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11화
영안이 얼굴을 굳혔다.
“여인이 어떻게 이런 델 와?”
“그럼 넌 왜 날 여기로 데려왔는데?”
“나랑 같이 있을 땐, 괜찮아.”
“사금언이랑 같이 있을 땐 왜 안 되는데?”
“…….”
영안은 한참을 고민하다 조금 억지스러운 이유를 댔다.
“너보다 어리니까. 안에서 사고라도 나면, 네가 그 애를 지켜 줄 거야?”
묵용청양이 말했다.
“그 애도 무술 실력이 꽤 뛰어나니 당연히 제 몸은 제가 건사하겠지.”
두 사람은 투덕거리며 안쪽으로 걸어가다가 안에 들어가서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익숙한 점원이 친절하게 두 사람을 맞았다.
“영 공자, 오셨군요. 별실 첫 번째 방으로 안내할까요?”
영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묵용청양을 이끌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지난번, 그와 안월이 술을 마시던 별실이었다.
점원은 그들이 무얼 먹을 것인지 묻지도 않고 인사만 건넨 채 곧장 아래로 내려갔다.
묵용청양은 조금 의아했다.
“우릴 이렇게 푸대접하는 거야?”
“조급하게 굴지 마. 조금 있으면 가져올 테니까.”
영안이 그녀를 흘기며 물었다.
“먹을 게 없을까 봐?”
묵용청양은 난간 옆에 앉았다. 아래층 무대에서는 무희들이 춤을 추고 있었다.
무희들은 도홍색 치마를 입고 팔에는 금빛 비단을 걸치고 있었는데, 그 얇은 비단은 그들이 움직이는 대로 이리저리 흩날렸다. 마치 자그마한 금룡이 헤엄치는 것 같았다.
가느다란 허리를 틀고, 작은 발을 쉼없이 움직여 끊임없이 대열을 바꾸는 무희들의 질서정연한 동작을 보고 있으면 두 눈이 즐거울 정도였다.
손님들 사이에서는 간간이 박수가 터져 나오기도 했다.
묵용청양은 열심히 춤사위를 구경 중이었다.
그때, 죽렴이 들어 올려지는 소리가 들렸다.
점원이 음식을 가져왔다는 생각에, 그녀는 차를 마시려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점원이 아니라 웬 미인이 허리를 숙인 채 차와 다과를 상에 올려 두고 있었다.
그 미인은 살구색 치마에 청록색 허리띠를 매고 있었다. 소매와 치마 끝자락에 둘러진 옅은 청색 테는 서로 조화를 이루는 게 정말 아름다웠다.
또한 그녀는 머리카락도 곱게 빗어 올렸다. 평범한 비선계飛仙髻(양쪽으로 대칭이 되도록 높게 틀어 올린 모양)였는데, 앙증맞은 크기로 비스듬히 올린 발계髮髻에 은색 보요步搖와 두세 가지 장신구를 꽂았다. 보통 비선계를 할 때면 무거우리만큼 비취를 가득 꽂아 화려하게 꾸미는 게 보통인데, 그녀는 아니었다.
화장도 짙지 않았으나 눈꼬리에는 금색 가루를, 입술에는 도홍색 연지를 발라 얼굴 전체에 생기가 넘쳤다. 흰 피부가 돋보이는 미인이었다.
묵용청양은 그녀가 누구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바로 안월이었다. 하지만 안월이 직접 다과를 내올 줄은 몰랐다. 보아하니 영안은 정말 안월에게 남다른 감정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영안이 소개했다.
“여긴 안월, 청이각의 홍관紅倌(기녀)이다. 그리고 여긴 청양, 나와 같이 일하는 사람이지.”
안월도 묵용청양을 빤히 바라보았고 웃으며 입을 열었다.
“청양 소저, 관아에서 일하시다니 사내 못지않으시군요.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묵용청양이 공수를 하며 대꾸했다.
“별말씀을요, 안월 아가씨.”
마치 강호에 있는 협객다운 말투였다.
세 사람은 작은 탁자에 둘러앉았다.
아래층에선 음악이 유유히 흘렀고 무대에서는 아름다운 춤사위가 펼쳐졌다.
난간에 기대앉아 차를 마시며 한담을 나누고 음악과 춤을 감상하니 퍽 만족스러웠다.
