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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1103)화 (1,103/1,192)

제1103화

기홍이 웃었다.

“저랑 가 대인은 가난한 집안 출신이라 집안이나 출신은 신경 쓰지 않습니다. 영안만 좋다면 상관없어요. 단지 조건을 하나만 더하자면… 집안이 깨끗했으면 좋겠습니다.”

묵용청양은 그녀의 마지막 말을 듣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안월이 아무리 기예만 한다고 해도 그런 곳에서 일하는 이상, 정숙하지 못한 느낌을 줬다.

그녀가 영안을 힐끔 쳐다보니, 그는 아무런 생각도 없는 것 같았다. 그녀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안 되겠으면 황형에게 부탁을 해 봐야 할 것 같았다. 황형이 안월에게 봉호를 내리면 영안에게 시집갈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러면 그녀도 영안의 소꿉동무로서 제 소임을 다한 셈이었다.

다시 기홍이 물었다.

“전하께서는 어떤 사람에게 시집가실 겁니까?”

다른 아가씨들은 이런 말을 들으면 부끄러워 했겠지만… 공주 전하는 태연하게 말했다.

“물론 큰 영웅이죠. 하늘을 떠받치고 서 있는 그런 사람 말이에요.”

기홍이 말했다.

“성격이 좋은 사람으로 찾으세요. 전하를 포용할 줄 알아야 해요. 고고가 보기에는 금언이 아주 좋아 보였어요.”

묵용청양의 허무맹랑한 말을 들었을 때, 영안은 입을 삐죽거리며 피식 웃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하신 말씀을 듣곤 이내 입꼬리가 축 처져 버렸다. 그래도 그는 말없이 기다렸다. 묵용청양이 어떻게 대답할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묵용청양이 말했다.

“사금언은 저보다 어리잖아요. 저는 걔를 동생으로만 생각해요. 전 저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을 원해요. 그래야 사람을 아낄 줄 안대요.”

영안의 입꼬리가 다시 자기도 모르게 올라갔다.

* * *

가난청은 조용한 걸 좋아했다. 그가 집에 있을 때는 하인들도 그의 처소 안뜰을 함부로 다닐 수 없었다. 더욱이 황제가 오셨다는 이유로 하인들은 멀찌감치 물러나야 했고, 차를 내오는 것도 녹하가 직접 했다.

문으로 들어서면 양면에 수가 놓여진 병풍이 보였다. 병풍을 통과한 빛이 아련하게 흩어졌다.

병풍을 돌아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간결하고 깨끗한 내실이 한눈에 들어왔다. 실내에선 향긋한 냄새가 풍겼다.

묵용린과 가난청 사이엔 바둑알이 흩어져 있는 바둑판이 놓여 있었다.

녹하는 찻물을 더해 주고, 또 신선한 마내馬奶 포도까지 한 접시 내왔다. 이 포도는 진상품인데, 가소타가 좋아했고 궁에 다른 여인이 없었기에 매년 묵용린이 가부로 보내 주곤 했다.

두 사람은 바둑판만 응시했다. 사람이 들어왔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아 녹하는 다과만 내려놓고 조용히 물러났다.

문이 닫히며 아주 미세한 소리가 나자 가난청이 고개를 들었다. 그는 황제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황상, 무슨 고민이 있으십니까?”

묵용린은 부인했다.

“아니. 없다.”

묵용린은 평소처럼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가난청은 그의 미세한 표정 변화에서 그의 감정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어떤 군왕도 자기 속내가 들통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가난청이 그의 마음을 헤아리는 건 달랐다. 그들은 여러 해 동안 함께 지내면서 서로에게 익숙했다. 누가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다른 한 사람이 금방 알아차리곤 했다.

황제가 말하고 싶어 하지 않으니, 가난청도 더는 추궁하지 않았다. 사실 조금 의외였다. 묵용린이 가부를 찾아온 이상, 분명 의논할 일이 있을 텐데 막상 와서는 바둑에만 집중하고 다른 말은 하지도 않았다. 황제가 먼저 말을 꺼내지 않으니 더 이상 추궁할 필요가 없었다.

묵용린은 지금 매우 복잡한 심정이었다. 가난청에게 숨길 생각은 아니었다. 다만,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를 따름이었다.

