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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1102)화 (1,102/1,192)

제1102화

영안은 의자에 앉아 다과를 입 안에 넣고는 묵용청양을 힐끔 바라보았다. 그 웬수는 찬합 뚜껑만 살펴보고 있었다. 그와 대화를 나눌 의사가 조금도 없어 보였다.

영안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천공에는 파란 기와가 가득 깔렸고, 하늘엔 흰 구름이 폭신하게 깔려 있었다. 금빛 햇살이 대지를 따뜻하게 감싸는 기분 좋은 날씨였다.

그는 목청을 가다듬고 침묵을 깨뜨렸다.

“환경문으로 돌아올 생각은 없는 거야?”

묵용청양은 계속 찬합 뚜껑을 살펴보며 못 들은 척했다.

영안은 할 수 없이 또 입을 열었다.

“환경문에 더 이상 안 올 거라면 내게 말해 줘야 해.”

묵용청양은 시선을 찬합 뚜껑에 고정시킨 채 대답했다.

“난 편제에 포함되지도 않은 수습 인원인데… 내가 가고 싶으면 가고, 말고 싶으면 마는 거지. 누구한테 허락 받을 필요 없잖아? 이건 네가 말한 거야.”

그녀의 날카로운 말투에 영안도 기분이 상했다.

“너 뭐야? 화약이라도 집어 먹었어? 왜 이렇게 성질이야? 난 너한테 잘못한 거 없다.”

묵용청양은 이제야 그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그래, 넌 나에게 잘못한 거 없어. 그냥 내가 옹졸해서 그래. 너랑은 상관없어.”

그러더니 어색하게 웃으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비록… 그래도 난 아직 널 내 가장 좋은 친구로 여기고 있어.”

그는 어안이 벙벙했다.

‘비록…? 그다음에 뭐라는 거야?’

그녀의 밑도 끝도 없는 말이 그를 더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그는 의심스럽다는 듯 물었다.

“너, 무슨 일 있었어?”

“아니, 난 아주 잘 지내.”

묵용청양은 해맑게 웃었다.

그녀는 그에게 화가 났지만, 자신이 억지를 부리고 있다는 걸 자각하고 있었다. 영안도 다 큰 사내이니 당연히 홍안지기가 있을 수 있었고, 또 앞으로 혼인도 하고 아이도 생길 것이다. 미래엔 그녀 말고도 더 가까운 사람이 생기겠지. 걱정거리가 생겨도 그녀에게 털어놓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앞으로 이런 현실에 천천히 익숙해져야 한다.

그녀가 물었다.

“환경문은 요즘 어때? 급히 해결해야 하는 사건은 없어?”

영안이 대답했다.

“있어. 환경문 사람들 중에 몇몇은 외지에 나가 사건을 조사하고 있어. 소제갈과 소마도 며칠 전 남쪽으로 떠났어.”

“넌 안 가도 돼?”

“특별히 중대한 사안이 아니라면… 나는 보통 임안에서 가까운 북쪽 지역에 있어.”

“아, 그렇구나.”

원래 묵용청양이 한참 떠들다 영안이 간헐적으로 입을 열어야 했지만 오늘은 무언가 달랐다. 여기까지 대화를 나누고 나니, 두 사람 사이에는 침묵이 흘렀다. 그러다 웬일로 침울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예전엔 묵용청양이 조용히 해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그녀가 조용하자 예전처럼 조잘거리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이렇게 침묵에 잠기니 그는 왠지 약간 불안해졌다.

그는 애써 할 말을 찾았다.

“아직도 포고를 연습하니?”

묵용청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별로… 적당한 상대가 없어서. 다들 상대가 안 돼서 재미가 없어.”

영안이 말했다.

“최근 몇 년 동안 나도 너무 바빠서 못 했는데…….”

그는 은근히 뒷말을 끌었다. 그가 아는 묵용청양이라면 곧장 반응이 나와야 했지만 오늘은 웬일인지 말을 아끼고 있었다.

그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할 수 없이 먼저 말했다.

“한 판만 할까?”

“좋아!”

이번엔 그녀도 선뜻 대답을 하며 그를 보고 웃었다. 그녀의 미소에는 약간 득의양양함도 깔려 있었다.

