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09화
문 앞으로 다가간 그는 또다시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안에서는 묵용청양이 사봉봉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봉봉, 황형한테 속지 말아요. 지금 황형이 잘해 주는 건 다 가짜예요.”
“그걸 전하께서 어찌 아십니까?”
“전 황형을 아주 잘 알거든요. 황형은 황제예요. 그리고 세상에서 권모술수를 가장 잘 부리는 사람이 바로 황제잖아요.
황형은 잔꾀가 많아서 분명 봉봉에 대한 선입견도 쉽게 바꾸지 않을 거예요. 탑라를 빌려준 건 순전히 죄책감이 들어서겠죠. 어쨌든 황형이 그렇게 만든 거니까요.
하지만 가장 중요한 목적은 구련환을 얻어 내는 거였어요. 봉봉이 대범한 성격이라는 걸 아니까 먼저 탑라를 빌려준 거죠. 그럼 분명 구련환을 받게 될 걸 아니까요. 보세요, 황형의 계책이 지금 딱 들어맞았잖아요.”
“그건 좀…….”
“아주 정확하죠?”
묵용청양이 기세등등한 표정으로 말했다.
“제가 환경문에서 그냥 밥만 축내고 있는 게 아니에요. 많은 걸 배웠다고요. 영안이 그랬어요. 모든 사건에는 그에 따른 분석이 있어야 한다고. 그래서 인간의 내면을 분석하는 걸 배워야 한대요.
속담에 그런 말도 있잖아요. 천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하물며 제왕의 마음을 어찌 헤아리겠어요…….”
바깥에서 그 말을 듣고 있던 묵용린은 당장이라도 뛰어 들어가 묵용청양의 뺨을 때리고 싶었다. 몇 차례 심호흡하며 정신을 가다듬고 나서야 그런 마음을 억누를 수 있었다.
사봉봉이 말했다.
“황상께선 전하의 말씀처럼 그리 나쁜 분이 아니십니다. 본디 큰일을 하시는 분은 다른 이들보다 의심이 조금 많은 편이지요. 그저 늘 선한 마음으로 그리하신다면 괜찮지 않겠습니까. 황상께서는 효를 중시하시고 아우들도 잘 보살펴 주시지요. 또 백성들을 아끼고 그들의 존경을 받는 영명한 황제이십니다.”
묵용린은 사봉봉의 목소리가 이렇게 듣기 좋았다는 걸 처음 깨달았다. 마치 미풍이 불어오듯 따스하고 낭랑한 게, 그의 마음속에 있던 원한을 단번에 흩뜨리는 듯했다.
말을 마친 사봉봉은 문 쪽에 얼핏 보이는 그림자를 힐끗거렸다. 조금 전, 다행히 제때 발견한 덕에 최악의 상황을 면할 수 있었다.
* * *
허 귀비는 안으로 들어오는 금령을 바라보며 조급한 마음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찌 되었느냐. 소식은?”
“마마, 황상께선 봉명궁에 더 머무르시다 어선을 드실 거랍니다. 장공주 전하와 성 전하도 함께요.”
허 귀미는 멍한 표정으로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봉명궁에서 어선까지 드시겠다고?”
금령이 방 안에 있는 이들을 모두 물린 뒤, 다시 입을 열었다.
“예, 소인도 황상께서 무슨 생각이신지 모르겠습니다. 곽 노야께서 하시기로 한 일을 다 하셨으니 황상께서도 분명 전부 다 들으셨을 텐데, 아무런 표명도 하시지 않다니요. 곽 노야께서도 소식을 기다리시는 중입니다.”
허 귀비가 한참 동안 침묵하다 말했다.
“황상께서 황후를 좋아하지 않으시니 신경 쓰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도 어쨌든 황상의 체면과 관련된 일이 아닙니까. 황후와 성 전하께서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데, 소문이 나면 듣기 좋겠습니까?”
금령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소인은 정말 모르겠습니다.”
“황상의 마음을 우리가 어찌 알겠느냐?”
허 귀비가 쓴웃음을 지었다.
“외숙부께 전하거라. 이 일은 그리 급하지 않으니 상황을 지켜보자고. 비록 좌천되셨지만, 어쨌든 궁에 남아 계시니 분명 기회는 있을 거다.”
금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허 귀비의 쓸쓸한 표정에, 금령은 그녀를 위로했다.
