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왕비초장성 (1116)화 (1,116/1,192)

제1116화

숲속엔 따로 길이 없었는데, 지하수가 매우 풍부해서 이따금 땅 위로 흘러넘쳤다. 어떤 곳은 겉으로 보기엔 풀밭 같은데 발을 내디뎌 보면 물이 흥건할 정도였다.

영안은 묵용청양의 신발이 젖은 걸 보며 말했다.

“걷기 힘든 길이니 업어 줄게.”

묵용청양이 언짢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같은 강호의 자식들이 남한테 업히는 거 봤어?”

영안은 어쩔 도리가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럼 강호의 자식은 알아서 걸어가. 지하수가 차가우니까 나중에 발이 얼었다며 뒤늦게 호들갑 떨지 말고.”

지하수는 정말 차가웠다. 신발이 젖자, 얼마 지나지 않아 뼛속이 아릴 만큼 발이 시렸다. 하지만 그녀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남에게 무시당하긴 싫었다. 그녀는 사건을 조사하러 나온 것이지, 다른 이의 걸림돌이 되려고 나온 게 아니니까. 절대 비웃음을 살 수 없었다.

그녀는 꼭 숲속의 작은 토끼같이 조심스럽게 깡충거리며 물이 있는 곳을 피해 앞으로 걸어갔다.

영안은 그녀의 주변을 지키며 금세 판등 무리를 따라잡았다.

산굴의 입구는 매우 은밀하게 숨겨져 있었지만, 그들은 별로 어렵지 않게 찾아냈다. 잡초를 뽑고 이끼가 낀 바위를 몇 개 치우자, 새까만 입구가 드러났다.

입구가 열리는 순간, 음산한 바람이 솟구쳐 나왔다.

영안은 묵용청양을 자신의 등 뒤로 잡아끌어서 바람을 막아 주더니, 그녀의 손을 잡으며 어두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한테 바짝 붙어.”

묵용청양은 까닭 없이 조금 긴장이 되었다. 산굴에 요괴가 사는 건 아닐까?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산굴은 아주 어두웠지만 다행히 다들 화절자火折子를 지니고 있어서 고목 가지를 찾아 횃불로 삼고 다 같이 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와 보니 입구만큼 음산하진 않았다. 횃불에 비친 산굴 내부는 매우 컸는데, 꼭 남쪽 지역의 종유굴과 비슷한 모양새였다.

천장에는 죽순 모양의 황백색 종유석이 달려 있었는데 위쪽에 둥근 무늬가 보였다.

어떤 곳은 계속 물이 떨어졌다. 똑똑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적막한 산굴에 퍼지니 조금 무서웠다.

그리고 반들반들한 석벽은 불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났다. 묵용청양이 손을 뻗어 만져 보니 물이 묻었다. 벽에 물이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왜 이렇게 물이 많지?”

묵용청양이 작게 물었다.

영안이 말했다.

“이곳은 지하수가 풍부해서 그래. 물이 산에 있는 바위를 녹여서 동굴이 된 거지.”

묵용청양이 물었다.

“이것도 네 사부님이 가르쳐 준 거야?”

“내가 책 보고 알아낸 거야.”

영안이 그녀를 흘기며 말했다.

“물론 넌 책을 보자마자 머리가 아프겠지만.”

묵용청양이 히죽거리며 그의 손을 뿌리치고는 다른 곳으로 가려 했다.

순간, 영안이 그녀를 휙 잡아끌며 말했다.

“내가 한 말 잊었어? 바짝 따라오라니까. 아무 데나 함부로 돌아다니지 말고.”

“그래 봤자 산굴인데 내가 어딜 돌아다닐 수 있다고?”

묵용청양이 다른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쪽에 길이 있는 것 같아서 가 보려고 그러는 거야.”

산굴 안에는 길이 여러 갈래로 나 있어서 나머지 이들도 두 조로 나누어 각자 다른 길로 향했다.

영안도 묵용청양과 함께 그녀가 가리킨 길로 향했다.

잠시 뒤, 그들은 그 길들이 전부 이어져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길이 교차한 지점에서 소제갈과 소어를 만났기 때문이다.

안으로 조금 더 들어가니, 횃불이 곧 꺼지기 직전이었다. 아직 얼마나 더 깊은지 알 수도 없는데, 불씨까지 꺼지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다.

