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24화
묵용청양이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고 앉자, 영안이 물 한 잔을 건네며 말했다.
“우선 물부터 한 잔 마시고 말해.”
사양하지 않고 고개를 젖혀 물을 벌컥벌컥 마신 묵용청양은 빈 잔을 탁자 위에 쾅 하고 내려놓으며 말했다.
“너는 어째서 매일 여기에 있어? 사건 조사는 하지도 않을 거야?”
영안은 그녀의 안색을 힐끔 살피며 물었다.
“왜 이렇게 화가 났어? 누가 또 너를 건드렸어?”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어! 단지 빨리 사건을 해결해서 봉봉을 꺼내 주고 싶을 뿐이야. 지금은 무슨 일이든 봉봉이 다 직접 해야 한다고. 손바닥에 굳은살이 박힐 지경이야.”
영안도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나도 지금은 아무런 방법이 없어. 단서가 하나도 없는걸.”
“단서가 없기는!”
묵용청양이 말을 이었다.
“사가 은장에 은표를 은자로 교환하겠다는 사람들이 몰려왔어. 게다가 전부 거액의 은표야. 이건 분명 누군가가 배후에서 음모를 꾸미고 있는 거야. 봉봉은 분명 사가에 원한을 가진 사람일 거라고 했어.”
“황후는 그게 누군지 알고 있어?”
“모른대. 장사하다가 작은 갈등은 있었지만, 지금 저들은 사가를 벼랑 끝으로 몰아붙이고 있잖아. 그런 불구대천의 원한을 산 사람은 기억나지 않는대.”
영안이 물었다.
“은표 교환에 어떻게 대응하겠다는 건 말하지 않았어? 계속 그런 상황이 벌어지면 안 좋을 텐데?”
“봉봉이 임안성 부근에 있는 분점에서 은자를 모아서 본점으로 보내라고 했으니까 사가 상호가 그렇게 쉽게 무너지지는 않을 거야.”
영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좋은 방법이네.”
* * *
사봉봉의 예측은 틀리지 않았다.
닷새째 되는 날, 분점 발행 은표가 발견되었고 그 수량도 적지 않았다. 관리인은 사앵앵의 분부대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모두 은자로 바꿔 주었다.
이어서 천 냥짜리 가짜 은표가 발견되었다. 사가 상호의 은표는 사봉봉이 직접 설계한 것으로, 어떤 부분은 모방하려 해도 미세한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관리인은 특별히 경험 많은 점원을 몇 명 골라 은표를 검사하게 했고, 그렇게 하루 만에 가짜 은표를 십여 장 찾아냈다.
가짜 은표를 들고 온 사람은 당연히 그게 가짜라는 걸 알고 있었고, 상황이 생각대로 되지 않자 곧바로 도망가 버렸다. 점원들은 각자 맡은 직책이 있어서 은장을 비울 수 없었기에 그 사람을 추격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었지만, 소란을 다 지켜본 구경꾼들이 있었기에 그 일은 파다하게 퍼졌다.
백성들은 사가 상호에 호의적이었다. 여러 해 동안 사가 상호는 상도의를 잘 지켜 왔고 빈부를 차별하지 않았다. 가게를 찾은 손님이라면 그게 누구든 똑같이 공손하게 대했기에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렇기에 자연히 누구나 사가 상호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사가 상호는 매년 창고를 개방하고 죽을 끓여서 선행을 베풀었다. 다른 가게들은 남에게 보여 주기 위해 선행을 베풀었고, 나눠 주는 죽도 투명할 정도로 묽었다.
하지만 사가 상호는 달랐다. 사가 상호에서 나눠 주는 구수한 흰 쌀죽과 커다란 찐빵은 그들의 가게에서 파는 것과 똑같았다. 때로는 가난한 사람에게도 외상으로 물건을 팔거나, 물건 값을 감면해 주곤 했다.
그렇게 조금씩 쌓아 온 신뢰를 바탕으로 사가 상호는 사람들의 인정을 받게 되었다.
