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08화
오늘은 조정에 특별한 일이 없어서 일찌감치 조회를 마친 묵용린은 곧장 남서방으로 돌아왔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책상 위에 놓인 사봉봉의 구련환이 보였다.
지난번에 봉명궁에선 그것을 가까이에서 볼 기회가 없었다. 그땐 사봉봉을 매우 하찮게 여길 때였고, 고작 장난감 하나 때문에 그녀에게 부탁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 구련환은 줄곧 그의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다. 오죽하면 내무부에 똑같은 걸 만들어 보라고 했을까.
그가 사희에게 물었다.
“황후가 네게 가져가라더냐?”
“예, 마마께서 호의에 답례하지 않는 건 예가 아니라며 황상께 구련환을 며칠 빌려 드린다고 하셨습니다.”
묵용린은 입꼬리를 슬쩍 올리더니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차를 마시며 구련환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사희가 차마 방해할 수 없어 밖으로 나가려는데, 황제가 별안간 구련환을 내려놓으며 헛기침을 했다.
“오늘 아침에 가 보니, 황후의 다리는 좀 나아졌더냐?”
“예, 많이 좋아지신 듯합니다.”
사희가 말했다.
“기분도 좋아 보이셨지요. 아, 마마께서 소인에게 꼭 감사 인사를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황상께서 이리 세심하게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하다고요.”
묵용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왕 감사 인사를 할 거라면 직접 보고 해야지, 네게 해서 무엇 하겠느냐. 안 그래도 조회 내내 앉아 있느라 피곤했는데 좀 걸어야겠다.”
사희는 탁자에 도로 놓인 구련환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황상, 줄곧 갖고 싶어 하시던 구련환이 아닙니까. 막상 손에 넣으니 싫증이라도 나셨습니까? 황후 마마께서 다시 가져가시면 그때는 더 살펴보고 싶어도 그러실 수 없을 텐데 말입니다.’
하지만 그는 이 말을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진 못했다.
* * *
아직 이른 시간이라 오후만큼 무덥진 않았지만, 햇볕은 걷다 보면 땀이 날 만큼 내리쬐고 있었다.
조금 뚱뚱한 체격의 왕장량은 얼마 지나지 않아 숨을 헉헉거리더니 손수건을 꺼내 땀을 닦았다. 고개를 들어 보니, 황제는 이미 저만치 앞서가고 있었다. 그는 서둘러 황제의 뒤를 쫓았다.
봉명궁은 무척 떠들썩했다. 황후가 발목을 접질렸다는 말에 묵용청양과 묵용성이 모두 찾아와 사봉봉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묵용청양은 사봉봉을 바라보며 아무 말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사봉봉은 영문을 알 수 없어 그녀에게 물었다.
“어찌 절 그리 보십니까?”
묵용청양이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봉봉, 걱정하지 말아요. 어찌 되었든 내가 지켜 줄게요.”
사봉봉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전 궁에서 아주 잘 지내고 있으니까요.”
묵용청양은 그래도 고개를 저으며 탄식을 내뱉었다. 그녀 또한 황형이 사봉봉을 극도로 싫어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화가 치솟으면 죽이고 싶어 할 정도로. 사봉봉이 다리를 다친 게 바로 그 증거 아니겠는가.
묵용성이 말했다.
“황수, 나도 지켜 줄게요.”
사봉봉은 그들의 말이 의아하기만 했다.
“전 정말 괜찮대도요. 혹 밖에서 무슨 말을 들은 것입니까?”
묵용청양은 결국 참지 못하고 그녀에게 물었다.
“황형이 이렇게 만든 거죠?”
사봉봉도 굳이 부인하진 않았다.
“고의로 그러신 건 아닙니다.”
묵용청양이 말꼬리를 길게 늘어뜨리며 다 아는 듯 말했다.
“나도 다 알아요…….”
“무얼요?”
묵용청양이 목소리를 깔며 말했다.
“황형이 봉봉을 싫어한다는 거요.”
사봉봉이 웃으며 말했다.
“그게 비밀도 아니고, 황상께서 절 싫어하시는 건 모든 이들이 다 압니다.”
