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05화
사봉봉은 살짝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황상께서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감읍할 따름입니다. 그러면 신첩, 새로운 예법에 따라 일을 진행시키겠습니다.”
“그건 당연한 일이오.”
묵용린은 말을 이었다.
“짐이 새로운 예법을 따라야 하는 이상, 누구도 예외일 수는 없소.”
“황상께서 솔선수범하시면 모두가 따를 것입니다.”
묵용린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짐이 듣기에, 최근 무덕궁 보수에 보통 사용하는 청칠이 아니라 향칠을 한다고 하던데? 내무부 쪽에 알아보니 황후가 특별히 허락했다더군. 그런 일이 있었소?”
사봉봉은 여기까지 듣고 나서야 그가 무슨 일로 자신을 불렀는지 알아차렸다. 정사를 논하려는 게 아니라 트집을 잡으려 부른 것이었다.
“황상께 아룁니다. 사실입니다.”
사봉봉은 사실대로 대답했다.
“무덕궁 수리에 원래 사용하려는 건 청칠이었습니다. 신첩은 성 전하께서 지금까지 줄곧 향칠을 했다는 걸 몰랐습니다. 나중에 성 전하께서 직접 찾아오셔서 원래 하던 대로 향칠을 하길 희망하셨습니다. 성 전하께서 평소 고아한 운치를 즐기신다는 걸 알기에 성 전하의 요구를 수용한 것입니다.”
묵용린은 냉소적으로 웃었다.
“황후는 지금 제 얼굴에 침을 뱉는 것이오? 아까는 절약을 내세웠으면서 이번엔 낭비를 허용하다니. 황후의 새로운 예법은 사람에 따라 다르게 적용되는 모양이오?”
“그렇지 않습니다. 무덕궁에서 쓰는 향칠에 대한 추가 비용은 따로 낸 것입니다.”
“그 추가 비용은 누가 낸 거요? 성아?”
“신첩이 냈습니다.”
묵용린은 또 냉소적으로 웃었다.
“이제 보니… 황후와 성아의 친분이 아주 두터운 모양이군.”
“신첩과 성 전하 그리고 공주 전하는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동무이니 정이 두터운 건 사실입니다. 신첩은 성 전하를 아우로 여깁니다. 성 전하가 좋아하는 거라면 신첩은 기꺼이 주머니를 털 수 있습니다. 마치 친동생인 금언에게 그러하듯 말입니다.”
팔짱을 끼고 의자에 기대 있던 묵용린은 그녀를 위아래로 훑으며 물었다.
“짐은 당연히 황후를 믿어야겠지?”
“황상, 그건 신첩에게 묻지 마시고 황상의 속마음에 물어보셔야 합니다.”
“짐은 지금 황후에게 묻고 있소.”
사봉봉은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신첩은 부부 사이에 믿음이 가장 귀하다고 생각합니다.”
묵용린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다가 앞에 있는 의자를 가리켰다.
“앉으시오.”
사봉봉은 심장이 두근거렸다. 앉으라니… 무슨 긴 이야기를 할 셈이지? 그녀는 순순히 의자에 앉아서 묵용린의 말을 들었다.
“짐이 어젯밤에 사 주인장을 만났소.”
그가 어머니에 관한 얘기를 꺼내자 사봉봉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가 가장 불안한 건 사앵앵이었다. 그녀가 입궁한 일로 사앵앵은 묵용 부자를 미워하고 있었다. 설마 보자마자 그에게 화를 내진 않았겠지.
그녀는 떠보듯 물었다.
“신첩의 어머니는 잘 계십니까?”
“아주 잘 계시오.”
묵용린은 기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감히 짐을 만나고도 예를 보이지 않았소. 사 주인장의 위세가 이 동월의 황제보다 대단하더군.”
사봉봉은 급히 바닥에 무릎을 꿇고 어머니를 대신해 용서를 구했다.
“황상, 노여움을 푸시옵소서. 신첩의 어머니께서는 성격이 좋지 않아서 그러셨을 뿐… 황상께 불경한 마음은 아니셨을 겁니다. 단지…….”
“단지 당신을 황후로 삼은 짐을 원망하고 있을 뿐이겠지.”
사봉봉은 깜짝 놀라서 고개를 깊이 숙였다.
“신첩, 어머니를 대신하여 죄를 받겠나이다.”
