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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1123)화 (1,123/1,192)

제1123화

승덕전에서는 눈시울을 붉힌 묵용성이 무릎을 꿇은 채 일어나지 않았다.

“황형, 제발 봉봉을 냉궁에서 나오게 해 주십시오. 대문도, 창문도 쪼개진 그런 곳에서, 만약 비바람이라도 불면 어찌합니까? 도저히 사람이 살 수가 없는 곳입니다…….”

묵용린은 어두운 안색으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묵용성이 말을 하면 할수록 그의 안색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 결국 참지 못한 그가 팔걸이를 두드리며 소리쳤다.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라는 건 어찌 알았느냐? 그곳에 가 보았느냐?”

소스라치게 놀란 묵용성은 벌벌 떨며 말을 잇지 못했다.

묵용린은 끝까지 그를 추궁했다.

“얼른 말하지 못할까! 황후를 보러 갔었느냐?”

으르렁거리듯 매서운 호통에 묵용성은 다시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묵용청양이 황제에게 그가 사봉봉을 좋아한다는 걸 알린 후부터 그는 궁에서 살지 않았다. 하지만 사봉봉이 냉궁으로 쫓겨났다는 말을 듣자 너무 화가 치밀고 또 그녀가 걱정되어, 인정에 호소하기 위해 별생각 없이 단숨에 승덕전으로 달려왔다.

그러나 흥분을 조금 가라앉히니 덜컥 겁이 났고, 또 약간 곤혹스러웠다. 그가 어찌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황제의 물음에 대답을 안 할 수도 없었다. 황제의 칼날 같은 눈초리가 그를 난도질하는 듯했다.

겁에 질린 그는 고개를 들며 말했다.

“신…신제는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고 밖에서, 밖에서 한번 살펴보았을 뿐입니다.”

묵용린은 냉소를 지었다.

“문 앞까지 갔는데, 왜 안 들어갔느냐? 그녀를 그렇게 걱정하면서 왜 안 들어갔지?”

“왜냐하면.”

묵용성은 입술을 깨물었다.

“봉봉은 황수이시고, 또 남녀가 유별하니 신제는 당연히 들어갈 수 없습니다.”

“남녀가 유별한지는 알고 있구나.”

오랫동안 묵용린의 가슴속에 쌓여 있던 화가 마침내 폭발했다. 벌떡 일어난 그는 아우를 발로 걷어차서 바닥에 넘어뜨렸다.

“알면서 그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봐? 알면서 그렇게 자주 그녀의 처소를 드나든 것이야? 다 알면서?”

그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이를 악물고 마지막 말을 내뱉었다.

“다 알면서 계속 그녀를 그리워하느냐!”

황제의 발에 차여 엎어진 묵용성은 일어나려고 하다 그 마지막 말을 듣고 온몸에 힘이 빠져 축 늘어졌다. 그의 은밀한 속마음을 황제의 입을 통해 직접 들으니 그는 너무 수치스럽고 분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아랫사람들은 이미 모두 밖으로 물러난 뒤였다. 누구도 감히 황실에 얽힌 비화를 듣고 있을 만큼 간이 크지 않았기에 당연히 싸움을 말릴 사람은 없었다. 묵용린은 분노를 주체하지 못해 그를 한 번 더 힘껏 걷어찼다.

“말해 보거라!”

묵용성은 차인 곳을 감싸며 비명을 질렀다.

“황형, 잘못했습니다.”

묵용린은 멈추지 않고 또 발길질을 했다.

“아직도 그녀가 걱정되느냐?”

“아니, 아닙니다.”

묵용성은 서둘러 일어났다. 아무도 자신을 구하러 오지 않을 것이니, 얼른 도망가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황제의 발길질에 반신불수가 될지도 모른다.

* * *

묵용성이 매를 맞고 있을 때, 묵용청양은 냉궁으로 가서 서찰을 사봉봉에게 전해 주었다.

서찰을 다 읽은 사봉봉은 한참 눈썹을 찌푸리더니 입을 열었다.

“최소한 지금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건, 배후의 주모자가 우리 사가에 원한이 있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 많은 사람에게 고액의 은표를 나누어 주지 않았을 겁니다. 이건 사가 상호를 망하게 하려는 음모예요.”