이놈의 웬수가 다시 생기를 되찾은 것 같자 그가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두 사람은 포고를 겨루기 위해 풀밭으로 갔다. 이곳은 예전부터 묵용청양이 자주 오던 곳이었다. 그는 아직도 이 풀밭에 누워서 그녀가 자신의 엉덩이를 찼던 일을 생생하게 떠올리곤 했다. 그때 소년은 주먹을 휘두르며 그녀에게 덤볐다. 결국 영 대인에게 걸려 꾸지람을 듣다가도 그녀가 나서면 모든 상황이 해결됐다. 그때를 회상해 보면 그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너무 오랫동안 포고를 하지 않아서 둘 다 조금 어색해했다. 처음엔 서로 탐색전을 펼쳤다. 상대의 틈을 노리다 상대가 한 번, 나도 상대를 한 번 치길 반복했다.

몇 바퀴 돌던 끝에 영안이 손을 뻗어 묵용청양의 허리를 움켜쥐고 팔을 비틀었다. 옆으로 눌린 묵용청양은 풀밭에 넘어져 그에게 깔렸다.

어릴 때, 그는 수없이 묵용청양을 이렇게 깔아뭉갰다. 이건 너무 익숙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된 건지 너무 어색했다.

그가 어리둥절한 틈을 타서 묵용청양이 무릎을 한 번 추켜세웠다.

상황이 반전되자 이번엔 그가 그녀에게 깔렸다. 그녀는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이겼다.”

공주 전하의 옷이 더럽혀진 것을 본 기홍은 아들에게 한바탕 욕설을 퍼부었지만, 영안은 고개를 푹 숙인 채 한 마디도 반박하지 않았다.

묵용청양은 그런 그의 모습이 조금 의외였다. 그가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된 건가? 그런데 얼굴은 왜 또 빨개졌지?

영안이 얼굴을 붉힌 이유는 따로 있었다. 포고를 하며 서로 엎치락뒤치락 했을 때, 그의 몸 위로 보들보들한 것이 자꾸 닿았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이 웬수를 사내 보듯 해서 몰랐는데… 막상 접촉하고 나니 느낌이 뭐랄까…….

기홍도 아들이 좀 이상하다 생각했는지 손을 내밀어 그의 이마를 만졌다.

“얼굴이 왜 저렇게 빨갛지? 열이 나는 거 아니야?”

영안은 그녀의 손길을 피해 발길을 돌렸다.

“날이 더워서 그래요. 가서 좀 씻고 올게요.”

기홍은 영안을 내버려두고선 묵용청양과 함께 곁채로 향했다.

“전하께서도 땀을 한바탕 흘리셨으니 목욕을 하셔야겠습니다.”

두 사람이 목욕을 하고 나오자 기홍이 차린 음식이 반겼다.

묵용청양은 머리를 반쯤 말리고선 주위를 둘러보았다.

“영 대인께서는 또 안 계세요?”

“그이는 가동 댁에 갔습니다.”

묵용청양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쩌면 황형이 가 숙부 댁에 가셨다는 걸 들으셨나 봐요. 아마 그래서 가셨나?”

기홍이 살짝 놀라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황상께서 가부에 계십니까?”

“네, 저랑 같이 나왔어요. 황형은 가난청과 바둑을 두러 갔어요. 저는 여기로 오고.”

기홍은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황상께서 나오신 줄 알았으면 우리가 가부로 갈 걸 그랬습니다. 황상께서도 이 고고의 음식을 드신 지 오래되셨는데.”

“그게 무슨 어려운 일이에요? 다음에 고고께서 궁에 들어와 황형에게 맛있는 걸 만들어 주면 되잖아요?”

기홍은 빙그레 웃었지만, 미간에는 여전히 아쉬움이 가득했다. 묵용린은 공주 전하와 달리 출궁하는 게 자유롭지 않았다. 항상 정사를 돌보느라 궁을 나오기 어려웠던 것이다. 기홍 또한 궁에 자주 들어갈 수 없었다. 하지만, 늘 마음만은 간절했다. 그는 태후와 태상황의 첫 번째 아이였다. 그때 모든 사람이 그를 껴안아 보려 다투었는데… 그 보배가 벌써 다 자라다니.

세월은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흘러서 그 아이는 황제가 되었고, 모두 자신의 가정을 이루게 되었다.

한창 두 여자가 대화를 하고 있는데 영안이 묵용청양의 맞은편에 앉아 탁자 위에 차려진 음식을 바라보았다.

