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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1104)화 (1,104/1,192)

제1104화

묵용린은 가난청의 말을 듣고 안색이 풀렸다. 솔직히 그도 사앵앵에게 예를 취하고 싶지 않았다. 사앵앵은 사봉봉보다 훨씬 더 오만방자했다. 다시 말해, 어머니는 딸만큼 총명하지 못했다.

사봉봉은 그의 앞에서 진퇴를 조절할 줄 알았다. 하지만 사앵앵은 달랐다. 예전에도 화가 나면 태상황에게 감히 욕을 해 댔다. 사 장군이 계속 감싸지 않았다면 벌써 사달이 벌어지고도 남았을 것이다. 이렇게 멍청하고 성질이 불같은 여자가 무슨 계략을 쓰겠는가? 그는 모처럼 나와서 기분이 좋으니 괜히 불쾌한 일을 만들지 않기로 했다.

녹하는 묵용린의 안색이 풀리자 급히 분위기를 만들었다. 사앵앵을 황제와 가장 먼 곳으로 끌고 가 앉혔고, 기홍도 데려가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게 했다.

묵용청양은 몰래 사앵앵에게 엄지를 추켜세우며 웃었고, 사금언에게 웃으며 말했다.

“하늘 아래 황형에게 싸움을 걸 수 있는 건 아마 사 주인장밖에 없을 거야. 정말 대단해!”

사금언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전하, 그렇게 비웃지 마십시오. 저는 심장이 떨려 죽을 지경입니다. 아버지께서 떠나실 때 제게 어머니를 잘 돌보라고 당부하셨는데, 방금 황상께서 진노하셔서 어머니의 목을 치려고 하셨으면 제가 어찌 아버지 얼굴을 뵐 수 있었을까요?”

“그럴 리가 없지.”

묵용청양이 말했다.

“사 주인장은 결국 황형의 장모이고, 봉봉의 체면을 봐서라도 황형은 사 주인장과 똑같이 굴지는 않을 거야.”

사봉봉을 떠올린 사금언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어머니의 성격은 누님이 제일 잘 알아요. 며칠 전에 면사 금패를 보내왔어요. 그 금패를 보니 저도 마음이 좀 편해졌어요.”

묵용청양이 눈빛을 반짝였다.

“그런 물건이 있었어? 왜 난 모르고 있었지?”

“예전부터 존재하던 것이었습니다. 다만 전하께는 쓸모가 없으니 모르셨겠지요.”

“난 필요 없지만, 가지고 있으면 멋있잖아.”

묵용청양은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궁으로 돌아가면 황형에게 나도 하나 달라고 해야지.”

술을 마시던 영안은 묵용청양과 사금언이 쑥덕대는 걸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수다는 끝도 없이 이어지는 것 같았다. 목소리를 죽이고 속삭이더니, 같이 웃기도 하고 또 표정을 찡그리기도 했다. 도대체 무슨 할 말이 그렇게나 많은지 모를 일이었다.

황제 옆에는 그의 아버지와 가 대인이 함께 있었다. 세 부인은 다른 한쪽에 앉아서 한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묵용청양은 사금언과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제 보니 그만이 외롭게 앉아 있어 인간관계가 별로 좋지 않은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술로 목을 축이며 속으로 투덜거렸다.

‘묵용청양 말고는 아무도 나와 이야기하려 하지 않는구나. 내가 이렇게 대접을 못 받는 사람이었나?’

시간이 흐르자, 사람들의 수다는 점점 더 즐거워졌고 혼자 앉아 있는 사람만 더 고독해졌다. 영안이 막 절망에 빠지려고 할 때, 가소타라는 선녀가 그를 구하러 왔다.

“영안 오라버니, 저랑 술 마셔요!”

영안은 처음으로 가소타의 동글동글한 얼굴이 너무 귀엽게 느껴졌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살짝 꼬집었다.

“아가씨, 술 좀 작작 드세요.”

“청양 언니도 마시잖아요.”

마침 묵용청양은 사금언과 술잔을 부딪치고 있었다. 그녀는 가소타가 손가락질하는 걸 보고 술을 재빨리 삼키며 물었다.

“왜 나를 가리켜? 무슨 일이야?”

가소타는 묵용청양을 가리키고 있던 손가락으로 영안을 짚었다.

“안 오라버니와 같이 마셔요.”