만약 그와 사봉봉이 혼인하지 않았다면, 사봉봉이 지금 누굴 좋아하든 그와는 아무런 상관없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부부이기 때문에 서로 미워하더라도, 최소한의 존중은 있어야 했다. 그에게 시집온 이상 사봉봉은 당연히 다른 남자는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설사 그의 친동생이라고 해도! 이것은 남자로서… 더더욱 군왕의 존엄이 걸린 문제였다!

만약 사봉봉이 부인의 덕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녀를 폐위하고 내쫓아야 한다. 그깟 돈 때문에 외도하는 아내를 용납할 수는 없다.

“황상?”

가난청이 또 그를 불렀다.

묵용린은 시선을 들었다.

“응?”

“황상이 둘 차례입니다.”

묵용린은 바둑판 위의 형세를 자세히 살피다가 더 이상 자신이 둘 자리가 없다는 걸 깨닫고 바둑돌을 통에 넣었다. 가난청은 그런 그에게 너털웃음을 보였다.

“그러게… 왜 바둑을 두면서 딴 생각을 하십니까?”

묵용린은 승복할 수 없었다.

“다시! 다시 두자. 짐이 졌다는 건 믿을 수 없다.”

가난청은 바둑알을 주워 넣으며 그를 놀렸다.

“황상, 궁중에도 바둑을 둘 줄 아는 사람이 있을 텐데 왜 일부러 궁에서 나와 소신을 찾아오셨습니까?”

묵용린은 그가 가리키는 것이 유 귀인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사봉봉이 자신을 겁박하는 동안 그는 유 귀인을 방패 삼아 가끔 바둑을 두었다. 하지만, 나중에 그녀는 고육지책을 쓰다 죽을 뻔했다. 그렇게 그녀를 멀리하다 보니 그런 존재가 있는지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짐은 그녀가 똑똑한 줄 알았는데… 뒤늦게 똑똑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주 미련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짐이 어찌 미련한 사람과 바둑을 둘 수 있겠느냐?”

바둑 한 판이 다시 시작되었다.

흑돌이 선이기에, 가난청이 흑돌을 하나 집어서 귀(바둑판에서 이웃한 두 변에 의해 만들어진 구석)에 놓았다. 묵용린도 백돌을 집어 귀 하나를 차지했다.

처음에는 빠르게 진행되던 대국이 나중에는 점점 느려졌다.

결국에는 바둑돌을 쥐고 고민하던 묵용린은 한참이 지나도 백돌을 내려놓지 못했다.

가난청은 황제가 이런 모습을 보이는 걸 거의 보지 못했기에 조금 놀랐다. 분명 아주 어려운 일을 만난 것이리라. 그가 두 개의 바둑돌을 한 손에 쥐고 번갈아 던지자 유리로 된 돌이 서로 부딪치며 낭랑한 소리를 냈다. 그는 적당히 여유롭게 입을 열었다.

“마음이 고요하지 않으니 바둑이 어지러울 수밖에. 결단을 내려야 할 때, 결단을 내리지 못하면 도리어 화를 입게 됩니다.”

묵용린은 고개를 들었다.

“짐의 심사가 그렇게 분명히 드러났느냐?”

가난청이 피식 웃었다.

“소신은 벌써 눈치챘습니다.”

“짐보고 신경 쓰지 말라는 뜻이냐?”

가난청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황상께서 소신에게 무슨 일인지 말씀하지도 않으셨는데 소신이 어찌 황상에게 의견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감히 소신의 견해를 말하자면, 어떤 일들은 황상께서 제대로 알아보지 않으시면 계속 마음이 편치 않으실 겁니다.”

묵용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결심했다. 그의 고민거리는 사봉봉이 묵용성에게 어떤 태도를 보이는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만약 청양이 말한 대로 성아를 단지 동생으로만 본다면… 용인할 수 있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면 당장 그녀를 폐위할 것이다.

가동은 황제에게 자리를 옮겨 식사할 것을 청했다. 그런데 바둑판을 힐끗 쳐다본 그가 득의만면해 묵용린에게 말했다.

“또 난청이 이겼나 봅니다. 얘가 저를 닮아서 다른 재주는 없지만, 아주 똑똑하죠.”

묵용린이 말했다.

“가 대인, 난청이 한 가지는 자네를 닮지 않았군.”

가동이 물었다.

“그게 뭡니까?”

“뻔뻔함.”

