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10화
묵용청양은 난생처음 벽요궁에 와봤다. 휘황찬란한 장식을 보자마자, 그녀는 속에서 천불이 났다.
봉봉의 봉명궁은 이렇게 예쁘지 않은데, 어찌 이리 편애할 수 있단 말인가!
그녀는 뒷짐을 진 채 이곳저곳 들쑤시며 다녔다.
“이렇게 커다란 아왜나무라니. 황형, 황형 처소에 있는 것보다 더 크네요.”
“세상에, 이게 뭐람. 빙견氷絹이잖아요. 이리 귀한 비단을 탁자에 깔다니. 지금 황후 마마께서는 황궁 경비를 절약하려고 얼마나 애쓰시는데. 귀비 마마, 빙견을 겨우 탁자 까는 데 쓰는 건 너무 낭비 아닌가요?”
“하나, 둘, 셋, 넷, 얼음 대야가 네 개나 있네요. 황후 마마 처소에는 두 개뿐인데 말이에요. 어쩐지 뜨거운 정오에 밖을 거니신다 했더니, 방 안이 추우셨나 봐요!”
“와, 이건 참 호화로운 문발이네요. 황상은 묘안석으로 반지를 만드셨는데, 귀비는 문발에 붙이셨네요.”
“…….”
그녀가 입을 열 때마다 허 귀비의 안색은 점점 창백해졌다. 사실 엄청난 문제는 아니었지만, 만약 굳이 추궁한다면 황상이 꼬투리를 잡을 수도 있었다.
다행히 묵용성이 허 귀비를 도와주었다.
“목마르다며. 차를 내왔으니 어서 마시자.”
묵용청양이 눈을 부릅뜨며 물었다.
“그새 또 잊은 거야?”
“…….”
그는 묵용청양이 누군가를 업신여기면 반사적으로 편을 드는 게 이미 습관이 되어 있었다. 두 사람이 공공의 적에 대항한 적은 이번이 처음인 듯했다.
그가 코끝을 만지작거리며 손에 든 찻잔을 빤히 바라보더니 꾸물대며 입을 열었다.
“이렇게 얇은 금박을 입힌 자기 찻잔은 천 개를 구우면 겨우 하나를 얻을까 말까 하죠. 황상께서도 혹여 깨질까 전시품으로 쓰고 계시는데, 귀비께서는 찻잔으로 쓰시다니, 참으로 대범하십니다.”
벽요궁에 있는 대부분의 물건들은 대혼 전에 묵용린이 친히 상으로 내린 것이었다. 허설령이 황후의 지위를 얻지 못하였으니 이를 보상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제 와 돌이켜 보니 그가 생각하기에도 참으로 과했다 싶었다. 어떤 것들은 승덕전의 물건보다 더 좋았기 때문이다. 황제가 쓰는 규격보다 더 좋은 것 또한 죄였기에 청양이 따지는 걸 다 합치면 결코 가벼운 죄가 아니었다.
묵용린이 정색한 얼굴로 허 귀비에게 말했다.
“입궁해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건 당연하지만 겉치레에 치중해 지나치게 낭비하는 것은 아니 되오. 이 자기 찻잔처럼 말이오. 만약 한 개라도 깨지면 한 벌을 이루지 못하니, 못 쓰게 되지 않소. 장인들이 이 잔 하나를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찻잔을 구워야 했겠소.”
허 귀비는 공손한 태도로 최대한 솔직하게 대꾸했다.
“예, 황상. 잘 알겠습니다. 황상과 두 전하께서 찾아 주시니 신첩도 소홀히 대접할 수 없어서 한번 사용해 본 것입니다. 앞으로는 잘 담아 두고 소중히 보관하겠습니다.”
묵용린은 잘못을 인정하고 고치려 하는 허 귀비의 태도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번엔 되었으니, 다음부터 주의하시오.”
그때, 어린 궁녀가 안으로 들어와 고했다.
“마마, 유 귀인이 찾아왔습니다.”
허 귀비가 대꾸했다.
“어서 안으로 들라 하라.”
묵용청양은 유 귀인이 병이 났을 때 만났었기에 마르고 수척한 모습만 기억에 남아 있었다. 하지만 오늘 보니 그녀는 역시 뛰어난 미인이었다. 허 귀비와 비교해도 거의 손색이 없었다. 다만 크게 앓은 탓에 여전히 바짝 마른 모습이, 보는 이들로 하여금 동정심을 자아냈다.
