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14화
예를 갖춘 뒤 그녀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신첩, 북쪽 지역에 큰 가뭄이 났다 들었습니다. 조정에서 지원할 은자가 부족한데 어찌 신첩에게 말씀하지 않으십니까? 듣자니 음식을 구하러 다들 임안성으로 몰려들고 있다고 합니다.”
묵용린은 이런 상황이 되자, 더는 부끄러울 것도 없었기에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안 그래도 황후를 찾아가려던 참이오. 한데 황후가 먼저 와 주었구려. 짐이 황후에게 은자를 조금 빌려야겠소.”
“얼마나 빌리실 생각이십니까?”
묵용린은 상주서를 일일이 펼쳐 보며 말했다.
“전부 다 호부와 공부에서 돈을 보내 달라는 상주서요. 다 합치면 대략 이십만 냥 정도 되오.”
사봉봉이 가까이 다가가 상주서를 살펴보았다.
“일의 경중부터 나누어야 할 것입니다. 그들이 달라는 대로 줄 수는 없습니다. 우선 가장 중요한 일부터 선택해야 합니다.”
묵용린이 물었다.
“황후 생각에 지금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인 것 같소?”
“백성들의 목숨입니다.”
사봉봉의 목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단호했다.
묵용린은 가슴이 살짝 요동쳤다. 그의 생각과 동일했기 때문이었다.
사봉봉이 계속 입을 열었다.
“현재로선 이재민을 안정적으로 돌보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사가 상호는 북쪽 지역에 많은 객잔과 주루를 열었으니, 그곳에서 죽을 나눠 주면 생계를 잇게 하는 건 문제없을 것입니다. 또한 공부에서 요구하는 수로 공사도 함께 진행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숙식을 제공하고, 이재민들이 현지에서 물길을 파서 수로를 연결할 수 있게 돕는 겁니다.
이렇게 하면 이재민들이 고향을 버리고 피난을 갈 필요도 없을 뿐만 아니라, 물을 끌어오는 노동력도 해결할 수 있습니다. 황상 생각은 어떠십니까?”
이 얘기는 가난청도 했던 제안이었다. 다만 이재민들의 숙식 비용이 고민이었는데, 사봉봉이 먼저 이리 말을 꺼내 주니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사실 그는 그녀의 말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평소 돈밖에 모르는 여인인 줄 알았는데, 백성들의 목숨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다니. 이 일로 사봉봉에 대한 그의 인상이 조금 바뀌었다. 어쩌면 그녀는 간사한 장사꾼이 아니라 양심적이고 의로운 상인인지도 몰랐다.
그는 진심으로 고맙다는 뜻을 전했다.
“이리 도와줘서 고맙소, 황후. 이 은혜는 짐이 항상 가슴에 새겨 두겠소.”
사봉봉이 웃으며 말했다.
“죽을 나눠 주는 건 사가 상호에서 자체적으로 운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나머지 지출은 황상께서 신첩에게 빌려 가는 것이니 나중에 갚으셔야 합니다!”
그녀는 말끝을 높게 올리며 애교 섞인 어투로 말했다.
묵용린은 마치 깃털이 그의 가슴을 빠르게 스치고 가는 듯,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흘러나오는 것을 느꼈다.
“물론이오.”
그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짐은 그대의 은전을 거저 쓰지 않을 것이오. 꼭 갚겠소.”
사봉봉은 사앵앵에게 피해 지역의 상점에서 무료로 죽을 나누어 주라는 서신을 보냈다.
서신을 받은 사앵앵은 어린 황제가 마침내 사가 상호에 손을 뻗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하지만 이런 천재지변에 딸이 결정한 일을 나 몰라라 할 수는 없었다.
그녀가 분부를 내리자 사가 상호는 빠르게 일을 처리했고, 그 덕에 이재민들은 며칠 안에 적절한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그 결과, 임안성으로 밀려오는 이재민의 수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고 덩달아 묵용린의 탁자에 쌓인 구호 요청 상주서도 많이 줄었다.
묵용린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고, 잔뜩 찌푸렸던 미간도 훨씬 느슨해졌다.