“무엇으로 죄를 대신 받겠다는 것이오?”
묵용린이 말을 이었다.
“면사 금패 하나는 사 주인장의 손에, 다른 하나는 금천아라는 궁녀 손에 있지 않소? 지금 짐이 황후를 죽이려고 하면 어쩔 작정이오?”
고개를 번쩍 든 사봉봉의 눈에는 황망함이 가득했다. 황제가 이런 말을 할 줄이야. 설마 그녀를 진짜 죽일 생각일까?
비록 그녀가 황제의 약점을 쥐고는 있었지만, 사실 그걸로 황제를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그가 지극히 높은 신분으로 그녀의 생살여탈권을 쥐고 있는 게 현실이었다. 그녀를 죽이는 건 말만 하면 언제든지 가능했다.
황제는 경악한 사봉봉의 표정이 매우 만족스러웠다. 평소 그녀는 가면을 쓴 듯 차분하고 침착하여 열일곱 살 아가씨답지 않았다. 이제야 짐의 무서움을 제대로 알았겠지?
사봉봉은 묵용린이 도대체 뭘 원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할 말도 다 했고, 트집도 잡았다. 그러고 나서도 그녀를 돌려보내지 않았다. 그저 차를 내 주고 가만히 마주 볼 뿐이었다.
그녀가 몇 번이고 물러나겠다는 말을 하려고 고개를 들었지만, 매번 묵용린은 손을 내저으며 그녀가 말하는 것을 막았다.
그녀는 인내심을 발휘해 가만히 앉아서 기다렸다. 도대체 황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들어 봐야겠다.
두 사람이 이렇게 무미건조하게 앉아 있으니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황제가 괜찮은 것 같으니 그녀도 상관없었다. 그간 사앵앵을 따라다니며 장사를 공부하느라 다른 건 몰라도 아무 말도 안 하고 가만히 있는 건 누구보다 잘할 수 있었다.
해가 서쪽으로 조금씩 기울자 방 안으로 들어오는 햇볕도 점점 저물어 갔다.
마침 가난청이 안으로 들어오자 사봉봉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기회를 틈타 자리에서 물러나려는데, 문득 가난청의 손에 있는 물건이 시선을 끌었다.
가난청은 황제와 황후에게 예를 취했다. 그리곤 들고 있던 물건을 탁자 위에 올려놓은 뒤 황제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소신이 한참을 궁리했지만… 결국 방법을 찾지 못했습니다.”
묵용린이 말했다.
“너도 못 푼다면 이 궁에 그걸 풀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가난청이 사봉봉을 힐끔 쳐다보며 웃었다.
“황후 마마께서 한번 해 보시면 어떻겠습니까?”
가난청이 들어왔을 때부터 사봉봉은 계속 그 물건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것은 화용도華容道(중국 고대 놀이 중 하나로, 나무토막들을 움직여 포위되어 있는 조조를 탈출시키는 것. 현대 슬라이딩 퍼즐과 비슷함)와 약간 유사했다. 화용도가 일반적으로 평평한 나무 판 하나인 것에 반해 이건 화용도가 세 겹으로 겹쳐져 얼핏 보기에도 매우 복잡했다.
그녀는 보통 여인들이 하는 바느질이나 자수에는 흥미가 없었고, 묵용청양이나 가소타처럼 무예를 연마하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녀가 좋아하는 건 머리를 쓰는 장난감이었다. 사가 상호는 각지를 돌아다니며 각종 신기한 장난감들을 가져왔는데, 팔기 위함이 아니라 큰아가씨인 사봉봉에게 선물하기 위함이었다.
가난청의 말을 듣고 사봉봉은 어떻게 이것을 풀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녀도 각양각색의 화용도를 가지고 있었지만, 이런 건 한 번도 본 적 없었다. 나무 판에는 기괴한 도안이 그려져 있었고, 위아래 세 겹은 또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가로와 세로가 동시에 진행되기 때문에 풀기 매우 어려워 보였다.
그녀가 황제에게 물었다.
“황상, 이 화용도를 어디에서 사셨습니까?”
“이건 화용도라고 부르지 않지만, 원리는 화용도와 비슷하오.”
묵용린이 말했다.
“이건 길올국吉兀國 사자가 짐에게 선물한 것으로, 탑라塔羅라고 하오.”