묵용성이 사봉봉의 편을 들며 불평했다.
“아무리 싫어해도 이렇게 하면 안 되죠. 너무 비겁하잖아요!”
사봉봉이 안색을 굳히며 말했다.
“전하,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황상께서는 애당초 절 황후로 들이기 싫어하셨어요. 제가 입궁한 걸 싫어하시는 게 당연합니다. 하지만 지금 황상과 제 사이는 조금 나아진 듯…….”
묵용청양이 그녀의 말을 끊었다.
“그건 착각일 뿐이에요. 사이가 나아졌는데 발을 다치게 해요? 사실 우리 황형은 도량이 작아도 너무 작아서 좀 꽁한 데가 있어요…….”
창밖에 서 있던 왕장량은 그들의 대화를 듣는 내내 이마에 땀이 맺혔다. 그는 슬쩍 황제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두 전하께서 참으로 제때에 훼방을 놓으시는구나.’
방금 전, 봉명궁에 도착했을 때 묵용린은 그의 방문을 알리려는 궁인들을 서둘러 눈빛으로 제지했다. 사봉봉이 탑라를 집중해서 보던 모습이 떠올라, 그녀를 놀라게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창가로 다가가 보니 배은망덕한 두 놈이 아주 작정하고 그의 험담을 늘어놓고 있는 게 아닌가.
사실 그는 심경이 복잡했다. 그들이 하는 말이 전부 사실인 걸 알지만,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들으니 이상한 기분이 드는 게, 어쨌든 그리 좋진 않았다.
그는 미동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사봉봉이 어찌 말하는지 듣고 싶었다.
결국 그녀는 그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는 것과 함께 둘의 사이가 조금 좋아졌다는 말까지 했다.
그 말에 그는 기분이 좋았다. 그 또한 그녀의 말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기쁨도 잠시, 묵용청양이 또다시 그의 기분을 바닥까지 끌어 내렸다. 정말 귀신도 꺼리는 공주가 아닐 수 없었다…….
그도 묵용청양이 그저 별 생각 없이 하는 말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정말 신경 쓰고 있는 사람은 묵용성이었다. 안 그래도 알아듣게 언질을 줄 생각이었는데, 그와 채 만나기도 전에 묵용성은 또다시 봉명궁으로 찾아왔다. 조금도 꺼리지 않는 기색이었다.
그는 걸음을 옮겨 안으로 들어갔다. 역시나 묵용청양은 깜짝 놀라 입을 쩍 벌렸다. 그녀는 뒷말을 목구멍 뒤로 삼킨 채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황형, 오셨어요.”
묵용성도 다가와 예를 갖췄다.
묵용린은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는데,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사봉봉을 보며 서둘러 입을 열었다.
“다리를 다쳤으니 가만히 앉아 계시오.”
그가 탁자에 놓인 탑라를 바라보며 사봉봉에게 물었다.
“어디까지 풀었소?”
“두 번째 관문을 거의 다 해갑니다.”
사봉봉이 말했다.
“황상께선 어디까지 푸셨습니까?”
“짐은 세 번째 관문까지 했소. 난청과 마찬가지로 세 번째 관문을 다 풀진 못했소.”
“신첩도 빨리 황상을 따라잡고 싶습니다.”
“만약 그대가 세 번째 관문을 넘는다면 상으로 탑라를 그대에게 주겠소.”
사봉봉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황상. 하면 신첩, 더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
묵용청양은 넋이 나간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황형은 사봉봉을 죽이고 싶을 만큼 싫어하는 게 아니었던가? 어찌 별안간 저리 우호적인 모습을 보인단 말인가? 분명 방금 전 대화를 엿듣고 연기하는 것일 테지, 흥! 역시 황제가 되려면 간악하고 교활해야 한다더니.
묵용성은 황형이 사봉봉과 기쁘게 대화를 나누자, 쓸쓸한 얼굴로 방을 빠져나와 뒷전으로 향했다.
바깥 정원에는 백목련이 심어져 있었는데, 사발만 한 꽃송이가 마치 나무에 빼곡히 앉아 있는 흰 비둘기 떼처럼 무성하게 피어 있었다.