영안은 위험을 감수할 수 없어서 산응과 판등을 찾아 밖으로 나가려 했다.

그때, 그들 중 한 사람이 큰 소리로 영안을 불렀다.

“안 형, 빨리 와 봐요! 빨리요……!”

네 사람은 곧장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달려갔다.

산응과 판등이 있는 곳에 다다른 네 사람은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이쪽 동굴은 그리 크지 않았는데,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소어가 빠르게 시체를 세어 영안에게 손짓했다. 무려 열두 구였다.

그들은 곧장 사라진 열두 명의 호위병들을 떠올렸다. 설마 이 열두 구의 시체가 그 호위병들이란 말인가?

묵용청양의 심장이 가쁘게 뛰기 시작했다. 시체 옆으로 가까이 가서 살펴보고 싶었지만, 영안이 그녀를 막았다.

“넌 여기 가만히 있어.”

그는 소제갈과 함께 시체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산응과 판등은 동굴 입구를 지켰고, 소어는 동굴 밖에 서 있었다. 묵용청양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무료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시체들은 겉옷을 입고 있지 않았고, 전부 다 똑같이 하얀 침의만 입고 있었다. 보아하니 죽인 뒤에 그들의 신분을 감추기 위해 겉옷을 전부 벗긴 듯했다.

시체 주변을 한 바퀴 살핀 영안은 이들이 그 호위병들이라고 단정 지을 수 있었다. 하나같이 체격도 좋고 손바닥에 굳은살이 박인 게, 영락없이 무술을 하는 몸이었기 때문이다.

소제갈은 특징이 뚜렷한 시체 두 구의 초상화를 그렸다. 그는 이 분야의 전문가라, 몇 획만으로 인물의 외적인 특징을 매우 잘 그려 냈다.

영안과 소제갈이 한쪽에서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묵용청양은 조심스레 다른 쪽으로 향했다. 바닥에 쪼그려 앉아 시체를 살피던 그녀는 그중 한 구를 유심히 살폈다. 꼭 손에 무언가를 꽉 쥐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었다.

시체의 손을 벌리려고 가까이 다가가는데, 영안의 낮은 호통 소리가 들려왔다.

“뭐 하는 거야?”

묵용청양이 빠르게 손을 움츠리며 말했다.

“손에 꼭 무언가를 쥐고 있는 것 같아서.”

영안은 그녀가 가리키는 손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손을 펼쳐 보려는데, 묵용청양이 별안간 그를 멈춰 세웠다.

“잠시만.”

고개를 돌려 보니, 묵용청양이 손수건을 꺼내고 있었다.

“손에 감싸. 독 같은 게 묻어 있으면 어떡해.”

영안은 거절하지 않고 그녀의 손수건으로 손을 감쌌다.

옆에 서 있던 판등이 묵용청양을 놀렸다.

“오, 대장. 제법인데요!”

묵용청양은 조금 기세등등해져서 웃으며 영안을 올려다보았다.

영안은 그런 그녀의 모습이 그저 우습기만 했다. 어째서 이 웬수가 순간 조금 귀엽게 느껴졌을까?

그는 칭찬 대신 손을 뻗어 그녀의 이마를 쓸어 내렸다. 이내 시체의 손을 벌렸다. 역시나 손에 무언가 쥐여져 있었다. 도화桃花 모양의 은색 암기였는데, 무게는 가벼웠고 꽃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단순해 보이면서도 마냥 단순한 것 같진 않았다.

영안은 암기를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리더니 산응을 불렀다.

“네가 한번 보거라.”

산응은 환경문에 들어오기 전, 잠시 강호를 떠돌았기에 무림 내 각 문파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산응이 유심히 살핀 후 대답했다.

“강호에서 쓰는 물건입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느 문파에서 쓰는진 모르겠습니다.”

“한번 알아보거라.”

“네, 안 형.”

소제갈이 그림을 다 그렸을 무렵, 횃불이 거의 다 타들어 갔다.

별안간 주변이 어두워지자, 영안이 묵용청양의 손을 잡았다. 그는 이곳에 들어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녀에게 신신당부했다.

“바짝 따라와.”