안월은 거의 대화에 끼지 않고 묵묵히 차를 따르거나 상을 깨끗하게 정리해 주었다. 묵용청양과 영안이 해바라기씨로 싸움을 벌이느라 껍질이 사방에 튀었기 때문이었다.
묵용청양은 영안과 다투면서도 줄곧 안월을 관찰했다.
안월은 빙긋 미소를 지은 채 두 사람이 싸우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그 모습에 묵용청양은 생각했다.
‘영안이 저래서 안월을 좋아하는구나. 자신의 남자가 이렇게 함부로 행동하는데도 내버려 두다니, 마음이 넓군. 제법 철든 신붓감이네.’
그녀는 아버지가 해 주었던 말을 떠올렸다.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그 사람의 모든 결점까지 다 포용해 주어야 한다고.
문득 자신의 모습을 떠올려 보니, 그녀가 완전히 포용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황형조차도 어려웠다. 황형에게 불만이 얼마나 많은데. 묵용성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영안도 늘 그녀를 펄쩍 뛰게 했고 조금도 그녀에게 양보해 주는 법이 없었다.
그녀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집어 던지려던 해바라기씨를 입에 넣었다.
영안은 그녀의 움직임에 몸을 피하려다가, 그녀가 해바라기씨를 입에 털어 넣자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 웬수는 지금 자기가 얼마나 많은 해바라기씨를 먹고 있는지 알고는 있단 말인가?
묵용청양은 해바라기씨를 와그작 깨문 뒤에야 잘못되었다는 걸 깨닫고 서둘러 뱉었다. 영안은 탁자에 엎드려 웃음을 터뜨렸다.
어찌나 통쾌하게 웃는지, 그녀는 참지 못하고 또 그에게 손찌검을 했다. 그러다 해바라기씨 껍질이 목에 걸린 바람에 괴로워 눈물까지 흘렸다.
영안은 그 모습에 더는 웃지 못하고 서둘러 그녀의 등을 두드렸다. 그가 원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 바보야. 해바라기씨를 그렇게 먹는 사람이 어디 있어?”
안월은 손수건을 물에 적셔서 묵용청양의 입을 닦아 주었다. 그러고는 그를 나무라듯 말했다.
“목에 껍질이 걸렸는데 어찌 그리 비아냥거리십니까.”
영안은 곧장 입을 다물더니 묵용청양 앞에 놓여 있던 해바라기씨 그릇을 자기 앞으로 가져왔다. 더는 먹지 못하게 몰수한 셈이었다.
묵용청양은 입과 손을 다 닦은 뒤 생각했다.
‘거참 말 잘 듣네. 내가 그렇게 말했으면 분명 반박했을 텐데. 신붓감이 생겼다고 사람이 달라지는구나!’
안월은 다시 묵용청양에게 뜨거운 차를 따라 주며 마시게 했다.
“좀 괜찮아지셨습니까?”
그녀가 가까이 다가와 몸을 기울이자, 좋은 향기가 났다.
그녀의 부드럽고 상냥한 말투에 묵용청양은 참지 못하고 덥석 손을 붙잡았다.
“한결 좋아졌습니다. 안월, 당신은 정말 좋은 사람이네요. 우리 친하게 지내죠.”
“그럼요. 영 공자의 친우시니, 저와도 친우지요.”
안월은 웃으며 영안을 바라보았고, 영안도 다정한 미소로 화답했다.
묵용청양은 생각했다.
‘참 잘 어울리는 한 쌍이구나!”
다만 왠지 모르게 마음이 조금 괴로웠다.
묵용청양은 영안이 오늘 안월을 소개해 준 건, 가족을 보여 주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영안은 그래도 그녀를 매우 중요한 사람이라고 여기는 것이었다.
돌아가는 길에 그녀가 다 안다는 듯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걱정하지 마. 이 일은 나한테 맡겨.”
영안은 영문을 알지 못했다.
“무슨 일?”
묵용청양은 헤헤 웃을 뿐이었다. 지금 알려 주었다간 김이 샐지도 몰랐기에, 그녀는 뜸만 들이고 말해 주지 않았다.
묵용청양이 워낙 기상천외한 일을 잘 꾸민다는 건 영안도 잘 알고 있었기에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더 묻기도 성가셨다.
