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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1122)화 (1,122/1,192)

제1122화

담장을 따라 오른쪽으로 돌면 측문이 하나 있었는데, 좁고 낡았지만 유일하게 사람이 드나들 수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 문 앞에는 보초가 한 명 서 있었다.

이곳은 규율상 누구도 드나들 수 없었지만 아무도 감히 장공주 전하를 막지 못했고, 묵용청양이 힐끗 째려보자 보초는 얼른 물러서며 그녀에게 문을 열어 주었다.

안뜰은 잡초가 무성했다. 다행히도 여름이라 푸르른 녹음 사이로 드문드문 작은 꽃들이 피어 있었고 생기가 넘치는 게, 사방에 무너져 가는 건물과는 좀처럼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사봉봉은 뒤뜰에서 금천아를 도와 옷을 말리고 있었다. 금천아가 그런 그녀를 말렸지만, 그녀는 고집을 부렸다.

“이렇게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울적해서 오히려 병이 나겠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누군가 대답했다.

“내가 왔으니 이제 울적할 일 없을 거예요.”

사봉봉은 밝은 얼굴로 고개를 번쩍 들었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어요?”

“물어볼 게 있어서요.”

묵용청양은 안부 인사도 생략한 채 바깥의 사정을 낱낱이 알려 주었다.

사봉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안색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그녀는 금천아가 다 씻은 옷가지를 털고 빨랫줄에 넌 뒤, 세심하게 주름진 곳을 편 후에야 비로소 입을 열었다.

“전하, 죄송하지만 돌아가셔서 제 모친께 말씀 좀 전해 주십시오. 은자를 출금하고 싶어한다면 얼마든지 찾아가게 하라고요. 단,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이번에 사가 은장에서 은자를 찾아간 사람들은 앞으로 사가 상호와 거래할 수 없을 거라고 전해 주십시오.”

묵용청양은 어안이 벙벙했다.

“그렇게 말해도 되는 거예요?”

“네.”

사봉봉은 또 다른 옷가지를 털고 말했다.

“사가 상호는 꽤 오랫동안 장사를 해 왔습니다. 저한테 다 생각이 있어요. 그러니 전하께선 제 모친께 이런 조건을 분명하게 적어서 은장 입구에 붙이라고 전해 주십시오.”

“알았어요. 그렇게 전해 줄게요. 사 주인장이 소식을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묵용청양은 바로 돌아갔다.

사봉봉은 그녀가 떠나간 방향을 바라보며 울적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숲이 크면 별별 새가 다 사는 법. 그래도 좋은 새가 더 많겠지.

금천아가 빨랫방망이를 들고 화풀이하듯 세게 내리쳤다.

“쳐 죽일 놈들! 우리에게 부탁할 때는 달콤한 말을 광주리로 쏟아 내더니! 어려움이 닥친 지금은 오히려 불난 집에 부채질이라니!”

사봉봉은 그녀를 칭찬했다.

“오, 이제는 제법 그럴싸한 문장도 말할 줄 아는구나.”

금천아는 투덜거렸다.

“마마, 소인은 애가 타 죽겠는데 그런 농담이 나오십니까?”

“여기서 아무리 걱정해도 소용이 없는걸.”

사봉봉은 생끗 웃으며 말했다.

“좋은 쪽으로 생각하자. 사람이 살아가는 건 희망이 있기 때문이잖느냐?”

* * *

묵용청양이 사봉봉의 말을 사부에 전하자, 사앵앵은 곧바로 기운을 차렸고 아하를 불러서 붉은 종이에 금가루를 섞은 먹으로 성명을 쓰게 했다. 아하는 원래 글을 잘 썼다. 그녀는 사봉봉의 뜻을 명명백백하게 써서 저잣거리를 다니는 행상꾼들도 알아볼 수 있었다.

성명문을 받아 든 관리인은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다. 그는 오래 머물지 않고 얼른 은장으로 돌아갔다. 은장 쪽에는 아직도 소란이 끊이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아랫사람에게 성명문을 대문 앞에 붙이도록 명하고 당당한 표정으로 말했다.