도난당한 황금이 사가 은장에서 발견된 이후에도 백성들은 모두 사가 상호가 누명을 쓴 것이라 믿었고, 은장에 가서 자기 돈을 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누군가 가짜 은표로 은자를 바꾸러 왔었다는 소문까지 나자, 사람들은 더욱더 사가 상호가 모함을 당했다고 생각했다.
저잣거리에서 차를 마시거나 식사 후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은 다들 사가 상호에 관한 이야기로 여념이 없었다.
그런데 임안성 근처에 있던 은장 분점에서 은자를 모아 본점으로 보내는 과정에서 그것들을 모두 도난 당했다.
사가 상호의 입장에서는 정말 설상가상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사가 상호를 벼랑 끝으로 몰아붙이는 사람이 있고, 그자는 은표 교환을 통해 사가 은장을 무너뜨리려고 한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은자를 도둑맞았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백성들은 의분에 떨었다. 비록 그들이 직접적으로 도와줄 수는 없었지만 사가 상호를 대신하여 불만을 몇 마디 토로하는 건 할 수 있었다.
저잣거리의 여론이 일시에 들끓었고, 다들 그 흑심을 품은 배후의 주모자에게 욕설을 쏟아 냈다. 심지어 어떤 언관은 상주서를 올려 사가 상호를 두둔했다.
묵용린은 용상에 앉은 채 백성들의 반응을 전하는 관원들을 내려다보았다. 그들의 말을 들으며 사가 상호가 백성들에게 이렇게 인망이 두텁다는 걸 처음 알았다. 그동안 사가에서 하찮아 보이지만 마음이 따뜻해지는 일을 많이 했다는 말에, 사앵앵 모녀가 간사한 장사치라는 그의 생각도 조금 달라졌다.
그러나 여론만으로는 사가 상호의 무고함을 증명할 수 없었다. 어떤 조정 대신이 나와서 모든 것은 증거로 말해야 한다고 반박했다. 어째서 도난당한 황금이 사가 상호의 은장에서 발견되었는지 설명하지 못하면 사앵앵의 결백을 증명할 수 없다는 게 요지였다.
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곧바로 몇몇이 지지한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그러자 사가 상호의 억울함을 호소하던 관원들도 물러서지 않으며 한바탕 말싸움이 벌어졌다.
그들이 말싸움을 벌이는 동안 잠시 침묵에 빠져 있던 묵용린은 하염없이 떠드는 조정 관리들에게 고함을 질렀다.
“뭐가 이리 소란스러운가! 이번 일은 환경문에서 조사를 진행 중이니, 모든 의혹이 다 밝혀질 것이네. 억울하게 누명을 쓰는 사람도 없을 것이며, 간악하게 술수를 부린 사람은 합당한 처벌을 받을 것이야.”
말을 마친 황제는 더 이상 올릴 상주서가 있는지 없는지도 신경 쓰지 않고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단폐를 내려왔다.
왕장량이 다급히 소리쳤다.
“퇴청하시오!”
그는 불진을 안고 다급히 황제를 쫓아갔다.
묵용린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린 문무백관들은 다들 입을 다문 채 허리를 숙여 황제를 배웅했다.
비록 황금이 돌아왔지만, 묵용린의 기분은 나아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나빠졌다. 사봉봉에 대한 실망이 너무 컸다. 모처럼 두 사람의 사이가 좀 편안해졌는데 이런 일이 터지고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갔다.
그도 사앵앵은 그런 일을 하지 않았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는 제왕이었고, 의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친한 사람 몇 명을 제외하면 진정으로 누군가를 믿지 않았다.
길가에 서 있던 허 귀비는 멀리서 황제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급히 허리를 깊게 숙이며 예를 갖췄다.
하지만 황제는 그녀를 발견하지 못했는지 본체만체하고 그냥 지나쳤다.
“…….”
왕장량도 잠시 어안이 벙벙했다. 그는 얼른 다가가 작은 목소리로 황제를 일깨웠다.
