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21화
판등은 금방 그의 말을 알아듣고 깜짝 놀라 입을 크게 벌렸다.
“네 말은, 그러니까, 대장이 장공주 전하라는 말이야?”
소제갈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이미 팔백 년 전부터 알고 있었다. 너희들도 다 알고 있을 줄 알았지.”
산응은 미간을 찌푸렸다.
“설마 장공주 전하가 그런 사람일 줄 몰랐는데…….”
소마가 머리를 탁 하고 쳤다.
“아! 기억났어. 그때 교외에서 대장을 처음 만났을 때, 안 형이 그녀에게 문제가 생기면 우리 목이 전부 날아갈 거라고 했었어. 난 거꾸로 그녀가 무슨 대단한 도둑인가 하고 잘못 생각했지.”
“그러니까 황십구가 아니라 영십구란 말이지?”
산응이 말했다.
“난 그 사람이랑 한바탕 겨룰 뻔했는데.”
“성이 황씨라고 한 것도 사실은 황실을 뜻하는 ‘황’이었던 거네!”
“저번에 대장이랑 황궁에 들어가서 가 대인을 만났을 때도 궁궐 보초병들의 태도가 아주 공손하고, 가 대인도 과하게 예를 취하더라니, 난 또 우리 환경문의 위상이 그렇게 높아진 줄 알았지.”
“어쩐지 가 대인과 영 부인 모두 대장을 조상님이라고 부르셨어.”
“대장이 자기 저택은 거리 두 곳을 합친 만큼 크다고 했는데 어디 두 곳뿐이겠어? 전국이 다 대장의 집이지.”
“저번에 사평에서 대장이 큰일을 당할 뻔했을 때, 안 형이 분노를 쏟아 내며 범인을 때려죽인 거 말이야. 지금 다시 생각해 보니, 등골이 오싹해. 만약 장공주 전하께 일이 생겼으면 우리는 전부 끝장이었을 거야.”
“…….”
다들 한마디씩 내뱉고 나니, 묵용청양과 어울려 다니는 동안 자신들이 놓친 실마리가 너무 많았다. 사실 이건 그들을 너무 탓할 수도 없는데, 그 이유는 묵용청양이 너무 장공주답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묵용청양은 단정하지도, 진중하지도, 가녀리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녀는 귀티가 나지도 않았고, 오히려 반대로 세속적인 인정이 가득했다. 그녀는 저잣거리의 평범한 사람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었으며, 미친 듯이 장난을 치고 신나게 웃었다. 아가씨 같지 않고 오히려 호방한 성격으로 남자들과 호형호제하며, 늘 강호인의 말투를 입버릇처럼 달고 다녔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동월의 장공주인가? 누구도 상상조차 해 보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사가에 큰일이 벌어지지 않았다면, 그들은 영원히 그녀와 장공주를 연결하지 못했을 것이다.
다들 흥분해서 대화를 나누던 중, 장공주 전하가 들어왔다. 그녀는 뭔가 기분이 언짢은 듯 보였고, 평소처럼 그들과 허풍을 떠는 대신 곧장 안으로 들어가 영안을 찾았다.
청양의 진짜 정체를 알게 된 판등 일행은 벌떡 일어나 그녀를 맞이했고 막 예를 취하려고 했지만, 뜻밖에도 그녀는 그들을 쳐다보지도 않고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영안은 묵용청양의 안색을 살폈다.
“사부는 다 정돈되었어?”
“응.”
묵용청양은 탁자로 다가가 물을 한 잔 따라서 벌컥벌컥 마셨다.
“금군이 사부 밖을 에워싸고 있어. 공 제독은 사 장군이랑 사이가 좋으니, 사부를 함부로 대하지 않을 거야. 사 주인장에게는 금족령이 내려졌지만, 사가 상호 사람들의 출입을 금하지는 않았으니, 장사에도 지장은 없을 거야.”
“사 주인장은 좀 어떠셔?”
“그럭저럭 버티시는 것 같아. 사금언에게 곁을 지키라고 했고, 소타도 같이 있을 테니 별일은 없을 거야. 비록 사 주인장이 성격은 불같지만 봉봉을 위해서라면 경거망동하지 않을 테니까. 그런데…….”