그는 나무 아래에 서서 꽃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내 주먹으로 나무줄기를 내려치며 비참하게 소리쳤다.
“진짜 싫다…….”
“뭐가 싫다는 것이냐?”
“내가 능력이 없…….”
지금 누가 그의 말을 받아친 것이란 말인가? 묵용성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묵용린이 처마 밑에 서서 웃을 듯 말 듯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묵용성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돌려 또다시 주먹으로 나무를 내리치더니 여전히 울적한 감정을 드러내며 말했다.
“신제가 능력이 없어 청양을 이기지 못한다는 게 정말 싫습니다.”
황제의 입꼬리가 움찔거렸다.
‘못된 놈. 짐이 모를 줄 알고? 어찌 그리 매번 똑같은 핑계를 대는지. 다음번엔 좀 참신한 걸로 생각해 보거라!’
묵용린이 천천히 나무 아래로 다가가 꽃을 바라보았다.
“이 꽃이 하얀 것 같으냐?”
묵용성이 대꾸했다.
“하얗지요.”
“만약 더러워지면, 그때도 하얄까?”
“하얗지 않을 겁니다.”
묵용성은 황형의 질문이 너무 심오하다고 생각했다. 반면 자신의 대답은 너무 단순한 것 같았다.
묵용린은 여전히 고개를 들어 꽃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인의 명성은 이 꽃과 같다. 한 번 더러워지면 다시 깨끗해질 수 없지.”
묵용성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황형은 지금 그를 일깨워 주고 있었다. 황형이 무슨 소문이라도 들은 것이란 말인가?
“신제, 잘 알겠습니다.”
그는 매우 공손하게 답했다.
묵용린이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정말 알겠느냐?
“예. 앞으로 더 신중히 행동하여 황형을 난처하게 하는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무슨 일이든 우선 잘못했다고 해야 했다. 이건 육황숙이 알려 준 처신 방법인데, 황제 앞이든 여인 앞이든 언제나 효과 만점이라고 했다.
역시, 묵용린의 안색이 한결 밝아졌다.
그가 묵용성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성아, 짐은 태후께 널 부귀한 왕야로 만들어 드리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네가 지금 이 생활이 딱히 재미없다면, 황형은 네가 언제든 조정에 들어오는 걸 환영할 것이다. 짐이 최대한 도와주마.”
묵용성은 황송함에 몸 둘 바를 몰랐다. 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그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걸 잘 알면서 그더러 조정에 들어오라니? 이는 현명하고 유능한 인재를 거두려는 황제의 평소 태도와도 거리가 멀었다.
그가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황형. 황형께서도 신제를 잘 아시지 않습니까. 신제는 그저 시를 읊고 그림을 그리는 것들만 할 줄 알지, 다른 건 못 합니다. 조정에 그리 많은 문무백관이 있는데 신제 하나쯤이야 없어도 되지 않겠습니까.”
묵용린이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짐의 말은, 짐에게 아우는 오직 너 하나뿐이니, 네가 무얼 하고 싶든 최대한 도와주겠다는 뜻이었다.”
묵용성은 심장이 철렁였다.
“정말입니까, 황형?”
“당연히 정말이고말고. 원하는 거라도 있는 것이냐?”
그 찰나의 순간, 묵용성은 생각했다.
‘하면 봉봉을 제게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잠시 망설이는데, 묵용린의 느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급해할 것 없다. 천천히 생각해 보고 얘기하거라.”
묵용성은 왠지 모르게 그 말이 위협처럼 느껴졌다. 그는 하고 싶은 말을 삼키고 고개를 저으며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황형, 신제는 모든 걸 누리고 있어 더는 원하는 게 없습니다.”
묵용린은 아우가 단번에 그의 의미를 깨닫고 그리 대답해 매우 만족스러웠다. 그가 안쪽으로 고갯짓하며 말했다.
“들어갈 테냐?”
“황형 먼저 들어가시지요. 신제는 꽃을 더 감상하겠습니다.”
묵용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발걸음을 돌려 안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