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06화
사봉봉은 그를 바라보며 손을 탑라 위에 얹었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한 행동이었지만 황제의 눈엔 그녀의 간절함이 느껴졌다. 그건 그를 아주 흡족하게 만드는 광경이었다.
“마음에 드시오?”
그의 얼굴에 웃음기가 감돌았다. 사봉봉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마음에 듭니다.”
그녀가 이런 대답을 했을 땐 사실 작은 기대가 있어서였다. 혹, 황제가 이걸 그녀에게 선물해 주진 않을까 하는 작은 기대. 그러나 묵용린은 느릿느릿하게 말했다.
“마음에 들어도 소용없소. 그건 짐의 것이오.”
그는 잔뜩 거드름을 피우며 득의양양한 기색을 조금도 숨기지 않았다.
사봉봉은 그제야 그의 의도를 명확하게 깨달았다. 황제는 지금 복수하는 중이었다. 지난번에 그녀가 구련환을 그에게 빌려주지 않았던 것처럼, 이번에 그는 탑라를 절대 빌려주지 않을 것이다.
그때 그녀가 구련환을 빌려주지 않았던 이유는 그가 아무 말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황제의 존엄을 지키겠다며, 똑같은 것을 만들어 오라고 내무부에 명할지언정 절대 그녀에게 빌려 달란 말은 하지 않았다. 물어보지도 않았으면서 왜 그녀를 탓하는 것인가?
그래, 그냥 앉아서 기다리게 하는 것부터가 올가미였다. 그녀는 그 올가미에 단단히 걸려들었다. 한창 신나게 놀고 있는데 갑자기 돌아가라고 하다니! 이렇게 찝찝한 마음을 안기고 내보내다니… 정말 너무했다. 묵용린은 너무 음험했다. 과연 그는 권모술수에 능한 소인배였다!
묵용린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사봉봉의 표정을 살펴봤다. 그녀가 화가 나서 씩씩거리는 모습은 정말 통쾌했다. 황제의 위엄만 아니었다면, 그는 책상을 내리치며 박장대소를 터뜨렸을 것이다.
사봉봉은 정말 화가 났다. 그녀의 마음이 불퉁한 걸 황제도 이미 알고 있었기에 그녀는 아무렇게나 인사를 하고 처소로 향했다.
사봉봉이 감정을 대놓고 드러내는 걸 본 건 처음이었다. 그는 그런 그녀의 모습이 신기했다. 모든 일에 평상심을 유지하던 여인이 어린아이처럼 투정을 부릴 줄도 알다니. 그는 왠지 모를 흥분과 성취감에 기분이 아주 좋아졌다.
기분이 좋으니 저녁밥을 많이 먹었고, 배가 좀 불러서 소화를 돕기 위해 궁전을 거닐었다.
날이 어둑어둑해지자 상쾌한 미풍이 그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천천히 길을 걷던 묵용린은 어느 호숫가에 이르렀다.
버드나무 가지가 황혼 속에서 가볍게 흔들렸다. 아직 저물지 않은 석양이 물결을 따라 담홍빛으로 은은하게 퍼져 나갔다. 황혼 속에서 바라보니 저 멀리 숲과 궁전에 몽롱한 아름다움이 배어 있었다.
묵용린은 뒷짐을 지고 호숫가에 서서 생각했다. 오늘은 정말 괜찮은 날이라고…….
풍경을 감상하던 중, 뒤에서 인기척이 나서 보니 매화 숲을 통과하는 오솔길에서 사람들이 나왔다. 용모를 자세히 볼 수는 없었지만, 무리 중에는 반듯한 아가씨가 두 명 있었다. 그녀들은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며 걸어왔다.
그는 순간 그녀들이 누구인지 기억나지 않아서 잠시 어리둥절했다.
두 아가씨는 다가와 예를 취했고, 기분이 좋은 묵용린은 다정하게 말했다.
“일어나시오.”
두 아가씨가 고개를 들었다. 가만 보니 한 사람은 악기를 잘 연주하는 양 귀인이었다. 다른 한 아가씨는 사과처럼 동그란 얼굴에 눈망울이 커서 웃는 모습이 복스러웠지만 막상 한 번도 본 적 없는 여인이었다. 그래도 누군지 짐작할 수는 있었다. 세 명의 귀인 중 나머지 한 사람은 아직 본 적이 없으니 말이다.