“그런데 뭐?”
묵용청양은 쓴웃음을 지었다.
“사 주인장은 황형이 사가 상호를 빼앗기 위해 그녀에게 죄를 뒤집어씌울 거라고 의심하고 있어. 사가 상호를 빼앗으면 봉봉도 폐위할 수 있으니까.”
영안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가 이렇게 놀라는 건 드문 일이었다. 그는 그 말을 듣고, 사 주인장이 제정신인지 의심이 들었다. 황제를 모독하는 게 얼마나 큰 죄인지 모른단 말인가?
“그런데도 말리지 않았어? 이런 말은 함부로 입 밖에 내뱉는 게 아니야!”
“말렸지! 봉봉을 보고 좀 배우시라고 했어.”
묵용청양이 말했다.
“물론 나한테 몰래 한 말이라 금언이나 소타도 못 들었어. 사 주인장도 정도를 아는 사람이야. 함부로 말하지 않을 거야.”
그녀는 손에 든 찻잔을 돌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냉궁에 있는 봉봉만 생각하면 초조해서 도저히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어. 이 사건을 가능한 한 빨리 매듭지어야 봉봉을 냉궁에서 꺼내 올 수 있잖아. 어렸을 때부터 고생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을 텐데, 그런 곳에서 얼마나 견딜 수 있을지 모르겠어.”
영안은 묵용청양이 천하제일인 아버지를 두었기 때문에 여태껏 근심 걱정이 뭔지 모르고 자랐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가 이렇게 근심에 찬 표정을 짓는 건 아주 드문 일이었기에, 이런 모습이 익숙지 않았던 그는 왠지 심장이 저릿했다. 그녀가 평소 시끄럽게 구는 것이 싫기는 해도, 이렇게 의기소침한 모습은 더 싫었다.
그의 목소리는 어느새 부드러워져 있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 봉봉은 지혜로운 사람이니 이번 고비도 잘 넘어갈 거야.”
묵용청양은 마른세수를 하며 정신을 차렸다.
“우리 사건에 대해 의논해 보자. 네 의견은 어때?”
영안이 입을 열었다.
“만약 사 주인장이 배후가 아니라면 누군가가 그녀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는 거야. 그러면 진짜 배후는 사가와 원수지간인 게 분명해.”
묵용청양이 동의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하지만 사가 상호를 시기하는 사람은 너무 많고, 노골적인 갈등도 없는데 어떻게 사건을 풀지?”
“한 가지 가능성이 또 있어. 황금 네 상자는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니야. 이런 큰 금액을 바꿔치기할 수 있는 곳은 임안성 안에서는 사가 상호의 은장밖에 없지. 진짜 배후가 만약 금액만 고려했다면 꼭 원수지간이 아닐 수도 있어.”
묵용청양은 고개를 끄덕이며 인상을 썼다.
“그러면 더욱더 조사하기 어려울 거야.”
“발각되자마자 보초 두 명이 죽었어. 그것도 음독자살로. 그러니 사건의 배후는 정보를 빠르게 받아 볼 수 있는 권력자일 거야.”
“그렇다면 임안성 내 유력 인사들을 확인해 봐야겠군.”
“너무 많아.”
영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임안성은 천자가 계신 도성이라 황실 종친부터 일, 이품 대신 그리고 백 년 동안 작위를 이어 온 대귀족 등이 너무 많아. 정말 다 확인하려면 시간도 인력도 부족해.”
“그러면 어떻게 하지?”
묵용청양은 탁자에 엎드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뭐든 하긴 해야 하잖아.”
영안은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한마디 했다.
“일단 기다려 보자.”
* * *
묵용청양은 영안이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었다. 그가 기다리라고 말한 건 정말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의미였다.
그는 관아에 멍하니 있는 게 아니면 형제들을 데리고 거리를 돌아다녔다. 또 그게 아니면 청이각에 가서 안월과 차를 마시며 곡조를 들었다.
묵용청양은 원래도 다급했는데, 그가 이러는 걸 보니 입가에 수포가 생길 정도로 화가 치밀었다. 특히 영안이 청이각에 갔을 때는 눈에서 칼날이 쏘아져 나갈 것처럼 눈빛이 매서워졌다.