묵용청양은 그를 쳐다봤지만, 그는 계속 시선을 들지 않았다. 그녀는 그가 자신의 시선을 피하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 미간을 찌푸렸다.

“영안, 너 나한테 미안한 거라도 있어?”

그녀의 물음에 영안은 깜짝 놀랐다.

“아니야. 함부로 추측하지 마.”

“그럼 왜 내 눈을 못 봐?”

“네 눈이 뭐가 예쁘다고 보냐?”

“사람 눈을 안 보면 꿍꿍이속이 있는 거지.”

영안은 할 수 없이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런데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그녀의 눈을 보니 다시 그 부드러운 감촉이 떠올랐다. 재빨리 시선을 피한 그의 얼굴은 또다시 붉게 물들어 있었다.

이번에는 묵용청양도 확신했다. 그녀는 그를 똑바로 응시하며 물었다.

“영안, 말해 봐. 절대로 널 탓하지 않을게.”

그런 천박한 일을 어찌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있겠는가? 그는 더듬거렸다.

“정말 아니야. 멋대로 추측하지 마.”

아직 기홍이 돌아오지 않았기에 묵용청양은 여종을 물리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 안월 때문이지?”

“…….”

왜 또 안월이랑 연관을 시키는 걸까? 가만… 그녀가 어떻게 안월을 알지?

“황수는 우리가 어릴 때 같이 자라서 서로에게 가장 친한 사람이라 했지만… 넌 이제 홍안지기가 생겼잖아. 나에게 미안해서 그런 거지?”

“…….”

“처음엔 좀 화가 났지만, 지금은 생각을 비웠어. 너도 다 컸으니 이제 곧 장가를 가서 아내를 맞이하겠지. 그러면 네 아내야말로 너랑 가장 친한 사람이야.”

여기까지 말한 그녀는 작게 탄식했다.

“아버지께서 그러셨어. 이 세상에 부부 말고 늙을 때까지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

갑자기 엉뚱한 소리를 왜 하는 거지? 하지만 진지하게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 그의 마음이 약간 움직였다.

기홍이 들어오자 대화는 여기에서 일단락됐다.

식사를 할 때, 영안은 난생처음으로 묵용청양에게 음식을 덜어 주었고, 기홍은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웃었다. 드디어 공주 전하를 여동생처럼 여기고 아낀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묵용청양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것 봐! 역시 나한테 미안해서 이러는 거야.’

그녀도 음식을 한 젓가락 집어 들어 영안에게 덜어 주었다. 이걸로 그의 사과를 받아들인 셈이었다.

기홍이 입을 열었다.

“공주 전하, 다음에는 성 전하도 데리고 오세요. 성 전하도 못 뵌 지 너무 오래됐어요.”

묵용청양이 대답했다.

“그 녀석은 말도 꺼내지 마세요. 세상에! 매일 어디를 그렇게 다니는지… 궁에서 얼굴을 볼 수가 없어요. 그래서 황형이 조만간 혼사를 내려 성아를 묶어 놓을 거래요.”

기홍이 그 말을 듣더니 흥미를 보였다.

“황상께서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대요?”

묵용청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은 아니에요. 아마 천천히 찾을 거예요. 성아의 조건이면 왕공 대신들이 앞다투어 데려가려고 할 테니까요. 나라면 차라리 소타한테 장가들 텐데. 편하게 지낼 수 있을 거예요.”

그 말에 영안은 밥을 먹다 말고 컥컥댔다.

기홍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전하, 생각나는 대로 말씀하시면 어떻게 해요? 그래도 성 전하의 뜻이 중요하죠.”

묵용청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녀석이 누구를 좋아하는지는 다들 알고 있잖아요. 봉봉은 이미 이 나라의 황후가 되었으니 그 녀석에게 무슨 희망이 있겠어요. 황형이 이미 공표했어요. 가문은 따지지 않을 테니 좋아하는 여인을 골라 오라고.”

기홍은 고개를 끄덕였다.

“황상께서 그렇게 생각하신다니 다행입니다.”

묵용청양은 영안을 힐끗 쳐다보고는 떠보듯 물었다.

“고고, 미래의 며느리는 어떤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

영안이 그녀를 흘기며 말했다.

“오지랖이 넓다!”

묵용청양은 그의 말을 못 들은 체하며 기홍을 재촉했다.

“고고, 한번 말해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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