녀는 얇은 홑겹 옷을 입은 채 탁자 앞에 앉아서 서책 읽기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때의 표정이 지금과 거의 다르지 않았다. 그의 뇌리에서 두 장면이 점점 하나로 겹쳐졌다…….

넋을 놓고 보고 있는데 갑자기 날카로운 검풍劍風이 뒤에서 불어왔다.

묵용린은 기민하게 반응해 문을 들이받으며 옆으로 휙 피했고, 뒤에서 그를 공격한 사람은 발걸음을 멈추지 못하고 그대로 안으로 튕겨 들어갔다.

사봉봉은 그 요란한 소리에 얼른 고개를 들었는데, 묵용린이 온 것을 보고 의외라는 표정을 짓더니 얼른 일어나 예를 취했다.

땅바닥에 엎어진 금천아도 재빨리 일어났지만, 표정은 어리둥절했다.

사봉봉이 나지막하게 그녀를 일깨웠다.

“황상께 얼른 인사드려야지.”

금천아가 털썩 무릎을 꿇었다. 아마도 후환이 두려웠을 것이다. 문틈으로 훔쳐보는 사람이 황제일 줄 그녀가 어찌 알았겠는가? 제아무리 그녀가 소처럼 건장한 몸이라지만 살짝 떨려 왔다.

“소인, 황, 황상께 문안을 여쭈옵니다.”

묵용린은 금천아를 말없이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걸 죽여서 입을 막아야 하나…….’

사봉봉은 황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진 걸 보고 서둘러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황상, 천아는 황상께서 바깥에 계신 줄 몰랐습니다. 부디…….”

묵용린은 갑자기 손을 들어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무엇이 두려운 것이오? 이 애에겐 면사 금패가 있지 않소?”

사봉봉은 속으로 바싹 긴장한 채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과연, 다음 순간 묵용린은 냉소하며 말했다.

“황후도 담이 보통 큰 게 아니군. 감히 짐이 하사한 물건을 노비에게 건네다니.”

황제가 사봉봉을 탓할까 봐 두려운 나머지 금천아는 즉시 품속에서 면사 금패를 꺼내어 사봉봉의 손에 쥐여 주었다.

“마마께서는 소인에게 주지 않으셨습니다. 이건 여전히 마마의 것입니다.”

사봉봉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원래 절대 그런 일은 없다고 잡아떼려고 했는데, 이제는 그러지도 못하게 되었다.

묵용린은 황당해하는 그녀의 표정을 보니 어쩐지 웃고 싶어졌고, 뒤숭숭했던 기분이 싹 가셨다.

“둘 다 일어나시오.”

얼른 일어나 금천아를 일으켜 준 사봉봉이 난처한 듯 말했다.

“이곳은 너무 누추해서 황상께 대접해 드릴 것이 없습니다. 황상께서는 무슨 일로 절 찾아오셨습니까?”

묵용린은 그녀가 선을 긋겠다는 듯이 더는 스스로를 신첩이라는 칭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차렸다. 안색이 차갑게 가라앉은 그는 의자가 더럽든 말든 아무렇게나 털썩 앉으며 입을 열었다.

“짐이 여기까지 온 건, 당연히 황후에게 할 말이 있기 때문이오.”

사봉봉은 금천아에게 문밖을 지키라고 눈짓했고, 자신은 묵용린에게 다가가 물 한 잔을 따라 주며 말했다.

“찻잎이 없으니, 아쉬운 대로 이거라도 드십시오.”

묵용린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찻잎도 없단 말이오?”

사봉봉이 피식 웃었다.

“황상, 여긴 냉궁입니다.”

“…….”

“무슨 일로 저를 찾으셨습니까?”

묵용린은 도무지 참을 수 없었다.

“사봉봉, 예법을 다 잊어버린 것이오? 짐 앞에서 어찌 칭해야 하는지 모르는 것이오?”

사봉봉은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

“신첩이라 칭해야 합니다.”

그러고는 짤막하게 말했다.

“무슨 일로 신첩을 찾으셨습니까?”

묵용린이 말을 안 하니, 사봉봉도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일순간 방 안엔 어색하고 답답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촛불만 간간이 흔들리며 얼룩덜룩한 탁자 아래로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한참이 지나서야 묵용린이 입을 열었다.

“짐에게 솔직히 말해 보시오. 남원의 그 황금은 도대체 사가 상호와 관련이 있는 거요, 없는 거요?”

사봉봉은 그를 올려다보며 오히려 반문했다.

“황상 마음속에 이미 답이 있는데, 왜 신첩에게 다시 물어보시는 겁니까?”