“황상, 귀비 마마께서 문안드리십니다.”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선 묵용린은 여전히 그녀에게 다가가지 않은 채 담담하게 말했다.
“일어나시오.”
허 귀비는 그제야 일어나 입을 열었다.
“황상, 조회를 마치셨습니까?”
“그렇소.”
묵용린이 물었다.
“귀비는 이곳에서 짐을 기다린 것이오?”
허 귀비는 교태를 부리며 말을 얼버무렸다.
“신첩, 황상을 뵌 지 오래된 듯하여…….”
묵용린은 어리둥절했다. 그래서 어찌 하려고?
“귀비가 요즘 후궁을 대신 관장하느라 수고가 많소. 너무 무리하지 말고 쉬도록 하시오. 짐을 걱정할 필요 없소.”
“신첩, 고생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허 귀비가 그에게 몇 걸음 다가오자, 장미 향기가 콧속으로 파고들었다.
묵용린의 미간이 아무도 모를 만큼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뒤로 물러서고 싶었지만 그는 허 귀비의 체면을 생각하며 겨우 참았다.
“황상, 신첩이 후궁을 관장하는 데 별 어려움은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
그녀가 잠시 곤란하다는 듯 머뭇거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신첩에게 봉인이 없어, 어떤 문서들은 신첩이 낙관을 할 수 없습니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묵용린은 한 마디 했다.
“봉인은 황후가 가지고 있소.”
그리고 그는 그냥 가 버렸다.
허 귀비는 그의 말뜻을 한참 동안이나 헤아렸으나 끝내 파악하지 못했다. 봉인을 황후가 가지고 있으니 받아다가 가져다주겠다는 건가? 아니면 봉인이 황후의 손에 있으니 줄 수 없다는 말인가?
묵용린은 앞으로 몇 걸음 걸어가다가 갑자기 뒤를 돌아보았다.
허 귀비는 반가워하며 따라가려 했는데, 황제가 기다리려는 기색도 없이 다시 발걸음을 서두르자 앞으로 내딛으려던 발을 도로 내렸다.
묵용린이 갑자기 허 귀비를 돌아본 이유는, 문득 그의 마음속에서 의혹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항상 허설령이야말로 황후에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녀가 왠지 입궁 전과 좀 달라진 것 같았다.
사실 허설령과 사봉봉은 모두 매사에 공평한 성격이지만, 두 사람이 주는 느낌은 사뭇 달랐다. 허설령은 단정하고 우아하며, 고귀한 차가움이 있어서 천하를 품는 자애로운 어머니가 될 기세를 가지고 있었다. 반면 사봉봉은 차분하고 진중한 성격에, 항상 여유가 느껴지며 내성적이어서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는 힘이 있었다.
과연 누가 더 황후가 되기에 적합한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는 답을 내릴 수 없었다.
허 귀비는 끝내 쫓아가지 못했다. 그녀에게도 자존심이 있었다. 겨우 용기를 내서 마음속에 있던 말을 꺼냈는데, 아랫사람들 앞에서 황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피를 토하는 심정이었다.
아랫사람을 데리고 돌아가는데, 한 궁녀가 총총히 걸어와 금령의 귓가에 몇 마디 말을 속삭였다.
허 귀비는 곁눈질하며 물었다.
“무슨 일이냐?”
금령이 말했다.
“마마, 유 귀인이 몸이 좋지 않아서 태의를 불러 진맥하고 싶다고 합니다.”
허 귀비는 입가를 끌어 올리며 비웃음을 지었다.
“어찌 또 몸이 안 좋다는 게야? 참으로 변변치 못한 몸이로구나. 의승을 보내 주거라.”
그녀는 말을 마치고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금령에게 눈짓을 보냈다. 금령이 그녀의 뜻을 알아듣고 대답했다.
“소인이 직접 다녀오겠습니다.”
손사래를 친 허 귀비는 멀지 않은 곳에 우뚝 서 있는 승덕전과 봉명궁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벽요궁으로 발길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