방 안에 가만히 앉아 있던 그는 책상 맨 아래에서 책자를 꺼내 가장 마지막 장을 펼쳤다. 그리고 사봉봉의 공로를 적기 시작했다. 그는 상벌을 뚜렷하게 구분하는 사람이라, 공로와 과오를 여실히 기록해 두었다. 공로에 대한 치하와 과오로 인한 처벌 모두 어느 것 하나 빠뜨릴 수 없었다.
뒤이어 며칠간 사봉봉은 이재민을 구제할 좋은 방법을 생각해 냈고 황제를 찾아와 논의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가난청과 논의한 것이지만.
두 사람은 함께 차를 마시며 그 방법들의 실현 가능성을 이야기했고, 상의가 끝난 뒤엔 고개를 들고 황제의 결정을 기다렸다.
그들이 논의하는 동안 묵용린은 참견하는 둥 마는 둥 했지만, 유심히 귀를 기울이며 속으로 조용히 동의했다.
그들이 자신을 바라볼 땐, 일부러 깊게 고민하는 척 침묵했다. 곁눈으로 사봉봉이 그 커다란 눈으로 간절히 바라보는 모습이 보였다. 마치 칭찬을 기다리는 소녀 같아서 거절하기가 쉽지 않았다. 물론 거절할 수도 없었다. 가난청과 사봉봉의 제안은 매우 합리적이기 때문이었다.
이따금 그는 정말 의아했다. 동월에서 후궁의 여인은 조정의 일에 참여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근래 사봉봉은 이재민을 구제하는 일에 열과 성을 다했다. 그는 이러한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녀의 돈 때문에 위축되어서 그녀가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둔 건지도 몰랐다.
며칠 뒤, 그녀의 발길이 조금씩 뜸해지는가 싶더니 완전히 끊겼다. 그는 왠지 모르게 낯설었다. 마치 날마다 함께 정사를 논하던 대신이 별안간 휴가를 낸 것 같은 기분이었다. 서재에 한 사람이 비니 쓸쓸하기 짝이 없었다.
그가 가난청에게 물었다.
“요즘 황후는 왜 찾아오지 않는 것이냐?”
가난청이 웃으며 말했다.
“황상께 아룁니다. 이제 국면이 어느 정도 안정되었습니다. 황후 마마께서는 말씀하신 방법들을 이미 실행 중이니 당연히 오지 않으시지요.”
묵용린은 짧게 대꾸하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난청이 놀리듯 물었다.
“마마께서 오지 않으시니 허전하십니까?”
묵용린이 그를 흘기며 말했다.
“허전하긴. 오지 않으니 조용하기만 하구나.”
“황상, 마마의 제안 덕분에 구호에 필요한 은자가 얼마나 줄었는지 아십니까?”
“얼마나 줄었는가?”
“무려 오만 냥입니다.”
가난청이 기뻐하는 얼굴로 손뼉까지 치며 말했다.
“마마께서는 실제로 일을 하셨던 분이라 그러신지 마음이 정말 세심하십니다. 미처 소신이 생각하지 못한 부분까지도 마마께선 생각해 내시더군요. 이번 일로 소신은 깊이 탄복하였습니다. 일도 잘 처리되고, 돈도 아꼈지요. 만약 황상께서 호부와 공부 대인들께 처리하라고 하셨다면 아마 이십만 냥으로도 부족했을 겁니다.”
묵용린은 괜스레 조금 의기양양해졌다. 가난청의 칭찬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총명하고 일을 명료하게 처리하는 것으로 논하자면 가히 사봉봉을 이길 자가 없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좀 이상한 일이었다. 예전에는 사봉봉의 총명함을 그렇게나 싫어했는데, 그 총명함이 그를 위해 쓰이니 느낌이 달랐다. 흐뭇한 기분에 그녀가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가난청이 사봉봉을 칭찬하다니, 정말이지 자신이 칭찬을 받는 것보다 더 기뻤다.
가난청은 그런 황제의 모습이 조금 우스웠다. 사실 황제의 입꼬리는 아까부터 시종일관 올라가 있었다. 아마 황제는 자신이 어떤 표정일지 알지 못하는 것일 테지.
* * *
묵용린은 사봉봉에게 돈을 빌린 이후로 그녀에게 신세를 졌다는 생각이 가시지 않았다. 그녀를 볼 때마다 성을 내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그녀에게 제법 예를 갖추었다.