“마마,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시어요. 이번엔 비록 성공하진 못했지만, 그래도 황상께서 황후 마마를 정말 마음에 두지 않으신다는 걸 확인했잖습니까.
소인이 금화궁 사람한테 들었는데, 어젯밤 황후 마마께서 수상쩍게 매화 숲에서 서성이다가 황상을 마주친 거라고 합니다. 그리곤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나중에 보니 발목을 접질렸다지 뭡니까. 황후 마마도 저리 황상 앞을 가로막고 서서 마주치는데, 마마께서도 우연을 가장하여 마주쳐 보는 건 어떠신지요?”
허 귀비가 얼굴을 굳혔다.
“본궁이 어찌 그 염치없는 장사꾼과 똑같이 할 수 있단 말이냐?”
* * *
반 시진 후, 허 귀비는 나무 아래에 서 있었다.
저 멀리 궁녀가 손수건을 흔들자, 그녀는 옷매무새를 다듬고 가볍게 부채질을 하며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탁 트인 곳에 도착하니, 묵용린이 장공주 전하와 성 전하를 거느리고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가 길가에 서서 예를 갖췄다.
“신첩, 황상을 뵙습니다.”
묵용린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귀비, 어딜 가는 길이오?”
허 귀비가 웃으며 답했다.
“방금 식사를 마쳐서 밖을 거닐고 있었습니다.”
옆에 있던 묵용청양이 코웃음을 치더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렇게 더운 날씨에 밖을 거닐다니, 귀비 마마께선 참으로 흥이 넘치십니다.”
묵용성은 평소 묵용청양이 각을 세우는 사람이면 습관적으로 그자의 편을 들어주었다. 이번에도 그가 곧장 허 귀비를 옹호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더운 날씨엔 밖을 걷지도 못해? 추운 날에만 나와야 한단 말이야?”
“지금은 정오야. 머리 꼭대기에 해가 떠 있는데, 더위라도 먹으면 어찌하려고?”
“넌 해가 뜨거울 때에도 포고를 하는데, 다른 사람은 밖에도 나오면 안 돼?”
묵용청양은 분통이 터졌다. 아무래도 이놈이 얻어맞고 싶어 환장한 듯했다. 그녀는 두말하지 않고 덥석 그의 옷깃을 낚아챘다.
“묵용성, 따라와. 한판 붙어!”
묵용성은 묵용린 뒤에 몸을 숨기며 지지 않고 입을 놀렸다.
“난 고상한 문인이라 이치를 따지는 것뿐이야. 너와는 달리…….”
“나랑 뭐가 다른데?”
그녀는 아우를 끌어냈다. 어찌나 과격한지, 허 귀비마저 깜짝 놀라 황제 곁으로 몸을 움츠렸다.
한데 황제도 이리 깜짝 놀랄 줄이야. 황제는 눈 깜짝할 사이에 그녀와 거리를 벌렸다.
허 귀비는 황제의 노란색 옷자락이 시야에서 스쳐 가는 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순식간에 벌어진 거리 탓에 그녀는 황제에게 엄청난 소외감을 느꼈다. 만약 그녀가 체면을 신경 쓰지 않았다면, 분명 황제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통곡하며 “황상, 신첩을 다 잊으신 겁니까?” 하고 부르짖었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녀는 그럴 수 없었다. 그녀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좌상부 적장녀인 허설령이기 때문이었다.
묵용성은 적잖이 당황했다.
황형이 분명 묵용청양을 혼낼 줄 알았는데, 그러기는커녕 눈 깜짝할 사이에 한쪽으로 피하더니 가만히 두 사람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분명 목련 나무 아래에선 그에게 원하는 건 모든 들어주겠다며 장담하던 황형인데……. 거짓말쟁이, 묵용청양이 돌아온 뒤로 황형은 귀신도 꺼리는 장공주를 더 편애했다.
그는 허 귀비 앞에서 묵용청양에게 얻어맞고 싶진 않았기에 작게 애원했다.
“황저, 다른 사람도 있는데 그만하지?”
묵용청양은 황저라는 호칭에, 아우가 용서를 구한다는 걸 알아차리곤 그만두기로 했다.
그녀도 목소리를 낮게 깔며 말했다.
“다른 사람인 걸 알면서 왜 도와주고 난리야? 잊지 마, 우린 다 봉봉 편이라는 걸.”
