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07화
침상에 기대어 넋을 놓고 있던 묵용린은 사희가 살금살금 걸어 들어오자 얼른 자세를 바로 했다.
“어떠하냐?”
“마마께서 발목을 접질리셨는다는데 통증이 꽤 심하신 것 같습니다. 시종이 잠시 밖에서 들었는데 마마께서 계속 비명을 지르셨다고 합니다.”
“어째서 비명을 지른단 말이야?”
“금천아가 마마께 약을 발라 주는데 하도 힘이 세서 마마께서 아파하시는 것 같습니다.”
묵용린은 냉담한 얼굴로 말했다.
“소처럼 건장하게 생긴 자니 당연히 힘도 세겠지. 황후는 각 궁에서 지출을 아끼는 것보다 우선 그 소 같은 종의 밥부터 줄여야겠구나.”
사희가 말했다.
“금천아도 마마를 위해 그러는 겁니다. 어혈을 문질러서 풀지 않으면 나중에 종기가 생깁니다.”
묵용린은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여종이 뭘 알겠느냐? 멀쩡한 발을 문질러서 오히려 망가뜨리는지 어떻게 알고? 그냥 태의에게 한번 가 보라고 하거라. 아무리 그래도 짐의 황후인데… 절뚝거리면 되겠느냐? 짐의 체면은 뭐가 되겠어?”
사희는 얼른 알겠다고 답하며 발길을 돌렸다.
그때 황제가 한 번 더 물었다.
“오늘은 누가 태의원에서 당번을 서느냐?”
사희는 가만히 생각해 보다가 대답했다.
“아마도 노 의정인 것 같습니다.”
“그럼 노 의정에게 한번 다녀오라고 하거라.”
“네, 황상.”
허리를 굽히고 물러나던 사희가 슬쩍 웃었다. 황제는 분명 황후를 걱정하면서도 입으로는 투덜거리며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 노비들은 다 알 수 있었다.
노 의정이 봉명궁에 도착했을 때, 금천아는 이미 사봉봉을 도와 정리를 마쳤다. 하지만 노 의정은 마음이 놓이지 않아 한번 살펴보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황제가 보냈다는 말에 사봉봉도 마음이 움직였다. 아마도 묵용린이 약간 죄책감이 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를 탓하지 않았다. 이번 일은 그녀가 친 사고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황제가 이런 선의를 보인 것만 해도 작은 진전이 있는 것 같았다.
접질린 곳을 확인한 노 의정은 상태가 그리 심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안심했다. 그리곤 근골 상처에 바르는 약유藥油를 두 병 남기며 금천아에게 이틀간 아침, 점심, 저녁에 각각 한 번씩 황후 마마의 상처 부위를 문지르라고 알려 줬다.
약을 건네받은 금천아는 노 의정에게 사례하고 소태감에게 배웅하게 했다.
노 의정은 태의원에 가는 대신 곧바로 승덕전으로 돌아가 고했다.
이미 목욕을 마치고 침의를 입은 황제는 머리카락을 풀어헤친 채 등불 아래에 앉아서 서책을 읽고 있었다. 그는 노 의정을 들라 하고 물었다.
“황후의 상태는 어떠한가?”
“황상께 아룁니다. 황후 마마께서 발목을 접질리신 것은 맞지만, 그리 심한 편은 아닙니다. 금천아가 이미 마마께 약을 발라 드렸기에 내일 몇 번 더 바르면 천천히 나으실 겁니다. 다만, 며칠은 움직이지 말고 쉬셔야 합니다.”
“그 말도 금천아에게 전했는가?”
“네, 소신이 당부하였나이다.”
황제는 서책을 말아 쥐며 물었다.
“며칠은 쉬어야 한다?”
“적어도 사흘에서 많게는 닷새까지 쉬셔야 지장이 없을 겁니다.”
“먹는 것 중에 가릴 건 없는가?”
“담백하게 먹는 것이 좋다고 소신이 당부하였나이다.”
“음.”
묵용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러가도 좋네.”
노 의정이 물러가고, 황제는 손에 서책을 말아 쥔 채 지붕 위의 들보를 올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며칠 동안 걸을 수 없다고? 그렇다면 그녀는 아마 봉명궁에서 답답해 죽으려고 할 것이다. 이번 일은 탑라에서 비롯되었으니 차라리 며칠 탑라를 빌려주는 게 좋을 듯했다.
여기까지 생각을 이어간 그는 사희에게 명했다.
“탑라를 황후에게 가져다주고 짐이 며칠 동안 빌려 주는 것이라고 전해라.”