묵용청양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시신이 있는 걸 보니, 산굴은 예측할 수 없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곳이었다. 어쩌면 적들이 어느 모퉁이에 매복 중이었다가 그들을 습격할지도 몰랐다.

조금 전 흩어졌던 길로 돌아왔을 때, 횃불이 완전히 꺼지고 말았다.

다들 그 자리에 꿈쩍도 하지 않고 서 있다가 어둠에 눈이 적응하고 나서야 다시 앞으로 걸어갔다.

묵용청양은 영안이 그녀의 손을 아주 꽉 움켜쥐는 듯한 느낌이 들었고, 그녀 역시 그의 손을 힘껏 감쌌다.

잠시 뒤, 길게 이어진 길을 빠져나온 그들은 다시 커다란 산굴을 지나쳤다. 기억력에 의지해 그들이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야 했다.

묵용청양은 조심히 걸었는데도 돌에 걸리는 바람에 휘청거렸다.

어둠 속에서 단단한 팔이 그녀를 꽉 감싸 안았다.

그렇게 남은 길을 돌아오는 내내 영안은 그녀를 품에 안고 걸어갔다.

영안의 품은 따스했다. 그의 숨결이 닿자, 익숙하면서도 마음이 놓였다. 하지만 심장은 그녀가 제어하지 못할 만큼 빠르게 뛰었다. 영안을 밀치고 싶어도 괜히 자신이 말썽을 피우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의 얼굴은 불이 붙을 것처럼 달아올랐다. 적막 속에서 그녀는 물이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자신의 심장 소리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영안의 심장도 이렇게 빨리 뛰는진 알 수 없었지만, 그녀는 요동치는 자신의 심장 박동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영안과 자신 사이에도 남녀의 구별이 있다는 걸 난생처음 느꼈기 때문이다.

나가는 길은 유독 멀게 느껴졌다. 영안의 보살핌 덕에 그녀는 마침내 출구를 발견했다. 출구엔 약한 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영안은 이미 그녀를 품에서 놓아 주었고, 손도 더는 잡아 주지 않았다. 심지어 그녀를 바라보지도 않고 그 길로 산굴을 빠져나갔다.

묵용청양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술을 앙다물었다. 그래, 그에겐 이미 안월이 있지 않은가. 그녀에겐 그저 좋은 벗으로서 보살펴 주는 것이니, 다른 건 절대 꿈도 꾸지 말아야 했다.

판등은 그녀가 가만히 서 있자 그녀의 어깨를 툭 치며 말을 건넸다.

“왜 안…….”

근심에 잠겨 있던 묵용청양은 별안간 누군가 자신의 어깨에 손을 대자 화들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그 순간, 영안이 곧장 뒤를 돌아보긴 했지만 다시 금세 고개를 돌리더니 소제갈과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갔다.

묵용청양이 판등의 등을 힘껏 내리치며 말했다.

“놀라 죽는 줄 알았잖아!”

* * *

산굴 조사를 통해 얻은 수확은 제법 많았다. 소제갈이 그려 온 초상화로 역참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그 시체들은 역시 황금을 호송하던 호위병이 맞았다.

영안은 현 관아의 인력을 빌려 그들의 시체를 옮겨 임시 장원에 보관했다.

게다가 산응이 알아 온 소식 덕에 얼추 가닥이 잡혔다. 강호에 최근 들어 비화루飛花樓라는 신비한 조직이 생겨났는데, 그들이 쓰는 암기가 전부 꽃 모양을 닮았다는 것이다. 그 도화 암기 또한 그중 하나였다.

하지만 비화루는 늘 비밀리에 감춰져 있으며 그들의 실제 모습을 본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또한 비화루의 근거지가 어디인지 아는 사람도 없었다. 그들이 아는 것이라고는 비화루가 살인이나 방화, 재물 강탈 등 떳떳하지 못한 짓만 한다는 점이었다.

만약 이번 황금 또한 비화루가 가져간 것이라면, 그들의 근거지만 찾으면 황금의 행방을 알아낼 수 있었다.

묵용청양은 비화루가 강호의 조직이라는 말에 흥분을 가라앉히기 어려웠다. 난생처음으로 강호와 가까워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화루의 행방을 어찌 찾는단 말인가? 단서는 여기서 또 끊어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