게다가 그는 신용을 중시하는 사람이라 하루빨리 그녀의 돈을 갚고 싶었다. 그래야 사봉봉 앞에서 그의 기세를 되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충분히 갚을 수는 있었지만, 아직 남원에서 황금이 올라오는 중이었다. 이제 남원은 동월의 속국이 되어 매년 황금을 진상했다. 그 황금이면 사봉봉의 돈을 갚고도 제법 여유가 있었기에 그는 줄곧 황금이 도착하기만 바랐다. 하지만 여정이 워낙 길고 금액도 커, 이동하는 데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했기에 그저 참을성을 가지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가 하염없이 기다리다 받은 것이라곤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소식이었다. 무려 두 대에 달하는 황금 마차는 물론 황금을 호송하는 호위병까지 감쪽같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소식이 전해지자,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
충격이 컸던 묵용린은 핏기 없는 얼굴로 옥좌에 앉아 있었다. 그리 많은 황금이 어찌 없어진단 말인가? 어떤 간 큰 놈이 감히 황제의 돈에 손을 댄단 말인가?
영안은 급히 궁으로 들어와 황제의 명을 받들어, 이 사건을 한 달 안에 해결하기로 했다.
환경문도 유례없는 긴장감에 휩싸였다. 황금 절도 사건은 사전에 아무런 조짐도 보이지 않았으니 분명 일찌감치 계획된 일이었을 터. 이렇게 순탄하게 황금을 가져간 걸 보면 매우 주도면밀한 계획을 짰다는 것이고, 그렇다는 건 그 어떤 허점이나 실마리를 남기지 않았다는 걸 뜻했다. 호위병들이 황금과 함께 사라진 것만 봐도 그러했다.
황금이 사라진 지역은 사실 임안성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임안성과 고작 두 개의 현성을 사이에 둔 황량한 산간 지역이었다.
요즘 통 비가 오지 않아 길이 매우 딱딱했지만, 길가의 잔디가 마차 바퀴에 눌린 흔적은 알아볼 수 있었다.
기이했던 건 영안이 조사를 하다 보니, 바퀴 흔적이 한 개천에서 끊겨 있었는데 개천 너머로는 더 이상 찾을 수 없다는 점이었다.
그는 언덕에 서서 개천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묵용청양은 광주리를 짊어진 채 의심스러운 게 보이면 곧장 광주리에 담았다. 영안이 서 있는 곳에 다다른 그녀가 영안에게 말했다.
“뭘 그리 멍하니 서 있어. 어서 단서를 찾아야지.”
영안은 그녀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개천만 빤히 바라보았다.
묵용청양은 그가 자신의 말을 듣지 못했다는 생각에 다시 그에게 말을 걸려 했지만, 판등이 그녀를 끌어당기며 말했다.
“안 형이 생각할 땐 방해하지 않는 게 좋아요. 그러다 생각이 끊기기라도 하면 하루 종일 생각나지 않을 때도 있거든요.”
그가 묵용청양의 광주리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뭘 이리 많이 주운 거예요? 전부 다 돌멩이랑 풀 따위네요. 이런 걸 주워다 어디에 쓰려고요?”
묵용청양이 광주리를 내려놓더니 돌멩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거 봐. 돌 위에 그림이 그려져 있어. 가운데 원이 있고 그 옆에 또 둥글게 이어져 있지. 꼭 해 같지 않아?”
판등이 말했다.
“개울가에서 주운 거죠? 물에 오랜 시간 씻기다 보면 이런 무늬가 생겨요. 전혀 이상할 거 없어요.”
묵용청양이 이번엔 커다란 풀뿌리를 들어 올렸다.
“이건 구불구불한 게 꼭 뱀 같지 않아?”
그녀는 풀뿌리를 쥔 손을 바들바들 떨며 판등 앞으로 불쑥 들이밀었다.
판등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묵용청양을 바라보았다.
묵용청양은 판등에게 장난이 먹히지 않자, 이번에는 풀뿌리를 등 뒤로 숨긴 뒤 산응 앞으로 다가갔다.
그녀가 불쑥 풀뿌리를 산응 옆에 던지며 소리쳤다.
“뱀이다!”
그 순간, 눈 깜짝할 사이에 검광이 허공을 갈랐다.
산응이 검을 휘둘러 풀뿌리를 두 동강 낸 것이다. 그가 언짢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재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