“어디로 가는 중이오?”
“황상께 아룁니다.”
양 귀인이 대답했다.
“식사를 하고 나서 산책을 나왔다가 막 돌아가려던 참이었습니다.”
“어디로 산책을 다녀왔소?”
장 귀인은 언덕 위의 매화 숲을 가리키며 말했다.
“황상께 아룁니다. 저기, 매화 숲 안에 돌 탁자와 의자가 있으니 앉아서 쉬기에 좋습니다.”
묵용린이 대꾸했다.
“매화는 아직 철이 아니지만 나무가 무성하게 자라 숲이 우거졌군. 짐도 오랜만에 가서 돌아봐야겠소.”
양 귀인과 장 귀인은 시선을 마주쳤다. 황제가 오늘따라 굉장히 다정다감하니 모처럼의 좋은 기회였다. 그녀들은 신첩이 황상을 모시고 돌아보고 싶다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막상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망설이는 사이에 묵용린은 이미 발걸음을 돌려 언덕 위로 올라가 버렸다.
양 귀인은 한숨을 쉬었다.
“아우님, 우리가 총애를 받지 못하는 건 당연해요. 이렇게 좋은 기회를 놓치다니.”
장 귀인은 헤헤거리며 웃었다.
“총애를 받지 못하면 어때요? 우리는 지금 자유롭게 지내고 있잖아요.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으니 얼마나 좋아요?”
양 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우님의 말도 일리가 있어요. 갑시다. 아우님에게 한 곡조 들려줄게요.”
묵용린이 매화 숲에 들어섰을 때, 날이 막 어두워졌다. 담력이 좋은 그는 어둠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희미한 빛에 의지해 천천히 거닐었다.
그때, 어디서 나타났는지 누군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묵용린이 깜짝 놀란 것도 잠시. 익숙한 향기에 그의 심장 박동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오후에 맡았던 바로 그 은은한 말리꽃 향기였다. 순간 영십칠이 자신과 좀 멀리 있다는 게 떠올랐지만, 사봉봉은 이미 자신과 한 자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고 그의 심장 박동은 통제가 불가능할 정도로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가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사봉봉이 한 걸음 더 가까이 그에게 다가왔다.
묵용린은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을 쳤고, 사봉봉은 아무 말 없이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뭐… 뭐 하는 것이오?”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봉봉은 악의는 없다는 듯이 웃었다.
“신첩은 황상의 탑라를 빌려서 놀고 싶을 따름입니다.”
“꿈도 꾸지 마시오.”
“황상?”
그녀는 가벼운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고요한 숲속에서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니 왠지 모골이 송연했다.
지금 사봉봉은 마치 한 마리의 요괴 같았다. 한밤에 나와서 남자의 혼백을 빨아 먹는 요괴!
그녀의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 놀라울 정도로 반짝였다. 게다가 입술은 선혈이 뚝뚝 떨어질 것처럼 새빨갛게 보였다. 거기에 그녀의 목소리는 가벼우면서도 약간 쉰 것 같아, 평소의 다정하고 온화한 느낌이 나지 않았다.
그 모든 게 다 허상이었단 말인가? 그는 속으로 그녀는 분명 요괴라고 생각했다.
사봉봉이 점점 다가오자 그는 뒤로 물러나다 돌연 덩굴에 발이 걸려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사봉봉은 속으로 큰일 났다고 생각했다. 황제를 땅바닥에 주저앉게 만들다니! 따지고 보면 죄명이 가볍지 않았다.
그녀가 급히 다가가서 그를 일으켜 세우려고 했다.
“황상, 어서 일어나십시오.”
그녀의 손이 그의 몸에 닿았다. 손은 따뜻하고 부드러워서 마치 뼈가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묵용린은 놀라서 소리쳤다.
“짐을 건드리지 마라!”
그의 두려움은 이미 극에 달해 있었다.
그가 힘껏 사봉봉을 밀치자 사봉봉은 비명 소리만 남기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자 그는 평정심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녀가 멀어지자 묵용린은 순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또 다른 그림자가 숲속으로 들어왔다.
“황상.”