묵용성은 눈을 끔뻑이더니, 그제야 그녀의 말을 알아듣고는 진지하게 말했다.
“정말 깜빡할 뻔했네. 황형이 귀비를 좋아하고 황수는 좋아하지 않으니까, 우린 반드시 황수를 도와야 해.”
“그러니까. 귀비 좀 봐 봐. 이 뜨거운 날씨에 밖을 걸어 다니다니, 분명 황형을 기다린 거라고. 내가 무려 환경문 사람인데, 그걸 못 알아차릴까 봐?”
두 사람 다 싸늘하게 굳은 표정으로 작게 말하고 있었지만, 묵용린과 허 귀비는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들을 수 있었다. 그들은 수치심과 분노에 얼굴을 붉혔다.
“황상.”
허 귀비가 억울하다는 듯 그를 불렀다. 지금껏 살면서 이런 식으로 체면이 깎인 적은 없었다.
묵용린이 그녀에게 시선을 옮겼다.
황형은 허 귀비를 좋아한다는 묵용성의 말이 그에게 잊고 있던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귀비는 그가 마음에 두었던 여인이지만, 근래에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성공적인 제왕이 되기 위해선 반드시 총애를 고르게 나누어 주어야 하는 법. 그 또한 그녀에게 조금 더 잘해 주어야 했다.
그가 웃으며 말했다.
“날이 무척 더워서 목이 타는군. 귀비의 처소로 가서 차를 한잔 얻어 마셔야겠소.”
허 귀비는 감격스러워서 눈물이 나올 뻔했다.
눈물이 글썽글썽 맺힌 그녀의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묵용린은 조금 의아했다.
차를 마시러 가겠다는데, 어째서 저리 울상이란 말인가? 설마 찻잎이 다 떨어진 것이란 말인가?
자리를 뜨기 전, 그가 웬수 같은 동생들에게 말했다.
“너희는 계속 싸우거라. 짐은 먼저 가마.”
묵용청양은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가자, 서둘러 그의 뒤를 쫓았다.
“황형, 저도 목이 마른 게 차 한 잔 얻어 마셔야겠어요.”
“…….”
허 귀비는 할 말을 잃었다.
묵용성은 별로 가고 싶지 않았다.
그의 마음속엔 모순되는 생각이 자리잡고 있었다. 황제가 사봉봉을 업신여기면 가슴이 아팠지만, 그렇다고 잘해 준다고 생각하니 그 또한 별로 좋지 않았다.
그는 사봉봉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황제도 좋아하지 않았다. 어쨌든 이 문제에서 그와 황형은 똑같은 위치였다.
그는 봉명궁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잠시 망설였다. 줄곧 그를 지켜보고 있던 묵용린은 낌새를 알아차리곤 그에게 손짓하며 말했다.
“너도 가자꾸나.”
“…….”
허 귀비는 또 한 번 할 말을 잃었다.
그렇게 해서 묵용린은 아우와 누이동생, 시종들까지 거창하게 데리고 벽요궁으로 향했다.
허 귀비는 함께 걸어가는 황상과 두 전하를 바라보며 금령에게 눈짓을 보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제대로 떠들썩하게 꾸며 볼 생각이었다.
금령은 조용히 그녀의 뜻을 받잡고 천천히 발걸음을 늦췄다. 이내 어린 궁녀를 잡아끌고 귓속말로 무어라 속삭였다. 궁녀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몸을 돌려 다른 방향으로 향했다.
* * *
봉명궁에선 금천아가 방금 들은 소식을 사봉봉에게 전하고 있었다.
“마마, 황상께서 공주 전하와 성 전하를 데리고 벽요궁으로 가셨답니다.”
사봉봉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쩌다가?”
금천아가 투덜대며 말했다.
“황상께서 마마께 이제 좀 잘해 주시려나 했는데, 나가시자마자 곧장 귀비한테 가셨을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것도 두 전하까지 함께 데리고요.
두 전하께선 오직 마마께만 잘해 드렸는데, 이젠 황상께서 강제로 귀비와 가까이 지내게 하시려나 봅니다. 마마를 고립시키시려고요.”
사봉봉은 얼토당토않은 그녀의 생각에 웃음만 나왔다.
“하루 종일 그렇게 의심 좀 하지 말거라. 그러다 본궁이 또다시 방법을 짜내어 네게 면사 금패를 얻어 줘야 할지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