“여러분, 사 주인장의 지시를 받았습니다. 우리 사가 은장은 사업을 운영하는 데 있어서 신용을 가장 중시합니다. 그러니 사 주인장께서 은자를 찾고 싶은 사람에겐 얼마든지 내어 드리겠다고 하셨습니다. 다만, 주의하실 점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는 성명문을 가리켰다.

“우리 은장은 이번에 억울하게 모함을 당했습니다. 난관에 봉착한 이런 때에 큰 액수의 은표를 가져와서 지급을 요구하는 행위는 우리 사가 은장을 짓밟으려는 의도라 여길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앞으로 사가 상호와 거래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여기까지 말한 그가 잠시 침묵하자, 입구에서 웅성거리던 사람들도 모두 조용해졌다. 그들의 표정은 제각각이었다. 누구는 곤혹스러워했고, 누구는 개의치 않았으며, 누구는 낮은 목소리로 귓속말을 주고받았다.

은장 관리인이 계속 말했다.

“사가 상호는 동월 최고의 부자입니다. 이 정도 은표는 얼마든지 은자로 바꿔 드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환난이 닥쳐야 진정한 친우를 만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사 주인장이 어떤 사람인지, 사가 상호가 장사를 어떻게 하는지 다들 알고 계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저도 더는 두말하지 않겠습니다. 은표를 바꾸고 싶으신 분들은 오른편에 줄을 서십시오. 한 분씩 처리해 드리겠습니다. 그렇지만 만약 은표를 바꾸지 않으실 분들은 여기에 이렇게 서 계시지 말고 얼른 댁으로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그 말에 다들 술렁거리기 시작하더니 어떤 사람은 줄을 섰고, 어떤 사람들은 그 자리에 서서 머뭇거렸다. 슬그머니 자리를 뜨는 사람도 있었다.

은장 관리인은 냉담한 시선으로 그들을 한참 바라보다가, 문 앞에 몰려 있던 사람들이 절반쯤 돌아가니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 *

첫날, 대문에 성명문을 붙이고 공표한 이후, 소란을 피우던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반쯤 돌아가 버렸다.

그런데 이튿날, 전날보다 두 배나 많은 사람이 은표를 들고 몰려왔다. 이 사람들은 성명문을 읽지도 않았고, 아주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의 손에 들려 있는 건 모두 고액 은표였다.

반짝이는 금과 은이 물처럼 새어 나가는 것을 보며, 은장 관리인 또한 심장이 목구멍까지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셋째 날, 넷째 날에도 많은 사람이 찾아왔지만 관리인은 애써 침착한 척했다.

그렇게 얼마 남지 않은 은자를 내어 준 그는 영업을 마치자마자 급히 사부로 달려가 사앵앵에게 현재 상황을 알렸다.

성미가 불같은 사앵앵은 양손을 허리에 올린 채 불난 데 기름 붓는 짓을 한 놈들에게 욕설을 한가득 퍼부었다. 하지만 욕은 하더라도 일은 해결해야 했다.

그녀는 관리인에게 물었다.

“며칠 더 버틸 수 있겠는가?”

“만약 매일 지금처럼 몰려온다면 닷새를 버티기 어렵습니다.”

“바꿔 달라고 갖고 오는 은표가 전부 다 고액권인가?”

“네, 다 큰 액수이고 천 냥 이하는 없습니다.”

“은 부스러기를 찾아가는 사람은 없는가?”

“없습니다.”

관리인은 확실하게 말했다.

“그런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사앵앵의 안색이 순간 밝아지며 아주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헛되지 않았구나. 사가 상호가 임안성에서 지난 몇 년 동안 돈을 얼마나 벌었는지는 차치하고, 최소한 선한 인연을 맺어 왔구나.”

관리인은 어리둥절했다.

“주인장, 선한 인연도 있지만 악연도 적지 않습니다. 저들은 우리를 짓밟으러 온 것입니다.”

사앵앵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임안성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부자가 많겠는가, 아니면 일반 백성이 더 많겠는가?”

“물론 일반 백성이 더 많습니다.”

“우리 상호는 일반 백성들을 상대로 하는 장사라네. 백성들이 은표를 바꾸러 오지 않았다는 건 그들이 사가 상호를 믿고 은자를 계속 맡길 거라는 뜻이네.