묵용린은 땅을 짚고 일어났다. 영십칠이 왔으니 그는 더욱더 안전해졌다. 그는 그곳에 서서 사방을 둘러봤다. 자신이 방금 사봉봉을 어디로 밀쳤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원래 그냥 자리를 떠나려고 했다. 사봉봉이 죽든 살든 상관하기 싫었다. 그러게 누가 감히 황제를 겁준단 말인가!
잠시 망설이던 그는 그래도 자리를 떠나지 않고 영십칠에게 명했다.
“황후를 찾아라.”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왼쪽 어디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희미한 어둠 속에 인영이 보이는 듯했다.
“찾을 필요 없습니다. 저는 여기 있습니다.”
영십칠은 그녀의 움직임이 불편한 걸 보고 다가가서 물었다.
“마마, 어디를 다치셨습니까?”
사봉봉이 말했다.
“별것 아니네. 본궁의 시녀를 좀 불러 주게. 숲 바깥에 있을 것이네.”
영십칠은 목청을 높여서 고함을 질렀다.
“이리 오너라! 황후 마마께서 다치셨다!”
꽤 멀리 떨어져 있던 금천아는 영십칠이 두 번 고함을 내지르자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곧장 매화 숲으로 달려온 그녀는 하마터면 황제를 밀칠 뻔했다. 다행히 묵용린이 기민하게 나무 옆으로 비켜섰다.
금천아는 황후가 다쳤다는 소리에, 눈에 뵈는 것이 없었다. 그녀는 달려오면서 내내 고함을 질렀다.
“마마, 마마! 어디에 계세요?”
영십칠은 어둠 속에서 손짓하며 말했다.
“황후 마마께서는 여기에 계신다.”
금천아는 마침내 황후를 찾았다. 부축해 일으키는데 황후는 작게 신음했다.
“마마, 왜 이렇게 되셨어요? 누가 마마를 다치게 했어요? 어느 놈 눈이 삐었기에…….”
사봉봉은 얼른 그녀의 입을 막았다.
“발이 좀 아프구나. 네가 날 좀 업고 가거라.”
사봉봉이 말했다.
그러나 금천아가 뭐 하러 업겠는가? 그녀는 깍지 낀 두 손으로, 마치 짐을 안 듯 황후를 가볍게 들어 올리곤 성큼성큼 숲을 빠져나갔다.
밖에 나오자 금천아가 물었다.
“마마, 방금 제 입을 왜 막으셨어요?”
사봉봉이 대답했다.
“내가 네 입을 안 막았으면 면사 금패가 날아갔을 거야. 황상이 바로 옆에 있었어.”
금천아는 잠시 침묵했다가 다시 화를 버럭 냈다.
“황상이 또 마마를 이렇게 만든 거예요? 그러게 제가 가지 말라고 했잖아요. 칠흑같이 어두운데 누가 누구에게 겁을 준다는 거예요? 한사코 소인의 말을 안 들으시더니… 보세요! 다치셨잖아요!”
사봉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리 뒤끝이 없다고 한들 그녀는 겨우 열일곱 살 아가씨에 불과했다. 오후에 황제에게 당했다는 이유로 투지가 불타올라 조금 거리낌 없이 행동한 것이다. 어차피 황제는 그녀를 두려워하니, 무슨 일이 있겠는가?
하지만 그녀는 결국 황제에게 떠밀려 발목을 접질렸다. 괜히 남 좋은 일만 한 셈이었다.
금천아는 사봉봉을 안고 봉명궁으로 돌아갔다.
아랫사람들은 다친 그녀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그리곤 모두 재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금천아는 바닥에 쪼그리고 앉은 채 등불 아래에서 황후의 발목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다행히도 심하게 접질린 건 아니었다. 다만 빨갛게 부어오른 것 같아 약술을 손에 부은 뒤 살살 문질러 주었다.
사봉봉은 나약하지는 않았지만, 금천아의 힘에 참지 못하고 칭얼거렸다.
“천아, 넌 그만하고 경화에게 하라고 해.”
경화와 경옥은 황후 마마가 눈물까지 흘리는 모습에 금천아에게 애원했다.
“천아 언니, 우리가 할게요. 마마께서 아파서 죽겠어요.”
그녀도 어쩔 수 없었다. 울혈은 잘 문질러서 풀지 않으면 안에서 화농이나 종기가 되기에 지금 잘 풀어 주는 게 중요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사봉봉이 계속 아프다고 소리치자 그녀는 살살 문지르기 시작했다. 다만 그녀의 안색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