유 귀인은 가까이 다가와 예를 갖추고, 다시 두 전하를 바라보더니 가장 낮은 아랫자리에 가서 앉았다.
묵용성은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황형은 정말 복도 많구나. 이 미인들을 가졌으면서, 그의 봉봉까지 가로채다니.
묵용린은 오랫동안 유 귀인을 만나지 못했기에, 그녀에게 말을 걸어 주었다.
“유 귀인, 몸은 많이 나아졌소?”
“황상께서 걱정해 주신 덕에 이미 다 나았습니다.”
유 귀인은 대답하며 조심스럽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뿌옇게 눈물이 맺힌 걸 보니 적잖이 감동한 듯했다.
하지만 묵용린의 시각은 다른 사내들과 달랐다. 이렇게 연약한 미인은 전혀 그의 흥미를 끌지 못했다.
그는 그저 기이하다고만 여길 뿐이었다. 방금 허 귀비도 그를 보며 눈시울을 붉혔는데, 유 귀인마저 똑같이 글썽거리다니. 모처럼 만에 만나서 다들 울상을 짓는 건 대체 무슨 이유 때문이란 말인가? 대체 왜?
반면 묵용성은 이런 수법에 잘 넘어가는 성격이라, 유 귀인이 울먹거리는 모습을 바라보며 속으로 미인을 위한 시를 한 수 지었다.
유 귀인이 바둑과 책을 좋아한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는데, 시를 읊는 것도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되자 묵용성의 마음 속에서 그녀에 대한 인상이 훨씬 더 좋아졌다.
그가 유 귀인에게 물었다.
“귀인께선 무슨 책을 좋아하십니까?”
유 귀인은 낯선 사내와 말을 섞는 게 너무 어색했기에 고개를 반쯤 숙인 채 겁에 질린 듯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딱히 본 것은 없고 그저 사서 같은 책이나 시詩와 사詞의 대표작들을 주로 봅니다.”
묵용성이 말했다.
“제게 시사 대표작이 아주 많습니다. 전부 유일본이지요. 시간이 나시거든 와서 보셔도 좋습니다.”
묵용린이 눈썹을 슬쩍 찡그리며 묵용성을 힐끔거렸다.
‘이 사람은 짐의 귀인이지, 네가 아무렇게나 꾀어도 되는 여인이 아니다.’
하지만 지금 묵용성의 눈에는 오로지 그녀밖에 안 보였기에 황형의 경고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는 옅은 미소를 지은 채 계속 유 귀인과 대화를 이어갔다.
묵용청양도 처음엔 눈을 희번덕였지만, 그마저도 나중엔 귀찮아졌다. 어쨌든 그녀 눈엔 사봉봉 외에 다른 여인들은 전혀 좋게 보이지 않으니 알아서 하라지.
묵용린은 아우가 자신을 무시하자, 성을 내려 했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 보니, 만약 저 애가 모든 여인에게 저리 대하는 거라면, 사봉봉을 향한 마음 또한 별거 아닐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의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허 귀비는 유 귀인과 묵용성이 계속 대화를 나누자, 입을 가리고 헛기침을 두어 차례 했다.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든 유 귀인은 허 귀비의 암시를 알아차리곤 그제야 자신이 무얼 하러 왔는지 깨달았다.
그녀가 생글생글 웃으며 묵용성에게 말했다.
“전하께선 어린 시절부터 책을 좋아하셨습니까?”
“예, 어릴 때부터 즐겨 봤습니다.”
“전하께선 어릴 때부터 공부를 열심히 하셨군요.”
유 귀인이 말했다.
“저에게 전하와 비슷한 연배인 오라버니가 있는데, 오라버니는 어릴 때부터 책을 싫어해서 날마다 아이들과 밖에서 뛰어놀기 바빴습니다.”
묵용성이 웃으며 묵용청양을 가리켰다.
“장공주와 비슷하군요.”
눈 깜짝할 사이, 그 장공주가 그의 뒤통수를 힘껏 내리쳤다. 어찌나 셌는지 그가 머리에 쓴 관이 비뚤어질 정도였다.
유 귀인이 입을 가리고 웃었다.