그녀는 영안을 끌고 묵용청양 쪽으로 다가갔다. 어색하게 끌려간 영안은 그들 옆에 앉았다. 사금언은 술잔을 들고 와 그에게 반가움을 표했다.

묵용청양은 가소타를 보며 감개무량해 입을 열었다.

“우리가 어린 시절에 소타를 딸로 삼고 놀았던 거 기억나니?”

영안은 이곳으로 옮겨 앉은 게 조금 후회되었다. 그녀는 왜 자꾸만 그런 떠올리고 싶지도 않은 과거를 언급하는 걸까? 하지만 묵용청양은 이미 푹 빠져 있는 것 같았다.

“그때 소타는 아직 아기였어. 나는 엄마고, 영안은 아빠였지. 소타에게 기저귀도 갈아 주고 그랬는데… 기억 안 나?”

당사자인 가소타도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안 오라버니가 제 기저귀도 갈아 줬어요?”

영안은 정말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다른 아가씨였다면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듣고 부끄러워 얼굴을 붉혔을 텐데… 어째서 가씨 아가씨는 그걸 영광스러워하는 것일까? 역시 공주를 따라다니며 자란 탓인 것 같다.

묵용청양은 계속 한탄을 쏟아냈다.

“벌써 세월이 흘러서 어느덧 딸이 시집갈 때가 되었구나.”

그녀는 목소리를 높여서 묵용린에게 물었다.

“황형, 소타를 성아에게 시집보내면 어때요?”

그녀의 목소리가 너무 컸던 나머지 모두가 시선을 돌렸다.

기홍과 영안은 이미 집에서 들었기 때문에 가까스로 침착함을 잃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가동 부부의 표정이 가장 압권이었는데, 도무지 어떤 표정이라고 형용할 수 없었다.

자신의 혼사가 얼렁뚱땅 정해질 것 같자 기분이 상한 가소타가 묵용린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황제 오라버니, 전 성아 오라버니한테 시집가기 싫어요!”

묵용린이 그녀를 달래며 물었다.

“왜? 왜 성아 오라버니는 싫어?”

가소타는 한참 생각하다가 한 마디 내뱉었다.

“성아 오라버니는 너무 깔끔해요.”

다들 결국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가동은 황제에게 죄를 고했다.

“황상, 마음에 두지 마십시오. 소타가 아직 어려서 언행에 거리낌이 없습니다.”

묵용린은 그를 흘기며 대꾸했다.

“짐이 보기에는 어린 소타가 가 대인보다 철이 든 것 같네.”

묵용청양은 아직도 가소타를 설득하는 데 열을 올렸다.

“성아에게 시집가는 게 뭐가 싫어? 그 녀석이 감히 너를 괴롭히면 내가 때려 줄게. 네가 다른 집에 시집가면 내가 매일매일 놀러 갈 수 없단 말이야.”

가소타가 말했다.

“성 오라버니 정도는 제가 때릴 수 있어요. 청양 언니를 귀찮게 하지 않을 거예요.”

묵용청양은 갑자기 사금언을 가리키며 물었다.

“금언 오라버니는 어때?”

가소타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사금언은 바늘에 찔린 것처럼 펄쩍 뛰며 말했다.

“전하, 이런 일을 가지고 장난치지 마십시오. 소문이 나면 소타의 평판에 좋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사앵앵이 덧붙였다.

“아이고, 그거 좋은 생각입니다. 전 소타가 좋습니다. 만약 소타가 저희 집으로 시집온다면 귀한 딸처럼 대할 겁니다.”

사금언은 할 말을 잃었다. 설마 오늘 그와 가소타의 혼사를 의논하려는 것이란 말인가?

* * *

묵용청양은 궁으로 돌아가자마자 묵용린에게 면사 금패를 달라고 했다.

묵용린은 어리둥절했다.

“이제까지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왜 그게 가지고 싶으냐?”

“봉봉에게는 줬잖아요. 저도 하나만 주면 안 돼요?”

“짐이 사봉봉에게 준 것을 어떻게 알았느냐?”

“사금언에게 들었어요. 봉봉이 그 면사 금패를 사 주인장에게 줬대요. 그게 아니라면 사 주인장이 황형에게 그렇게 하지는 못했을 거예요. 믿는 구석이 있으니까 그렇게 했겠죠.”