“짐이 물으면 대답하시오.”

“전혀 상관없습니다.”

사봉봉은 시원시원하면서도 단호하게 대답했다.

“짐에게 이유를 말해 줄 수 있소?”

“사가는 이미 동월에서 제일가는 부자인데, 왜 황금을 훔치겠습니까?”

“탐욕 때문이지.”

묵용린은 그녀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장사꾼의 탐욕이라면 어떤 괴상한 짓도 할 수 있지. 얻어도 얻어도 더 많은 것을 원하니까. 영원히 만족할 줄 모르지.”

“황상께서는 저희 사가가 그런 곳이라고 여기십니까?”

“짐은 당신들의 장사 수완을 본 적이 있소.”

사봉봉은 피식 웃었다.

“황상께서는 지금 어렸을 적에 신첩과 신첩의 모친이 태후께 조그마한 장난감을 팔았던 걸 말씀하시는 겁니까? 황상께서는 저희가 정말로 장사하기 위해 입궁한 줄 아십니까? 그때 저희가 태후를 농락하고 홀렸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설마 아니었다는 말이오?”

사봉봉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황상, ‘정’이란 말을 아십니까? 모친과 태후 마마께서는 평생 정을 나눈 사이셨습니다. 태후께서 궁중을 답답해하는 걸 아시고, 모친께서는 일정한 기간마다 찾아뵙고 밖에서 있었던 재미난 이야기를 전해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장난감들은 모친께서 상대 인솔자에게 특별히 당부하셔서 구해 온 것들입니다. 황상께서는 잘 모르시겠지만, 그런 것들은 쉽게 구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때로는 위험할 수도 있지만 아무리 어려워도, 얼마가 들어도 모친께서는 상대 사람들에게 물건을 가져오게 하셨습니다. 그건 절대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태후 마마의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태후 마마와 모친의 눈에, 그 물건들은 감히 돈으로 셀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건 정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황상만이 저희가 태후 마마를 속이고 장사하는 간교한 장사꾼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묵용린은 어안이 벙벙했다. 그는 똑같은 일이 이렇게 사람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도 있다는 걸 여태껏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 사봉봉의 해석은 그의 심장에 깊은 감명을 남겼다.

* * *

이튿날 아침, 금천아가 사봉봉의 머리 손질을 돕고 있을 때 밖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그녀가 흠칫 놀라며 말했다.

“오늘은 아침 식사를 벌써 가져왔나?”

나와서 보니, 식사를 가져다주는 사람이 아니라 건장한 사내 둘이 찾아왔다.

남자가 두 명이나 안뜰로 들어오자, 금천아는 잔뜩 경계하며 그들을 바라봤다.

“너희들은 뭐 하는 놈들이냐?”

안으로 들어오던 두 남자는 복도에 누가 서 있는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기에 깜짝 놀랐다. 눈을 들어 보니 건장한 궁녀가 매섭게 노려보는 중이었다. 그들은 약간 겁에 질려 솔직하게 대답했다.

“저희는 내무부 장인들입니다. 명을 받들어 문과 창문을 고치러 왔습니다.”

그 말을 듣고 금천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혹여 누군가가 사봉봉에게 어려움이 닥친 틈을 타 그녀를 업신여길까 봐 두려웠는데 아니라니, 다행이었다.

그런데 왠지 의심이 들었다. 지금은 허 귀비가 권력을 잡았는데, 그녀가 뭐 하러 그들에게 호의를 베풀어 문과 창문을 고쳐 줄 사람을 보냈겠는가? 그건 고양이가 쥐를 생각하는 격이었다. 절대로 좋은 마음으로 할 리가 없었다.

사봉봉이 나오며 물었다.

“무슨 일이야?”

금천아가 두 남자를 가리키며 대답했다.

“저들이 문과 창문을 고치라는 명을 받았다고 합니다.”

사봉봉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칠 수 있으면 더 좋지. 이제 가을이 다가오니 저녁에는 바람이 강하게 불잖아.”

그녀들이 막 안으로 들어가려 할 때, 입구에 또 누군가 왔다. 이번에는 아침 식사를 배달하러 온 사람이었다. 식사를 전달하는 나이 든 궁녀도 낯선 남자들이 있는 것을 보고 의아해하더니, 걸어가며 계속 그들을 살폈다. 그러다 금천아에게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뭐 하는 놈들이지?”

그녀에게서 바구니를 건네받은 금천아는 천을 걷어 보니 역시 찬 찐빵이었기에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왜 저한테 물어보세요? 궁금하면 직접 물어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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