사희는 얼른 탑라를 챙겨 나서려는데 다시 황제가 그를 불렀다.
“잠깐.”
“황상, 또 소인에게 명하실 것이 있습니까?”
황제가 말했다.
“지금은 황후가 쉬어야 하니, 내일 아침 일찍 보내거라.”
만약 지금 보내면, 그녀는 밤새 탑라를 가지고 놀지도 모른다. 그건 안 될 말이었다.
사희는 탑라를 다시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그럼, 소인이 내일 아침 일찍 마마께 보내 드리겠습니다. 황상, 또 다른 분부는 없으십니까? 마마께 전하실 말씀은요?”
황제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없다.”
그는 서책을 침상 머리맡에 내려놓았다.
“불을 꺼라. 짐은 자야겠다.”
사희가 다가와 탁자 위에 놓인 등을 끄자 방 안은 곧 어둠에 잠겼다.
황제는 눈을 감았지만, 좀처럼 잠들지 못했다. 오후부터 그는 좀 혼란스러웠다.
일부 단편적인 장면들이 머릿속에 아른거리기 시작했다.
서재에서 사봉봉은 태연하게 무덕궁의 향칠에 대해 설명했다. 사봉봉의 귓가에 있는 옅은 빛깔의 점, 그녀의 볼에 나 있던 솜털, 몸에 밴 말리꽃 향기, 온 정신을 집중할 때 그녀의 눈동자에 드러나는 광채. 그리고 그녀가 그에게 웃으며 마음에 든다고 말하는 모습…….
심장이 빨라진 그는 심호흡을 하며 가슴을 눌렀다. 큰일이다. 생각만 해도 견디기 힘들 정도로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그의 고질병이 더욱더 심각해진 건 아닐까?
그는 어둠 속에서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더는 생각하지 말라고 자신을 타일렀다. 그는 일찍 자야 했다. 내일 아침 조회도 해야 하지 않는가.
하지만, 자꾸만 떠올랐다. 그녀가 매화 숲에서 자신을 부르던 장면이……. 그녀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왔고, 그녀의 붉고 아름다운 입술은 난초처럼 숨을 토해냈다. 또 그녀의 손은 뼈가 없는 듯 부드럽게…….
화가 난 묵용린은 사람을 불러 물을 따르게 했다. 물을 반 잔이나 마셨더니 마음이 드디어 좀 가라앉았고 천천히 잠이 들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사봉봉은 꿈에서도 그를 찾아왔다. 그녀는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로 새하얀 침의를 입은 모습이었다. 허리까지 오는 새까만 머리카락이 수초처럼 보였다. 또한 한 손으로 잡힐 것 같은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 옥처럼 하얀 발가락도 눈에 들어왔다. 다만 그녀의 얼굴은 머리카락이 가리고 있어서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는 자태는 아름다웠다. 그녀가 지나가는 곳마다 순백의 말리꽃이 피어났다. 사방에 그윽한 말리꽃 향기가 그를 에워싸자 그는 도망치려 했지만, 그의 몸이 오히려 굳어진 듯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그녀가 다가오는 것을 가만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의 앞에 선 그녀는 아주 천천히 두 팔을 들어 올렸다. 그녀가 머리카락을 걷어 내자 드러난 얼굴은 창백했고, 어디에도 이목구비는 없었다. 마치 얼굴에 인피가 씌워진 것 같은 모습에 그는 식은땀을 흘렸다.
이번엔 그녀가 긴 손톱으로 인피를 벗기자 또 다른 얼굴이 나왔다. 이번엔 눈썹과 눈, 코, 입이 전부 있었지만, 온통 피범벅이었다…….
너무 놀란 그는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다. 손을 들어 이마를 만지니 손바닥 가득 땀이 묻어났다.
* * *
이튿날 아침, 사희가 일찌감치 사봉봉을 찾아왔다. 그는 탑라를 건네며 황제의 말을 전했다.
“마마, 황상께서 며칠 동안 갖고 계시라며 소인에게 이걸 전해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사봉봉이 멍한 얼굴로 물었다.
“황상께서 이유도 말씀해 주셨는가?”
사희가 고개를 저었다.
옆에 서 있던 금천아가 언짢다는 듯 말했다.
“어제 황상께서 마마를 밀치셨으니 그에 대한 보상이겠지요.”
사희가 웃으며 말했다.
“노 의정의 말로는 마마께서는 며칠 움직이지 말고 쉬셔야 한다고 하니, 혹여 마마께서 답답해하실까 싶어 무료함을 달래시라고 빌려주신 것 같습니다.”