묵용청양이 물었다.

“이렇게 큰 상호가 무너뜨리려 한다고 정말 무너지겠어요? 사가 상호의 점포가 얼마나 많은데 어느 세월에 그걸 다 망하게 만들겠어요?”

사봉봉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히려 사가 상호가 너무 크기 때문에 은장에 손을 쓰는 것이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공격이 될 겁니다.

만약 은장 본점이 무너지면 분점들이 무너지는 건 순식간이고, 은장 전체가 무너지면 사가 상호 전체의 은자 흐름이 끊기겠죠. 유동 은자가 없으면 장사는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습니다. 마치 나무 쌓기 놀이에서 나뭇조각 하나를 뽑으면 전체가 무너져 내리는 것처럼요.

지금 우리를 적대하는 자는 분명 머리가 아주 비상하고 권세 역시 상당할 게 분명해요.”

묵용청양이 물었다.

“그럼 누구일 것 같아요?”

“아직은 짐작할 수 없어요.”

사봉봉이 대답했다.

“하지만 전하, 부디 돌아가서 제 모친께 알려 주세요. 은표를 은자로 바꿔 줄 때, 반드시 은표가 발행된 곳이 현지인지 타지인지 구별해야 한다고요. 어쩌면 그중에 가짜 은표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전 그자의 손에 있는 은표를 다 바꾼다고 우리 은장의 은자가 동이 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러면 이제 사가 상호를 모함한 놈이 사가와 원한이 있는 자라는 건 거의 단정할 수 있는 거네요.”

사봉봉이 눈을 가늘게 뜨고 눈빛을 번쩍였다.

“그건 틀림없을 거예요.”

“사가와 원한이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전혀 모르겠어요?”

“장사를 하다 보면 만사가 형통하지는 않습니다. 항상 이런저런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죠. 하지만 요 며칠 가만히 생각해 보니 갈등이 있었던 사람은 여럿 있었지만, 원한을 가질 만한 사람은 없었어요.”

“다시 찬찬히 생각해 봐요.”

묵용청양은 급히 돌아가려 하며 말했다.

“우선 사 주인장에게 그렇게 전할게요.”

“잠깐만요.”

사봉봉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

“이것도 모친께 전해 주십시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 임안성 부근에 있는 은장 분점의 은자를 모아서 본점으로 보내게 하고, 만약 다른 곳에서 고액의 은표를 교환해 달라고 하면 반드시 은표를 자세히 검사하라고요.”

묵용청양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냉궁을 나와 급히 궁문으로 향하던 중, 갑자기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전하, 장공주 전하.”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보니 사희였다. 그는 숨이 턱까지 차서 헐떡거리며 달려왔다.

“전하, 어서 가 보십시오. 황상께서 성 전하를 때려죽이실 것 같습니다.”

“뭐?”

묵용청양은 깜짝 놀라 얼른 승덕전으로 달려갔다.

* * *

대전 문 앞에는 한 무리의 아랫사람이 둘러서 있었으나, 누구도 감히 들어가 말릴 수 없었다.

허둥지둥하던 왕장량은 달려오는 묵용청양을 발견하고 급히 마중 나왔다.

“아이고, 전하, 오셨네요. 황상께서…….”

주변에 듣는 귀가 많아서 그는 장공주의 귀에 대고 몇 마디 속삭였다.

상황을 파악한 묵용청양이 문짝을 벌컥 열고 들어갔다.

그때, 묵용린은 묵용성의 멱살을 잡고 매섭게 주먹을 날리는 중이었다. 다행히 그 주먹은 내리꽂히기 직전에 부드러운 팔에 감겨 멈췄다.

“황형, 정말 때려죽이실 작정이에요!”

“쓸데없이 나서지 말거라!”

묵용린은 분노의 불길이 채 가시지 않아 그녀의 팔을 뿌리쳤지만, 묵용청양은 한사코 감싸 안은 주먹을 놓지 않았다.

“이게 왜 쓸데없어요, 저 애는 제 아우예요. 진짜 때려죽이면 저한테 뭐로 보상해 줄 건데요!”