그녀는 그처럼 아무렇게나 시간을 때우기 싫어서 매일 사앵앵을 보러 찾아갔다. 혹시 원한을 산 적은 없는지, 사업상 특별히 사가 상호를 부러워한 사람은 없었는지, 사가 상호에 거액을 빚진 사람은 없는지 등을 확인했다.
사앵앵도 처음 이틀 동안은 그녀에게 협조했고, 고심해서 옛날에 있었던 일들을 떠올렸다. 사실 장사에는 경쟁이 없을 수 없고, 경쟁이 있으면 당연히 갈등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지난 몇 년 동안 참 많은 일이 있었기에 그녀는 생각나는 대로 케케묵은 지난 일을 전부 털어놓았다. 그런 게 정말 쓸모가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나중에는 이마저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황금을 강탈한 사건은 굉장히 큰 사건이라 진작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고, 이제는 그 황금이 사가에서 운영하는 은장에서 발견되었다는 사실까지 알려졌다.
남원 황금을 찾았으니, 그게 국고에 환수되면 사가 은장에 있던 황금은 없어지게 된다. 이 소식을 들은 여러 큰손이 사가 은장으로 몰려와 자기 돈을 돌려달라며 소란을 피웠다.
순식간에 사가 은장의 대문이 미어터질 지경이었다.
이런 광경은 처음이라 당황한 은장 관리인은 사부로 달려와 사앵앵에게 어쩌면 좋을지 상의했다.
황금 네 상자를 정말 다 배상해야 한다고 해도 크게 문제가 될 건 없었다.
하지만 사가 상호가 이렇게 클 수 있었던 건 모두 수중에 자금이 넉넉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만약 쌓아 두었던 재산을 모두 잃게 된다면, 약한 고리가 끊어져 건물 전체가 무너지는 것처럼 사가 상호는 순식간에 무너져 내릴 수도 있었다. 이건 정말 최악의 상황이었다.
사앵앵은 일순간 어찌할 바를 몰랐다.
만약 은자를 내어 주지 않으면 소문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자기 돈을 빼겠다는 사람이 점점 더 늘어날 것이다. 그렇다고 은자를 내어 주면 모아 두었던 집안 재산을 탈탈 털어야 하니, 만약 그런 상황에 누군가 뒤에서 계략을 꾸민다면 사가 상호는 막다른 골목으로 몰리게 될 것이다.
이마에 식은땀이 맺힌 관리인은 사앵앵을 애타게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한참을 침묵한 채 아무런 답변이 없었다. 두 갈래 길이 모두 막다른 길이라 그녀도 해결책이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묵용청양도 자리에 함께 있었다. 그녀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아니면 봉봉에게 물어볼까요?”
묵용청양의 말에 사앵앵은 눈을 번쩍 떴다. 항상 그녀가 결정을 할 수 없을 때마다 사봉봉이 좋은 의견을 내곤 했다. 그렇게 수년간 그녀는 딸에게 의존해 왔고, 이제는 사봉봉이 곁에 없으면 어떤 일도 자신이 없었다.
“그래요. 수고스럽지만, 전하께서 궁으로 돌아가시면 봉봉에게 물어봐 주세요. 그 아이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지 그 말을 따르겠다고 전해 주세요.”
묵용청양은 두말없이 말을 타고 궁으로 돌아갔다.
궁문으로 들어가서도 그녀는 말에서 내리지 않고, 곧장 후궁으로 말을 몰았다. 급하게 봉명궁으로 달려간 그녀는 썰렁한 안뜰을 확인하고 나서야 사봉봉이 이곳이 아니라 냉궁에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떠올렸다. 그녀는 다급하게 발걸음을 돌렸다.
냉궁은 서쪽에 있는 허름한 궁전으로, 예전에는 전전前殿에 현판도 달려 있었지만, 지금은 세찬 바람에 현판이 떨어져 나갔어도 아무도 상관하지 않는 곳이었다. 현판이 떨어진 후로 다들 그곳을 냉궁이라 불렀다.
자물쇠가 걸려 있는 대문은 얼룩덜룩하여 원래 무슨 색깔이었는지조차 알아볼 수 없었고, 판자 몇 개도 이미 썩어서 문밖에서 안쪽이 훤히 들여다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