“…….”

가난청은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전에 황제는 묵용청양이 나이만 먹었을 뿐 머리는 자라지 않았다고 했는데, 그는 자기 아버지도 똑같다고 생각했다. 나이가 이렇게나 많이 들었지만, 아직 어린애와 같았다.

가부에서 식사를 시작할 때, 날은 이미 저물어 있었다.

묵용린은 상석에, 영구와 가동은 좌우에 각각 앉아서 황제와 함께 술을 마셨다.

가난청은 술을 잘 마시지 못했다. 많이 마셔 봐야 한 잔 정도였다. 황제는 그의 성질을 알기에 당연히 권하지 않았다.

그런데 나이가 가장 어린 가소타는 주량이 적지 않았다. 일단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 그 호기가 하늘을 찌를 정도였고, 술에 취하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술에 취했다가 깨어나는 게 그녀에겐 별로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술을 마시는 일에 있어서 그녀는 묵용청양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황제가 있었기에 녹하는 자신이 직접 시중을 들었다.

묵용린은 그들과 함께 있을 때는 군신의 예를 따지지 않았고, 자기 가족처럼 그들을 대우했다. 궁에서 그는 늘 외로웠기에 가끔은 이런 분위기 속에 있는 것이 즐거웠다.

한창 식사를 하고 있는데, 묵용청양이 기홍과 영안을 데리고 왔다. 이미 식사를 한 후였지만, 그들이 아직 식사 자리 중인 걸 알고 일부러 찾아왔다. 기홍이 묵용린을 너무 보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세 사람은 황제에게 예를 취했고, 의자에 앉아 함께 음식과 술을 마시며 대화를 나눴다. 술자리에 이미 가소타가 있어서 떠들썩했지만, 묵용청양까지 나타나니 정말이지 난리도 아니었다.

모처럼 이렇게 모이니 다들 기분이 매우 좋았다.

가소타는 자신의 친한 친구 한 명이 빠졌다는 생각에 다른 사람들 몰래 시종을 보내 사금언을 불러왔다. 그녀는 사람들이 더 많으면 북적거리고 훨씬 좋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디 사금언만 오겠는가? 사금언 뒤엔 사앵앵도 함께였다. 그들 모자는 황제가 있는 줄도 모르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이 시선을 들자 윗자리에 단정하게 앉아 있는 묵용린이 보였다. 사금언은 빨리 예를 갖추었지만, 사앵앵과 묵용린은 서로 시선을 마주한 채 아무 말이 없었다.

실내엔 어색한 분위기만 감돌았다.

사앵앵은 묵용 부자가 자신의 딸을 억지로 입궁시킨 걸 도무지 잊을 수 없었다. 속으로 얼마나 묵용 부자를 욕했는지 모른다. 그렇기에 그녀는 마땅히 황제에게 예를 취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최대한 버티고 서 있었다. 옆에서 사금언이 그녀의 소매를 슬쩍 잡아당겨도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냥 서 있었다.

사앵앵이 이렇게 무례하게 구는 것은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었다. 사봉봉이 보내 준 면사 금패가 지금 그녀의 품 안에 있으니, 정 안 되면 이걸 쓰면 되지 않겠는가? 아무튼 여기서 체면을 잃을 수는 없었다. 장모가 사위를 보고 절까지 먼저 올려야 한단 말인가? 어림없는 소리!

분위기가 어색해지자 떠들썩했던 사람들도 하나둘 조용해졌다. 다만 가소타만 이유를 몰라 조용히 물었다.

“오라버니, 황제 오라버니께서 사 주인장께 예를 취하지 않아도 된다고 윤허했어요?”

가난청과 황제 사이에는 가동이 있었지만, 황제는 가난청의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사 주인장은 황상의 장모이니 윗사람이지. 그러니 황상께서는 군신의 예를 받지 않는 대신, 아랫사람의 예를 취하지 않아도 된단다.”

그 말을 듣자마자 묵용린은 그의 의도를 이해했다. 동월 황제가 제일 높은 신분이다. 이른바 선국후가先國後家라 했다. 황제가 장모를 만나면, 우선 장모가 군신의 예를 먼저 취하고, 나중에 황제가 후배의 예를 드려야 했다. 그런데 사 주인장이 먼저 예를 갖추지 않았으니 황제 또한 예를 갖추지 않아도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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