사봉봉이 말했다.
“아, 황상께서 그리 세심히 신경 써 주시다니, 자네가 본궁 대신 황상께 감사 인사를 전해 드리게.”
어젯밤엔 태의를 보내 그녀의 다리를 진찰하게 하고, 오늘은 아침 일찍 사희 편에 탑라를 전해 주다니. 사봉봉은 황제가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그녀가 알던 묵용린과는 전혀 딴판이라 어색할 정도였다.
비록 고통스러운 대가를 치렀지만, 묵용린도 양심은 있어서 그녀에게 탑라를 보내 준 듯했다.
황제가 선의를 보였으니, 그녀 또한 적당히 화답해야 했다. 잠시 고민하던 그녀가 경화에게 분부했다.
“구련환을 가져오너라.”
경화는 알겠다고 답한 뒤, 방 안으로 들어가 구련환을 가져왔다.
사봉봉이 사희에게 말했다.
“이걸 황상께 가져다 드리게. 호의에 답례하지 않는 건 예가 아니니까. 본궁도 황상께 구련환을 며칠 빌려 드릴 테니 무료하실 때 해 보시라고 전하게.”
사희는 구련환을 받아 들고 활짝 웃었다.
“황상을 대신하여 소인이 감사드립니다. 마마께선 모르시겠지만, 사실 황상께선 마마의 구련환을 아주 오래전부터 궁금해하셨습니다. 내무부에 분부까지 내리셨지만, 똑같이 만들진 못하였지요.”
옆에 있던 궁녀들이 입을 가리며 웃었다.
사봉봉도 웃으며 대꾸했다.
“본궁도 황상의 탑라가 정말 궁금했네. 이제 황상과 본궁 모두 바라던 바를 이루었으니, 참으로 잘 되었군.”
사희는 구련환을 정중히 받아 들고, 미소를 띤 채 승덕전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허 귀비를 만난 그는 곧장 그녀의 옆으로 다가가 문안 인사를 올렸다.
며칠간 밖에 나오지 않은 허 귀비는 줄곧 궁금해하고 있었다. 황제는 이미 사봉봉과 묵용성의 일을 알고 있을 텐데, 왜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는 것이란 말인가? 친아우가 자신의 여인을 마음에 품고 있어도 상관없단 말인가? 도량이 넓어도 너무 넓었다.
“사희, 어디서 오는 길인가?”
“귀비 마마께 아룁니다. 소인은 봉명궁에서 나오는 길입니다.”
“듣자니 황후께서 발을 다치셨다던데?”
“예, 황후 마마께서 어젯밤 발목을 다치셨습니다.”
허 귀비는 들고 있던 손수건으로 입을 가렸다.
“세상에, 어찌 조심하시지 않고. 어디에서 다치신 거란 말인가?”
“그것이.”
사희가 웃으며 말했다.
“소인도 그 당시엔 곁에 있지 않았기에 잘 모르겠습니다.”
허 귀비가 그의 손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건 무엇인가?”
“황후 마마의 구련환입니다. 마마께서 황상께 며칠 빌려 드린다며 전해 달라고 하셨지요.”
허 귀비가 흠칫 놀라며 물었다.
“며칠 빌려 드린다?”
만약 다른 이였다면 황제가 좋아하는 걸 어떻게든 바치고 싶어 안달이었을 텐데, 황후는 고작 며칠 빌려 드린다니. 어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동월의 최고 갑부란 사람이 인색하기 짝이 없었다.
“황후 마마께선 며칠간 움직이지 말고 푹 쉬셔야 합니다. 해서 황상께서 탑라를 황후 마마께 빌려 드렸고, 그 답례로 황후 마마 역시 이 구련환을 황상께 며칠 빌려 드리기로 한 겁니다.”
허 귀비는 점점 더 의아해졌다. 황제와 황후가 지금 아이들처럼 소꿉놀이를 하는 것이란 말인가? 서로 장난감을 주고받다니…….
그녀가 더는 질문을 건네지 않자, 사희는 허리를 숙여 인사를 건네곤 승덕전으로 돌아갔다.
허 귀비는 길가에 서서 금령에게 물었다.
“황후가 다리를 다친 소식이 이미 궁 안에 다 퍼진 것이냐?”
금령이 답했다.
“예, 마마. 다들 알고 있습니다.”
“그래, 그럼 돌아가자꾸나.”
허 귀비가 몸을 돌려 팔을 들자, 금령은 곧장 앞으로 다가와 조심스럽게 그녀를 부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