“전하께선 어릴 때 아이들과 함께 어울려 놀지 않으셨습니까?”
묵용청양이 말했다.
“성아는 어릴 때 놀아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요.”
“누가 그래.”
묵용성이 발끈했다.
“봉봉이 놀아 주었지.”
“전하와 황후께선 어린 시절 소꿉동무셨군요. 사이가 참 좋으시겠습니다.”
유 귀인은 이 말을 뱉으며 불안한 눈빛으로 황제를 힐끔거렸다.
그러나 황제는 담담한 얼굴로 차를 들이켜고 있었다.
설마 방금 한 말을 듣지 못한 것이란 말인가?
묵용성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사이가 아주 좋지요.”
묵용청양은 묵용성 옆자리에 앉아 있었기에 슬쩍 그의 팔뚝을 꼬집었다.
묵용성이 곧장 황제에게 고했다.
“황형, 청양이 절 자꾸 꼬집습니다.”
황제가 찻잔을 내려놓고 담담히 말했다.
“그럼 널 꼬집지, 누굴 꼬집겠느냐?”
말을 마친 그는 곧장 밖으로 나갔다.
황제가 떠나자, 묵용청양도 더는 자리를 지키지 않고 그를 따라나섰다.
묵용성은 갈피를 잡지 못하겠다는 듯 그녀를 쫓아갔다.
“왜, 내가 말실수라도 했어?”
“멍청한 놈!”
묵용청양이 말했다.
“황형 면전에서 봉봉이랑 사이가 좋다고 떠들어 대다니.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나랑 봉봉이 어릴 때 사이가 좋았던 건 황형도 알고 있잖아.”
“그건 황형이 네가 봉봉을 좋아하는 걸 몰랐을 때잖아. 지금은 알고 있고!”
묵용성은 벼락을 맞은 기분이었다.
“뭐? 황형이 그걸 어떻게 알아?”
묵용청양은 뒤가 켕겨서 서둘러 뛰어가며 말했다.
“내가 말했어.”
“묵용청양!”
묵용성은 붉으락푸르락한 달아오른 얼굴로 고함을 지르며 그녀를 뒤쫓았다.
“오늘 너 죽고 나 죽자!”
* * *
환경문에 막 도착한 묵용청양은 밖으로 나오는 영안과 마주쳤다. 그녀는 그가 사건을 조사하러 간다는 생각에 황급히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어디 가?”
“네가 상관할 바 아니야.”
영안은 그녀를 피해 계속 앞으로 걸어가더니 몇 걸음 뒤 멈춰 서서 휙 뒤돌아보았다.
묵용청양은 여전히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시 고개를 돌려 앞으로 걸어가던 그는 결국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알았어. 데려가서 구경시켜 줄게.”
소꿉동무의 무정함에 새삼 감회가 새롭던 찰나였는데, 이어진 말에 묵용청양은 곧장 생각을 바꾸었다. 그는 역시 좋은 벗이었다. 그녀는 손을 뻗어 그의 어깨에 올려놓으며 배시시 웃었다.
“이래야 벗이지.”
영안은 어깨를 흔들어 그녀의 손을 떨어뜨리곤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여긴 거리야. 조심해. 네가 여인이 아니긴 해도, 다른 사람들은 그 사실을 모르니까!”
말을 마친 그는 재빨리 앞으로 걸어갔다.
물론 묵용청양의 반응도 재빨랐다. 곧장 다리를 내뻗어 영안의 엉덩이를 걷어찬 그녀는 폭소를 터뜨렸다. 꼭 천진무구하던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금세 서글픈 기분이 밀려왔다. 이제 그녀는 더 이상 영안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이 아니었다.
앞서가던 영안은 엉덩이를 문지르며 슬며시 입꼬리를 치켜세웠다. 그래, 됐다. 그저 버릇 나쁜 여인일 뿐인걸.
그가 청이각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자, 묵용청양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날 여기 데려오려 한 거야?”
영안이 팔짱을 끼며 말했다.
“못 들어가겠으면 관둬. 나 혼자 갈 테니까.”
“누가 못 들어간대?”
묵용청양은 발걸음을 옮겨 안으로 들어갔다.
“나도 여기 와 봤거든.”
영안이 흠칫 놀라 물었다.
“누구랑?”
“사금언.”
차마 혼자 왔던 그날 일까지 말하기는 부끄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