그녀의 말을 문 앞에서 들은 왕장량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과연, 장공주 전하는 싸움을 말리는 것도 남다르구나.’

묵용린은 두어 번 뿌리치다 지쳐서 묵용성의 멱살을 놓쳤고, 그 틈에 묵용청양은 묵용성을 그의 손아귀에서 빼냈다.

묵용성은 얼굴을 잔뜩 얻어맞아 도저히 눈 뜨고 볼 수 없는 몰골이었다. 얻어맞을 때는 넋을 놓고 있다가 그제야 정신을 차린 그는 묵용청양을 보고 억울하다는 듯 그녀를 불렀다.

“황저.”

묵용청양은 한바탕 욕설을 쏟아 내고 싶었지만, 그런 아우의 모습을 보니 욕할 기운도 나지 않았다. 그녀는 그를 부축해서 의자에 앉혔다.

“이 미련한 놈아, 그렇게 때리는데 도망도 못 가?”

“도망가려고 했어.”

묵용성은 울상을 지었다.

“실패해서 그렇지.”

묵용청양은 한심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넌 때릴 줄도 모르고 도망도 못 가고, 얻어맞는 것밖에 못 하는구나.”

묵용성은 자신의 얼굴을 살짝 어루만졌는데 안 아픈 곳이 없었다. 너무 억울하고 속상했다. 그는 아주 어릴 적부터 사봉봉을 좋아했다. 설령 그녀가 시집을 갔어도 여전히 좋았다. 감정이 무수한 세월 속에 스며들어 있는데 잊으라고 한다고 그게 쉬이 잊히겠는가?

“됐어, 그만해. 난 지금 아주 바쁘니까. 성아, 넌 나랑 같이 출궁해. 한동안 궁으로 돌아오지 말고 밖에 있어. 또다시 맞으면 내가 제때 널 구할 수 없을지도 몰라.”

묵용청양은 누나 티를 내며 묵용성을 데리고 궁을 나갔다.

묵용린은 가만히 앉아서 누이가 아우를 데려가는 것을 보고만 있었다. 때릴 때는 노기가 가득해서 제정신이 아니었지만, 노기가 차츰 가라앉고 보니 그도 좀 찝찝한 마음이 들었다.

묵용성이 사봉봉을 좋아했다는 사실을 알고 좀 불쾌했지만, 그건 예전 일이니 그도 상관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와 사봉봉이 대혼을 치른 후에도 그녀를 그리워하는 건 옳지 않았다. 게다가 분명 지난번에 귀띔해 줬는데도 사봉봉에게 문제가 생기자 이렇게 찾아와 사정하며 눈시울을 붉히니, 그로선 도무지 화를 참을 수 없었다.

원래는 발길질만 몇 번 하고 끝내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묵용성이 도망가려고 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는 더욱더 화가 치밀어, 끝까지 쫓아가서 주먹질과 발길질을 했다.

분풀이는 시원하게 했지만, 막상 때리고 나니 속마음이 불편했다.

* * *

묵용청양은 아우를 진왕부로 보냈고, 자신은 얼른 사부로 가서 사봉봉의 말을 사앵앵에게 전해 주었다. 그러고 나서는 다시 환경문으로 가서 영안을 찾았다.

그러나 영안은 청이각에 가고 없었다.

화가 난 묵용청양은 문틀을 힘껏 걷어차고 돌아 나오더니 청이각으로 달려갔다.

청이각에 이미 여러 번 왔었기에 문지기는 그녀를 알아봤고, 안으로 들어가는 걸 막지 않았다.

묵용청양은 쿵쾅거리며 위층으로 뛰어 올라가서, 곧바로 영안이 있는 방문을 밀어젖혔다.

방 안에서는 영안과 안월이 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요란한 인기척에 그들은 나란히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영안이 물었다.

“무슨 일 있어?”

“응.”

가볍게 대답한 묵용청양은 문가에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안월은 웃으며 다가가 말했다.

“청양 소저, 어서 들어오세요. 그럼, 말씀 나누세요. 저는 내려가서 다과를 좀 가져올게요.”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그녀는 은은한 향기만 남긴 채 옆으로 비켜서서 묵용청양의 곁을 스치곤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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