하지만 은표를 잘 살펴봐야 하네. 우리 은장이 보유한 총금액은 평소 유통하던 것의 열 배이기에 충분히 대처할 수 있지만, 만약 매일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고액의 은표를 들고 찾아온다면 그건 분명 누군가 뒤에서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뜻이네. 그 사람을 잡아낼 수만 있다면 우리의 억울한 누명도 벗을 수 있을 것이야.”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가 붓을 들고 서찰을 쓰더니, 마당에서 사금언과 권법을 수련하던 가소타를 불렀다.

“소타야, 숙모 좀 도와줘. 이 서찰을 장공주 전하께 전해 줄래?”

가소타는 요즘 매일 사부를 찾았다. 사부를 둘러싼 병사들이 혹시라도 사부 사람들을 괴롭힐까 봐 이곳에 와서 지키고 있는 것이었다. 이건 묵용청양이 그녀에게 맡긴 임무였다.

평소에 주변 사람들은 그녀를 예뻐했지만, 아직 그녀가 어리기에 아무것도 시키지 않았다.

모처럼 사앵앵이 그녀에게 중요한 임무를 맡기는 듯하자, 가소타는 너무 기뻐서 막중한 사명감을 느꼈다.

그녀는 서찰을 조심스럽게 품 안에 넣은 뒤, 묵용청양에게서 배운 강호식 인사인 공수를 하며 말했다.

“안심하세요, 숙모. 소타가 꼭 임무를 완수하겠어요.”

그녀가 환경문에 도착했을 때, 묵용청양은 자리에 없었다. 그녀는 곧바로 다시 궁문으로 달려갔다. 그녀를 예뻐하는 황제가 친히 금 요패를 하사했기에 그녀도 묵용청양처럼 자유롭게 황궁을 드나들 수 있었다.

궁문의 보초는 그녀를 알아보고 즉시 통과시켰다.

요대궁으로 헐레벌떡 달려가던 가소타는 마침 처소를 나서는 묵용청양과 마주쳤다.

서찰을 읽은 묵용청양은 칭찬하며 가소타의 머리를 토닥였다. 그리고 가소타에게 먼저 돌아가라고 한 뒤 서찰을 가지고 냉궁으로 향했다.

멀리 계단 위에 서 있던 허 귀비는 묵용청양과 가소타가 분주한 모습으로 두어 마디 말만 하더니 또 헤어져 각자 갈 길을 가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가소타의 뒷모습을 주시하며 물었다.

“저 앤 누구지?”

시종 중 나이가 많은 궁녀는 가소타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마마, 저 아이는 가 대인의 천금인데, 황상께서 금 요패를 하사하여 황궁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도록 허하셨습니다.”

금령이 말했다.

“가난청 대인의 누이군요. 저 두 남매는 정말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나네요. 오라버니는 그렇게나 잘생기고 능력도 좋은데 누이는 무능해 보입니다.”

허 귀비는 금령을 경고하듯 노려보더니 물었다.

“저 아이가 장공주 전하와 친하게 지내느냐?”

“네, 아주 친합니다.”

궁녀가 대답했다.

“자주 같이 즐겨 노신다고 합니다.”

허 귀비는 그 궁녀를 힐끗 쳐다보며 물었다.

“네가 궁에 온 지 몇 년 되었느냐?”

“귀비 마마께 아룁니다. 소인은 궁중에서 지낸 지 육 년 되었습니다.”

“장공주 전하가 또 누구와 친하게 지내는지 아느냐?”

궁녀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장공주 전하께서는 영 대인 댁 공자와도 사이가 좋습니다. 어린 시절에 소꿉동무였다고 합니다.”

허 귀비가 또 물었다.

“장공주 전하와 황후 마마의 사이는 어떠하냐?”

“두 분도 친하십니다. 태후와 사 주인장이 벗이었기 때문에 장공주 전하께서도 어린 시절부터 사부의 천금, 즉 지금의 황후 마마와 왕래가 있었습니다.”

허 귀비는 입가에 냉소를 지었다.

“성 전하도 황후와 사이가 좋으시지?”

“그건…….”

궁녀는 좀 머뭇거렸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사이가 좋으십니다.”

허 귀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다 같이 자라서 정이 남다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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