묵용린은 그제야 모든 것이 이해되었다. 이제 보니, 면사 금패 하나는 금천아에게, 다른 하나는 사앵앵에게 간 것이었다. 그는 사봉봉의 사심 없는 도량에 박수를 보내야 할지 아니면 감히 황제가 하사한 것을 남에게 건넨 사실에 따귀를 때려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가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묵용청양은 더는 참을 수 없었다.

“황형, 줄 거예요? 말 거예요? 말 좀 해 보세요.”

묵용린은 그녀를 흘겨봤다.

“짐이 너를 죽이려 하지 않을 것인데… 그런 걸 받아서 무엇에 쓰려고 하는 것이냐?”

“봉봉을 죽이려고 하지도 않을…….”

묵용청양은 말하다 갑자기 입을 막았다.

“황형, 설마 정말로…….”

묵용린은 차마 자신이 사봉봉에게 협박을 받아 면사 금패를 준 거였다고는 말할 수 없었기에 그녀의 오해를 이용했다.

“너도 짐이 사봉봉을 싫어하는 걸 알지 않느냐? 만일 그녀가 짐을 진노하게 만들면 죽음에까지 이르게 할 수 있으니 면사 금패를 준 것이다.”

묵용청양은 너무 놀라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황형,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십니까? 봉봉이 얼마나 좋은 사람인데요. 황형은 너무…….”

묵용린은 차갑게 말했다.

“너무 뭐? 짐이 한 개 가지고는 그녀의 목숨을 보존하지 못할 것 같아서 특별히 면사 금패를 하나 더 하사했지.”

경악한 묵용청양이 한참 말을 잇지 못하다가 투덜거렸다.

“황형이 그 정도로 봉봉을 싫어하는 줄 몰랐어요. 이 사실을 미리 알았더라면 차라리 봉봉을 성아에게 시집보낼 걸 그랬어요. 그랬으면 둘 중에 적어도 하나는 기뻐했을 텐데요.”

묵용린은 그녀의 말에 버럭 화를 냈다.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해 봐야 아무 소용없다!”

그렇게 말한 뒤 그는 덧붙였다.

“늦은 시각이다. 여기서 짐을 방해하지 말고 얼른 네 처소로 돌아가거라.”

묵용청양은 포기하지 않고 손을 내밀었다.

“황형, 면사 금패는요?”

묵용린은 결국 고함을 질렀다.

“썩 나가지 못할까!”

묵용청양은 얼른 자리를 떴다.

* * *

이튿날 오후, 사희는 봉명궁을 찾아와 황후를 승덕전으로 청했다.

황제가 초청할 때마다 금천아는 심장이 쿵쾅거렸지만, 사봉봉은 매우 평온해 보였다. 그녀는 거울을 보고 머리와 옷을 매만진 후, 사희를 따라갔다.

남서방에 이르자 사희는 홀로 들어가라는 듯 사봉봉에게 문을 열어 주었다.

해가 이미 서쪽으로 기울어서 노을빛이 창문으로 비스듬히 들어오고 있었다.

사봉봉은 안으로 들어가 예를 취했다.

“신첩, 황상께 문안 여쭈옵니다.”

창가에 앉은 황제는 상주서를 살피며 햇빛을 쬐고 있었다. 그는 낮잠을 자고 일어난 후라, 관을 쓰지 않은 채로 머리카락은 대충 등 뒤로 늘어뜨린 상태였다. 짙은 자줏빛 평상복을 입은 그는 평소보다 한결 부드러워 보였다.

황제의 뒤에는 언제나처럼 영십칠이 서 있었는데, 여전히 냉혈한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방 한쪽 구석에 있는 외발 두루미 동로銅爐에서는 용연향을 태우고 있었다. 창문을 열어 놔서 그런지 향은 진하지 않았고 달콤한 향기만 코끝에 닿았다.

묵용린은 평소처럼 그녀를 가만히 세워 두지 않고 손을 흔들며 말했다.

“어서 일어나시오.”

그는 손에 쥔 상주서를 갈무리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국고를 아끼는 방법에 관한 황후의 주청을 짐이 읽어 보았소. 비록 그동안의 관례와 상충하는 부분이 많았지만, 짐이 곰곰이 생각해 보니 지금의 궁엔 예전처럼 그리 사람이 많지 않기도 하고 또 어떤 것들은 확실히 낭비인 부분이 있소. 절약하는 것은 미덕이니 짐이 솔선수범하여 백성의 모범이 되어야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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