이제 보니 이방의 물건이었다. 어쩐지… 이런 건 난생처음 봤다.
황제와 황후가 대화를 하는 틈을 타 가난청은 조용히 물러났다. 이런 상황에서는 자신이 피해 주는 게 더 좋을 거라 생각했다.
묵용린은 탑라를 멍하니 보고 있는 사봉봉에게 다가갔다. 그는 그 물건을 펼쳐 놓고는 이리저리 만져서 원래 모양으로 되돌려 놓았다.
“처음부터 한번 해 보시오. 황후는 아마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오.”
사봉봉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신첩이 한번 해 보겠습니다.”
그녀는 탁자에 앉아서 작은 나무토막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묵용린도 이 장난감을 여러 번 만져 봤다. 비록 성공하진 못했지만 처음엔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사봉봉이 손을 옮기자 그는 곧바로 그게 정답이 아니란 걸 알 수 있었다.
“그게 아니오. 이것부터 옮기고… 그렇지. 여기로 옮기고, 세로로 붙이고… 이렇게 돌려서 붙이고. 아이고, 그게 아니오.”
영십칠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묵용린은 그에게 황후가 접근하지 못하도록 자기를 따라다녀야 한다고 지시했다.
하지만 지금은 황제가 먼저 황후에게 다가갔다. 게다가 황후를 지도하기 위해 그녀의 곁에 앉아서 몸을 가까이 기대기까지 했다. 머리도 가까웠기에 그들은 생각보다 더 붙어 있었다.
영십칠은 황제가 무심코 그녀와 가까워진 걸 눈치챘을 때 다시 경악할 만한 상황이 벌어질까 봐 걱정되기 시작했다.
사봉봉은 묵용린의 잔소리 때문에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그녀는 결국 퉁명스럽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만 하시어요. 신첩이 풀고 있지, 황상께서 푸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묵용린은 눈을 부릅떴다.
이 여자가 장난감을 가지고 놀더니 예법도 다 잊었나?
그녀를 꾸짖으려는 순간, 그는 호흡을 멈췄다. 옅은 말리꽃 향이 코끝을 맴돌자 그는 자신이 그녀와 너무 가까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도 그녀의 귀 언저리에 있는 작은 점이 보일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그 점은 아주 옅은 갈색이었는데, 마치 실수로 튄 물방울처럼 생겼다.
대혼식을 위해 실로 가느다란 솜털을 다 뽑았을 텐데. 그런데 이제 보니, 그녀의 뺨에는 아직도 보송보송한 솜털이 남아 있었다. 그건 마치 겨울에 내린 첫눈 같아서 그는 문득 찔러 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서서히 심장 박동이 빨라지기 시작하자 그는 자신의 고질병이 곧 도질 걸 알았다. 하지만 아직은 그가 통제할 수 있는 범위였다. 그는 조용히 거리를 벌렸으나 심장 박동은 전혀 느려지지 않았다.
그는 할 수 없이 창가 아래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사봉봉은 여전히 탑라에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어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
그사이에 황제의 머릿속에서는 기괴한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오만방자한 그녀를 꾸짖고 싶었지만, 집중하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니… 뭐라고 말할 수 없는 느낌이었다. 분명한 건 그 느낌이 싫지 않았다는 거다.
사봉봉은 탑라를 응시했고 황제는 사봉봉을 응시했으며 영십칠은 그런 황제를 응시했다.
세 사람은 그렇게 오랫동안 한곳을 빤히 바라봤다.
마침내 사봉봉이 첫 번째 관문을 풀었고, 맨 아래에 있는 나무토막들이 질서정연하게 배열되었다. 그녀는 기쁨의 함성을 지르며 탑라를 들고 황제에게 보여 줬다.
“한 단계는 다 풀렸습니다.”
평소 그녀의 미소는 그야말로 산도 물도 안 보이는 밋밋한 미소였다. 이렇게 밝게 웃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묵용린은 자신이 여전히 그녀에게 너무 가까이 있다고 느꼈다. 그렇지 않다면 왜 심장 박동이 또 빨라지겠는가?
그는 목청을 가다듬고 아무 표정도 없이 물었다.
“재미있소?”
“재미있습니다.”
사봉봉은 탑라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두 번째 관문에 도전하려 했다. 그런데 황제가 담담하게 말했다.
“시각이 늦었소. 황후는 그만 돌아가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