묵용청양은 영안을 따라 영부로 향했다. 그곳에서 저녁밥을 먹은 뒤, 가부에서 가소타와 잠시 놀아 준 그녀는 천천히 궁으로 돌아갔다.
궁에 돌아왔을 땐 이미 꽤 늦은 시각이었다.
저 멀리 보이는 승덕전에는 아직도 등불이 환히 켜져 있었다. 분명 묵용린이 아직 상주서를 읽는 중일 것이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 남서방으로 향했다.
영십칠이 무표정으로 계단 아래를 지키고 있었다. 묵용청양이 다가가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그녀는 영십칠이 그 자리에 있는 줄도 모르고 그대로 지나쳤다.
복도에는 사희가 기둥에 기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녀는 조용히 사희 뒤로 돌아가, 남서방 앞에 서서 조심스레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황제는 상주서가 아닌 구련환을 이리저리 돌리고 있었다. 고개를 숙인 그는 미간을 찌푸린 채 끊임없이 손을 놀리는 중이었다.
묵용청양이 벌컥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황형, 뭘 하고 계시는 거예요?”
황제는 화들짝 놀라 하마터면 구련환을 떨어뜨릴 뻔했다. 그가 곧장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뭐 하는 짓이냐?”
묵용청양은 그를 두려워하지 않았기에 입술을 동그랗게 말고서 대꾸했다.
“아직까지 등불을 밝히고 상주서를 읽고 계신 줄 알았죠. 역시 근면 성실한 황제라고 생각했는데,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있는 거였네요.”
황제가 그녀를 위아래로 훑으며 물었다.
“이제 돌아온 것이냐?”
“네. 영부에서 밥을 먹고 또 소타랑 잠깐 놀아 주었어요.”
황제가 고개를 저었다.
“여인이 날마다 그리 놀러만 다니다니…….”
묵용청양은 황형이 이 말을 할 때가 제일 싫었기에 그의 말을 끊었다.
“황형의 도움이 필요해서 찾아왔어요.”
황제는 딱히 좋은 일은 아닐 것임을 직감했다.
“어디 들어나 보자.”
“사실은요.”
묵용청양이 탁자에 몸을 기댄 채 말했다.
“제 벗한테 좋아하는 여인이 생겼는데요, 그 여인이 기예를 파는 사람이에요. 예술만 팔고 몸은 팔지 않는 그런 부류 있잖아요.
제 벗은 집안에서 그 여인을 싫어할까 봐 계속 말을 못 하고 있어요. 하지만 그 여인을 아내로 맞으려고 하고요. 그러니까 황형이 그 여인한테 봉호를 내려 주시면 안 될까요? 집안이 높아지면, 당당하게 시집갈 수 있잖아요.”
황제는 그녀의 말이 너무 뜬금없었다.
“지금 짐더러 기녀에게 봉호를 내리란 말이냐? 짐을 대체 뭘로 보고, 짐이 한낱 중매쟁이인 줄 아느냐?”
“황형, 이건 남을 도와 덕을 쌓는 일이라고요.”
황제는 커다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네 벗 중에 일, 이품 고관 아래인 집안이 없는데, 그런 집안 자식이 기녀를 아내로 들인다니, 이를 동의하는 부모가 더 이상하지. 예부터 우리 동월 사람들은 두 집안 간 비슷한 지위를 중시해 왔다.
한데 짐이 정말 그 기녀에게 봉호를 내린다면, 그자의 부모가 짐더러 혼군이라며 뒤에서 욕을 퍼부을 것이야.”
“황형, 그리 고리타분하게 생각하지 말아요. 두 사람이 서로 좋아하는 게 제일 중요하죠. 애정만 있다면 이런 속박에서 용감히 벗어날 수 있어요.”
황제가 말했다.
“네가 말하는 벗이 영안이지?”
묵용청양이 화들짝 놀라 물었다.
“황형이 그걸 어찌 알았어요?”
“네게 벗이 몇 명이나 된다고. 네가 짐에게 찾아와 청을 할 정도면 영안이나 사금언이 아니겠느냐. 사금언은 누이가 황후니 황후를 찾아가 부탁하면 편할 것이고. 그렇다면 남은 건 영안뿐이잖느냐.”
묵용청양이 엄지를 추켜세웠다.
“황형, 정말 대단하시네요. 우리 환경문 사람들과 비교해도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 분석 실력이었어요.”
황제는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